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헛되지 않게...(펌)

국내 들어올 6천톤급 쇄빙선 구조와 기능

남극 세종기지 월동대원 고 전재규(27)씨의 안타까운 죽음을 계기로 빨라진 ‘쇄빙 종합해양과학조사선’(쇄빙선)의 도입계획이 극지 연구자들한테 새로운 꿈을 안겨주고 있다. 쇄빙선은 고무보트를 대신할 안전한 수송수단으로 일반에 알려졌지만, 사실 더 중요하게는 남·북극 극지 연구의 영역을 획기적으로 넓혀줄 것으로 기대된다.
한국해양연구원 극지연구소 정호성 박사(책임연구원, 지난해 월동대장)는 “지난 15년의 우리나라 극지 연구가 1단계였다면 쇄빙선 도입 이후는 2단계가 아니라 10단계에 해당할 정도”라며 “다양한 분야의 과학자들이 쇄빙선을 타고 남·북극 깊숙이 들어가 본격적인 극지 연구를 할 수 있게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는 “전재규 연구원의 죽음이 헛되지 않게 쇄빙선을 이용한 극지 연구가 꽃을 피우도록 해야 할 것”이라며 눈시울을 붉혔다.

고 진재규씨 죽음 계기 3~6년내로 도입 앞당겨빙하·고층대기 연구, 지하자원 탐사활동 탄력

제2남극기지 건설 추진도


두꺼운 바다 얼음을 깨며 나아가는 쇄빙선은 큰 얼음이 떠다니는 남극과 북극해에서 극지 연구를 하는 데 필수적인 특수 연구선이다.

앞으로 짧게 3년, 길게 6년에 걸쳐 건조될 6천t급의 우리 쇄빙선은, 예컨대 부산항을 떠나 곧장 남극 세종기지와 북극 다산기지는 물론 남·북극의 극지까지 드나들며, 여름철인 12~2월의 남극과 6~8월의 북극에서 극지 연구를 수행할 예정이다. 쇄빙선은 한반도에서 남극까지 대략 30~40일, 북극까지 20여일이면 갈 수 있어, 넉넉잡아 두 달이면 남·북극을 오갈 수 있다.

이에 따라 해양, 지질, 환경, 물리, 생물, 우주 등 다양한 분야의 과학자들이 극지에 드나들며 국내에선 지금까지 개척되지 않았던 영역에서 연구성과를 쏟아낼 것으로 기대된다. 남극대륙의 미국 맥머드기지를 방문했던 박병권 공공기술연구회 이사장은 “쇄빙선을 갖춘 미국 기지엔 한해 2천여명의 과학자들이 찾아 극지 연구를 한다”며 “현재 수십명 수준의 우리 연구자들도 크게 늘고 다양화해 새로운 연구분야를 개척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무엇보다 극지까지 안전하게 드나들 수 있어 ‘남극 연구의 꽃’이면서도 지금까지는 엄두를 내지 못했던 빙하 연구와 고층대기 연구가 가능해진다. 수만~수십만년 동안 평균 2160m 두께로 켜켜이 쌓인 남극대륙의 빙하는 수만~수십만년 전의 지구 대기를 머금은 ‘냉동 타임캡슐’로서, 고기후·환경 연구에 중요한 시료가 된다. 또 성층권의 기상에 큰 영향을 끼치는 고층대기의 변화를 추적해 지구 전체의 기후와 환경을 좀더 근본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정 박사는 “한 나라의 극지과학은 대체로 빙하와 고층대기의 연구성과에 따라 평가되곤 하는데, 우리도 이 분야에서 연구성과를 낼 수 있게 돼 앞으로 남·북극에서 우리나라의 발언권도 커질 것”이라고 기대했다.

석유를 대체할 북극의 가스수화물 등 지하자원에 대한 탐사활동도 탄력을 받을 전망이다.

또 남·북극의 극지생물 연구는 지구 전체의 생물 진화를 밝히는 데 도움을 줄 것으로 기대된다. 정 박사는 “남극에만 펭귄이 산다고 생각하지만 북극에도 펭귄과 같은 조상에서 진화한 ‘퍼핀’이 산다”며 “지구 전체의 생물 진화를 이해하려면 남·북극을 모두 보아야 가능한데 쇄빙선이 이런 연구를 가능하게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극지의 생태 연구 성과에 따라 극지의 수산자원 어획 쿼터가 결정되는 관례에 비춰볼 때, 쇄빙선은 크릴·메로·명태 등 남·북극해의 수산자원 쿼터를 늘리는 데에도 간접 기여할 것으로 보인다.

온대지방에선 하기 힘든 극지건설 기술 개발과 얼음역학 연구를 위한 자연실험장으로 남극대륙을 활용할 길도 열리게 된다.

이와 더불어 보급선 구실도 겸하는 쇄빙선의 도입계획에 따라, 남극대륙에 제2의 남극기지를 세우자는 계획도 한창 논의가 이뤄지고 있다.

1988년 남극 세종기지 건설 당시 책임연구자였던 박병권 이사장은 “쇄빙선 하나가 극지과학의 지형을 크게 바꿔놓고 있다”며 “우리의 극지과학을 ‘세계 수준’으로 올려놓는 계기가 되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오철우 기자 cheolwoo@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