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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만져본 애거시의 손, 내가 받은 마이클 창의 사인 (1)

미국으로 와서 고등학교에서 테니스 팀에 막 들어갔을 때였죠. 당시에 테니스에 대해 모르는게 너무 많고 자료는 턱 없이 부족해서 혼자 상상으로 '이렇게 하면 멋지게 날아가겠지?,' '저렇게 해보는건 어떨까?' 하고 팀메이트들이 하는 모습을 말 없이 뒤에서 흉내내 보고는 벽을 상대로 실험을 해보고는 했죠. 그래서 팀의 주장한테 하소연을 했죠. 도저히 모르는거 투성이니 좀 도움을 달라고 부탁을 했죠 그러더니 그 친구가 다음날 테니스 매거진을 비닐 봉지에 가득 담아서 건네 주더라고요. 1달동안 빌려줄테니 마음껏 배워보라고요. 그 외에 기본적인 그립이나 스핀의 원리는 그날 배웠었죠.

덕분에 테니스 잡지를 탐독할 기회가 생겼는데 그 당시 나이키 광고가 눈에 띄고는 했는데 'Just do it'이라는 캐치 프레이즈와 함께 테니스 선수의 굳은살 박힌 손을 보여주는 광고였죠. 그게 저한테는 자극이 됐는지 저도 물집이 날때까지 열심히 쳐봐야 겠다는 마음을 먹었었죠 - 하지만 웃긴것이 초보라서 자꾸 빗맞는 탓에 친지 10분만에 맨날 물집이 잡히고는 했죠. 그렇게 테니스에 사로잡혀서 2년이 훌쩍 지나가 버리고 굳은살 박힌 테니스 선수의 손도 기억 저편으로 멀어져 갔죠.

2000년 초에 테니스 시즌이 시작하기 전에 저희 학교의 테니스 코치 선생님은 팀 캐미스트리를 틈만 나면 강조하시고는 했는데 그것이 중요할 수 밖에 없는것이 팀 멤버 대부분이 고등학교 이전에 테니스 경험이 있는 사람이 전무하다시피 해서 7전 4선승제의 학교 대항전에서 팀 플레이가 중요한 복식 3경기에서 3 경기를 따고 단식에서 '한놈만 걸려라!'라는 작전(?)이 저희팀의 주 전략이었죠. 심지어 저희팀의 롤모델은 NCAA 농구팀의 곤자가라는 무명 사랍대학이었는데 이 대학은 비록 NCAA 토너먼트 우승 정도의 전력을 보유하지는 못했지만 끈끈한 조직력으로 인해서 유명한 별명이 있었는데 그건 바로 'Seed Killer' 였습니다. 즉, 시드팀과 1 라운드에서 몇년간 만낮지만 그때마다 시드팀을 이겨버린 무서운 팀이거든요. 하여튼 근성으로 똘똘뭉친 저희 팀을 위해서 코치 선생님이 Sybase Open 티켓을 고등학교 팀 초청 추첨에서 당당히 뽑히는 바람에 스쿨 버스 대령해서 시합 구경하러 갔습니다.

애거시와 창이 나온다는건 알았지만 애거시의 1 라운드 상대가 한국 선수라는건 의외의 선물이었죠. 그 선수가 이형택 선수였는데 지금이야 이형택 선수의 활동을 꿰뚫고 있지만 그때 당시는 한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 팀을 배신하고 저 혼자 비어있는 vip석으로 기어들어가서는 포인트 사이사이에 이형택 선수를 고래고래 응원했죠. 응원을 열심히한 덕분인지 당시 무섭게 정상을 향해 복귀하던 애거시 선수와 이형택 선수가 박빙의 승부를 벌이더군요. 시간이 흘러 스코어가 정확히 기억이 안나지만 1세트는 애거시가 7-5, 아니면 타이 브레이크로 이겼던것 같고 2세트는 이형택 선수가 브레이크 성공하고 6-4로 이겼죠. 흥분하지 않을수가 없었죠. 음...당시 당황스러웠던거 사람들이 제가 이형택 선수 팬인줄 알고 동양의 이방인 선수에 대해서 저에게 이것 저것 꼬치꼬치 캐묻기 시작했죠. 대학은 어디 졸업했나, 아마추어 생활을 미국에서 했느냐, 그전에 입상한 대회가 있느냐...그 상황에서 잘 모르는 선수라고 도저히 대답할 수 없어서 약간의 '뻥'을 섞어서 대답했죠. 우선 아는것부터 대답했죠...한국에서 아마추어 생활했고 한국에서 열린 대회는 휩쓸었고 투어 시작은 얼마 안됐다...라고 대답했지만 졸업한 대학은 졸지에 서울대가 되고 말았습니다.

대망의 3세트. 2세트까지 애거시 선수가 고전했던 이유는 백핸드 리턴과 그라운드 스트로크 대결이였습니다. 애거시 선수가 백핸드를 킥서브로 집중적으로 공략하려고 했는데 이형택 선수가 이것을 점프해서는 탑스핀 팍팍 넣어서 리턴해버리니까 서브의 주도권을 잃고 말았던 거죠. 그리고 그라운드 스트로크에서도 한치도 밀리지 않으니까 애거시 선수가 심리적으로 위축되버린 거죠. 정말 그대로만 갔다면 승부의 향방을 예측할 수 없었을텐데 3세트부터는 애거시 선수가 아주 공격적으로 바꿔버렸습니다. 모든샷을 라이징샷으로 바꿔버리고 플랫샷도 무리하다 싶을 정도로 노렸고 세컨드 서브는 리턴 에이스를 노리기 시작했거든요. 심지어 발리마저도 옛날의 스윙 발리로 처리해버리니까 이형택 선수가 자신감을 잃어버리고 더블 폴트를 내주기 시작하더니 결국은 6-2로 3세트는 허무하게 내줘버렸습니다.

비록 패자였지만 경기가 끝난후 이형택 선수의 의외의 선전에 관중들은 박수를 쳐줬고 애거시 선수의 인터뷰에서는 질문중에 '오늘 고전의 이유가 뭡니까?'라는 질문도 있었죠. 원래 시합에서 패자는 승자의 인터뷰 사이에 조용히 빠져나가는게 관례이지만 의외의 선전 덕분인지 이형택 선수에게 사인을 청하는 관중들이 몇몇 있었고 그들에게 사인을 해주시더군요. 저요? 저는 다른 사람들이 사인 받는 사이에 반대편 사이드에 있어서 빠져나가는 사람들 사이에 껴서 사인 받으러 결국 못갔어요. T_T; 이윽고, 애거시 선수의 인터뷰가 끝나고 저는 이번에는 사인을 놓칠수 없다는 마음에 선수들이 빠져나가는 게이트에 진을 치고 있었죠.

애거시가 종종 걸음으로 게이트에 걸어왔고 저는 이형택 선수 응원하느라 쉰 목소리로 '애거시, 사인 좀 해주세요!'라고 (물론 영어로 말했죠...^-^;; 편의상 번역을 바로 해버렸습니다) 외치면서 한손에는 사인지 하고 볼펜을 다른 한손으로는 손을 뻗쳤죠. 제 사인지 든 손을 지나쳐 버리길래 역시 안되는구나 하고 생각할때 제 다른 한쪽손을 누군가 잡더군요. 순간 고개를 번쩍 드니까 애거시 선수가 제 손을 잡으면서 웃는 얼굴로 제 눈을 응시하더라고요. 그런데 손이 참 따뜻하고 부드러웠습니다. 속으로 순간적으로 스치는 생각이 '어, 이손은 내가 생각하는 그 손이 아닌데...'라고 생각하며 2년전의 나이키 광고를 머리속으로 떠올렸습니다.

그리고 나서 경기 장면들이 생각났습니다. 물 흐르듯 부드러운 움직임과 스트로크들 무지 어렵게 보이는 샷도 리턴해 버리는 비밀은 부드러운 손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구심이 들더군요. 부드러운 손! 그것 하나만으로 제 게임은 에러가 현저히 줄어들고 파괴력은 늘어나서 그해에 마침내 학교 팀에서 단식 선수로 떠올랐죠. 그리고 그 해에 저는 '한놈만 걸려라!' 작전의 주역이었고
저희 학교는 리그 순위를 17승 3패로 2위로 마쳤습니다. 손 하나만으로 몇달 레슨을 순간에 해치운 애거시 선수, 정말 대단하지 않나요?

  





[테니스는 어떻게 완성 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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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mment '7'
  • 이미영 08.19 16:50
    따뜻하고 부드러운 손....테니스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손.......
    테니스에 남다른 애정을 갖게했던 추억인거 같네요...부럽습니다..
  • tenniseye 08.19 16:55
    음..김진엽님의 명쾌한 글과 멋진 표현들,,너무 감명깊게 잘 읽었습니다.이홈에 오시는회원님 모두 꼭 읽어보셨으면 합니다..추천합니다..강추...
  • 상현 08.19 22:00
    필이 팍팍 오는 글임다. 부드러운 손... '한놈만 걸려라' ^^
  • 최진철 08.20 01:01
    하하하하하 ^^ 정말 재미있고.. 감동적인 글 입니다.. ^^
    꼭 저의 미래의 모습을 상상하면서 읽었습니다....
    저도 us open 경기장에 가깝게 살아서.. 이번에 기회가 된다면 티켓 구해서 가보고 싶은데..
    그 티켓 구할 돈으로 라켓하나 더 살까... 어느 것이 더 좋을까 하는 고민에 빠져있습니다.. ^^;;
    저도 한번 아가씨와 악수를 하고 싶네요..
    이번에 아가씨가 챔피언 하면 바로 은퇴 한다는데.. ^^
    그래도 아가씨가 멋지게 챔피언 먹구 좋은 은퇴 하였으면 합니다. ^^
  • 최찬 08.20 07:45
    오 형욱님 글이랑 같이 제가 읽은 이야기 넘버1입니다..
  • 형욱 08.20 07:53
    이야 굉장하네요~ 정말 부럽기도 하고요.. 저도 그런 부드러운 프로의 손 한번 만져 봤으면~~ 하네요 ^-^
  • 정진우 08.20 18:08
    애거시가 위대한 점은 세월이 흐르면서 더욱더 침착해지는 것과 경기를 질 때도 결코 실망하지 않는 것 같은 그의 얼굴과 눈빛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애거시가 참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