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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수

눈을 치우다가 눈의 양이나 착한 정도에 대해 조금이라도 불평하는 기미가 보이면,
구력 오래된 왕언니들은 사전담합이라도 한 어조로 조기 진화작업에 들어간다.
이번 눈은 어느 해(내가 공치기 몇 년 전)에 왔던 눈에 비하면 새 발의 피다.
그땐 눈이 너무 많이 와서 팬스 뜯어내고 트럭이 코트 안으로 들어와 눈을 실어 날랐다고,
그럼 또 누가 옆에서 포크레인도 동원되었다고 맞장구를 친다.
해서 나는 여지껏 내가 테니스치기 이전에 온 적이 있다는 말로만 듣던 그 해의 눈보다 늘 적은 양의 눈을 치워왔는데....
아마 몇 년의 세월이 지나고 난 후에는
쬐끔 온 눈을 치우면서도 제설작업에 대해 이러쿵저러쿵하는 새내기 후배들을 만나게 될테고,
나 역시 왕언니들이 날 나무라듯 어제의 눈을 종일 치우고 다음날 또 나와 삽들었던 일들을,
(진저리를 치기보다) 자랑스럽고 행복한 표정으로 추억하게 될 것같다.

사상 초유의 폭설이 온 코트는 저녁이 되자 눈무덤 빼곡히 들어찬 공동묘지처럼 을씨년스럽게 변해,
허리 휘게 치우고 몸 떨리도록 날라 팬스 밖에는 커다란 눈산이 새로 생겼는데도,
코트 안에는 여전히 그득하기만 한 눈더미가 한뼘의 양보도 없어 보인다.
밤하늘을 보며 저 별은 나의 별 저 별은 너의 별하는 낭만 대신 어제밤에는
저 무덤은 누구 것
(공은 시도 때도 없이 나와 잘도 치면서 눈오면 발 뚝 끊는 사람 좀 나와서 치웠으면)
저 무덤은  또 누구 것
(우리코트를 위해서라면 뭐라도 할 듯하지만 삽들고 수레끄는 일만 빼고?)
치워도 치워도 끝도 없어보이는 눈 때문에 독이 올랐는지 눈무덤마다 나오지않은 사람들의 이름을 할당하느라 바빴다.
눈 실은 마지막 손수레가 코트 문을 나설 때 퀴즈문제 하나가 생각났다.
세상에서 제일 끔찍한 섬은? 치워도 치워도라고.
그래도 다 치웠다! 우리가 해냈다! 눈을 이긴거다!

집안청소는 아픈 핑계로 못하겠다면서 눈만 오면 코트로 눈 치우러 나가다보니
뻔뻔한 여자처럼 날 대하는 가족들을 향해 쓰는 근육이 다르다는 항변을 해보지만,
내 억지가 실은 해부학적으로 근거가 있는 얘기였다.

신년들어 처음 올리는 글을 신세한탄으로 시작한다는 건 옳지 않은 일이지만
당분간 글을 올리지 못하게 된 개인적 이유에 대해 아무말 않는 것도 마찬가지란 생각이 든다.
최근 몇 년을 돌아보면 테니스를 정말 좋아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그로 인한 고통 때문에
테니스에 대해서 늘 애증병존상태였다.(어째 싫증난 애인에게 던지는 이별의 변처럼 들릴까!)
글로는 여전히 테니스사랑을 외치지만 회의, 억울함, 원망 등 거듭되는 미움의 감정들에 휘둘려
퇴장의 타이밍을 계산해보는 이중생활을 청산하고 싶다.
오른쪽 상박을 몸통에 딱 붙이고 살 수 있겠으면 그리고 테니스 않고도 살만 하겠으면....
하지만 내게 수술은 더이상 선택이 아니란 결론이다.
백호의 기세로....하라는 경인년 축하메시지들이 허사가 되려나!
신년벽두부터 올 테니스농사는 수확은 고사하고 아예 파종조차없을거라는 달갑지 않은 예상이지만
테니스를 훌쩍 떠나지 않고 그 주변에서라도 맴돌 수 있게 되었으면 한다.




PS)
유감스런 일이지만 내가 올린 글의 상당수는 맨정신으로 쓰여지지 않았다.
알코올의 힘을 빈 적은 한번도 없지만 대신 밤 늦은 시각 눈꺼풀 주체 못하게 쏟아지는 졸음과 싸우고
밤이 깊을 수록 점점 센치해져서 우울과 불평과 세월에 대한 넋두리를 늘어놓기 십상인 경향에도
약간의 저항을 보이며,
몇 개 키 바로 밑에 있는 작은 용수철들을 교환하는 번거로운 유상 수리나
(일단 문제의 빈도가 높은 키를 찾아내어 기사에게 건네 줄 메모 만드는 일보다
가까운 미래에 문제의 키가 될 소지가 있는 키들을 색출하는 일은 고도의 정신적 에너지와 요행을 요하기 때문에)
몇 푼 안하기 때문에 하나 사서 연결하면 쉬이 해결되는 키보드문제와도
그러니까 ㅔ닛 이란 단어가 쳐지면 바로 테니스라고 고치지만
밤 11시 48분에 오늘이라고 시작한 내용을 밤 12시 23분 쯤이 되었을 때 어제라고 수정하지는 않으면서...
맨정신에 읽어보면 창피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대대적으로 수리하기엔 귀찮다는 생각이 들고
코트로 바쁘게 나가야할 일로해서 다음에....하다가는 잊어버린다.





[테니스는 어떻게 완성 되는가?]




  • 모래沙工 01.07 11:58
    그 동안 좋은글 감사하게 읽었는데..
    작가의 어려움을 독자들은 잘 모르지만..
    혜랑님의 부지런함이 있기에 또다른 독자들은
    눈과 정신의 건강함과 즐거움을 많이 받은것 같습니다.
    아주 코트를 떠나지 않는다니 다행이구요..
    건강(정신적, 육체적 모든것 포함)한 모습으로
    코트로 돌아오시길 기원합니다..
  • leewonjip 01.08 00:39
    부상이 심하신가요? 안타깝습니다.
  • 우와 01.13 08:36
    힘내십시오. 눈을 이겨내신 것 처럼 결국은 이겨내실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현실적으로는 아무 도움이 안되지만, 마음으로나마 쾌유하시기를 간절히,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이와 비슷한 마음을 가진 최혜랑님의 열혈 팬들이 한둘이 아닐 것입니다.
    늘 감사한 마음 갖고 있습니다.


  • 주엽 01.13 09:31
    쾌유하실겁니다
    그리고 훨씬 더 좋은 상태에서 테니스 더 재밌게 즐기시길....
  • 윈윈 01.13 15:53
    건강회복하셔서 더 아름다운 글을 볼수있었으면 좋겠습니다.
  • 한계령 01.13 23:35
    무슨 수술을 하셔야 하는지 걱정이 됩니다.ㅠ.ㅠ
    1월 6일 이후 글을 안 올리셨는데 수술 하러 가신 건가요?
    수술 경과가 좋아 2010년엔 그 동안 투자한 모든 것을 수확하는 한 해가 되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실력도 한 번에 한 10년 치 느시고, 인간 관계도 그렇고 등등 희망하시는 모든 것...

    그리고 명지대아카데미 졸업식에서 장학금 타신 거 축하드려요.
    장학금은 회식비로 내 놓으셨다는 말도 들었습니다.

    전해준 사람의 말로는 언니가 테니스계의 VIP이시라고 하더군요.
    하니 떠난다 어쩐다는 말은 거두어주십시오. 통촉하소서...
  • 달더러 01.14 12:17
    언제 또 진솔한 글을 읽어볼까 기다리다가 이제서야 "잠수"란 제목의 의미를 알았습니다.
    빠른 쾌유를 기원합니다.
  • 은조네.. 01.18 22:04
    더...활기찬 모습으로 뵙길 기다리겠습니다.
    빠른 쾌유를 기원합니다.
  • 네앙 01.21 13:56
    글로는 여전히 테니스사랑을 외치지만 회의, 억울함, 원망 등 거듭되는 미움의 감정들에 휘둘려 퇴장의 타이밍을 계산해보는 이중생활을 청산하고 싶다.

    원망하지 마세요. 그저 스스로가 부끄러워서 그랬을겁니다. 억울해 하지 마세요. 말하지 않아도 이해하는 분들이 더 많습니다. 그러니 회의하지 마세요. 이렇게 한 번도 만난적도 없어도 멀리서 님의 모든 것들이 건강하길 소망하는 분들이 더 많으니까요.


     


    건강하세요.

  • 게임돌이 01.21 23:35
    그 많던 눈들이 비온 후 거의 다 녹아버렸습니다 봄눈 녹듯....
    역경이 삶을 부요하게 하지는 않으나 지혜롭게 만든다는 그런 명언을 요즘은 가슴에 새기며 살고 있습니다
    아무에게도 말 못하지만 스스로도 너무나 바보같지만 어쩔수 없이 안고 보듬고 가야 할 저의 생이기에....^^
    저를 먼저 제가 사랑하지 않으면 누가 사랑하겠어요^^
    아름답고 향기가 느껴지던 혜랑님의 글을 다시 볼 수 있도록
    승리하시고 건강하신 모습으로 다시 뵙길 원합니다
    평안하십시요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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