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 cannot see this page without javascript.

본문 바로가기


아가씨의 부인 - 슈테피 그라프(여)

슈테피 그라프(여) - 테니스의 전설!


1985년 윔블던 대회 남자 결승. 4세트만에 우승자가 확정되는 순간 독일 각지에서는 때아닌 도심의 경적소리가 울려퍼졌다. 1930년대에 프랑스오픈을 제패한 바 있는 폰 크람(G. von Cramm)과 헨켈(H. Henkel)이후 약 50년만에 독일국적의 메이저대회 우승자가 탄생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17세 앳된 모습의 보리스 베커(Boris Becker)였다. 윔블던에서는 최초의 독일인 우승이었으며 역대 최연소 우승, 무시드(unseeded) 우승이라는 기록과 함께였다. 베커의 윔블던 우승은 독일전역에 베커 열풍을 가져왔고 그동안 독일에서 스포츠분야 시청률 1위였던 축구를 누르고 테니스가 시청률 1위에 오르는 계기가 되었다. 그로부터 2년 후인 1987년 프랑스오픈 여자 결승. 31살의 ‘철의 여인’ 나브라틸로바와 독일에서 온 18세의 소녀가 결승에 올랐다.

당시까지 약 10년간 에버트와 나브라틸로바가 메이저 무대를 양분하였기 때문에 이 독일소녀의 결승진출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첫세트 6:4로 나브라틸로바를 제압한 이 소녀는 2세트(4:6)를 잃고 3세트를 맞이하였다. 3세트도 6:6으로 팽팽한 균형이 이어졌다. 

4대 메이저 대회에서는 마지막세트 타이 브레이크가 적용되지 않으므로 계속해서 타이 브레이크 없이 경기가 진행되었다. 자신의 서브게임을 지킨 독일소녀는 나브라틸로바의 서브게임을 백핸드 슬라이스로 응수하며 브레이크, 8:6으로 경기를 마무리 지으면서 자신의 첫 메이저 타이틀을 차지하게 된다. 이 독일소녀의 이름은 남자의 베커와 함께 독일테니스의 황금시대를 열고 80년대 후반과 90년대 여자 테니스를 주도해 나갔던 슈테피 그라프이다. 


슈테피 그라프(Steffi Graf, 1969- )
슈테피 그라프(본명: 슈테파니 마리아 그라프 Stefanie Maria Graf)는 1969년 6월 14일, 독일 하이델베르크(Heidelberg)와 만하임(Mannheim)에서 그리 멀지 않은 작은 마을 브륄(Bruehl)에서 태어났다. 이 당시엔 그의 아버지 페터 그라프(Peter Graf)가 자동차 영업과 자동차 보험, 그리고 부업으로 테니스 코치 생활을 하고 있을 때였다. 그녀의 나이 만 3세 9개월이었던 1973년 3월, 아버지는 처음으로 그녀의 손에 테니스 라켓을 쥐어주었다. 


그녀는 거실에서 의자를 네트삼아 아버지가 넘겨주는 공을 받아치는 방식으로 테니스 연습을 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의자네트를 넘기기는커녕 공을 라켓에 맞추는 것 조차 힘들었지만 공을 네트위로 넘기면 자기가 좋아하는 장난감이 선물로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에 고사리손으로 들기도 힘든 라켓을 줄기차게 휘둘러댔다. 


아버지는 슈테피가 매번 의자네트를 넘기는 수준에 이르자 곧 딸을 집근처의 테니스장으로 데려가 정기적으로 연습시켰고 이때부터 그녀의 실력은 점점 더 향상되었다.

5그녀의 나이 5세때인 1974년. 그녀는 첫 토너먼트에 참가하게 된다. 뮌헨에서 열린 7세이하 아동 테니스대회에 참가한 그녀는 1회전에서 패하자 눈물을 펑펑 쏟으며 아버지의 품에 안겼다. 


이는 어린 슈테피에게 최초의 좌절감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듬해엔 동년배의 어린 테니스선수들을 이기고 때때로 자기보다 한두살 나이가 많은 주니어 선수들을 이기면서부터 급격히 실력이 향상되기 시작한다. 


어린 딸의 재능을 간파한 아버지는 라이멘(Leimen) 지역 테니스연맹에서 주임코치를 맡고 있던 보리스 브레스크바(Boris Breskvar)에게 연락을 취해 딸의 성장 가능성을 타진하게 된다.(주임코치 브레스크바는 어린 소년 보리스 베커를 발견하여 지도했던 인물이다.) 


슈테피의 재능에 크게 감복한 브레스크바는 슈테피에게 라이멘의 테니스시설을 이용하도록 허가하였으며 그녀는 이때부터 12세에 이르기까지 라이멘에서 지도를 받게 된다. 아버지는 매일 새벽에 일어나 딸을 라이멘에 데려다 주었고 그녀가 아침 7시부터 8시까지 테니스 교육을 받으면 그녀를 다시 학교로 데려다 주는 헌신을 보였다.

그녀는 1976년 라이멘의 바덴 테니스 센터(Baden Tennis Center)에서 보리스 베커를 처음으로 만났다. 당시 9세였던 보리스 베커와 7세였던 슈테피 그라프는 함께 브레스크바의 지도를 받으며 각종 주니어 대회에 참가하게 되었고 하이델베르크 대학 스포츠 연구센터의 케르만 라이더(Kermann Reider)교수가 테니스 천재인 이들을 5년동안 관리하였다.

이 기간동안 그라프는 국내의 각종 주니어 대회를 휩쓸었고 12세에 이르러서는 미국으로 원정을 떠나 권위있는 국제 주니어 대회 오렌지 보울(Orange Bowl)의 타이틀을 차지하게 된다. 이미 세계의 주니어 선수들 중에서는 그녀의 적수가 없었다. 그녀는 1983년 만14세도 안된 상태에서 프로로 전향하였고 바로 프랑스오픈에 참가하여 2회전까지 진출하였다. 


연말랭킹 또한 98위에 랭크, 그녀의 테니스 정복은 이제 시간문제였다. 그라프는 이듬해인 1984년 로스엔젤레스 올림픽의 테니스 시범경기(88년 서울올림픽부터 정식종목)에 최연소선수로 참가하여 금메달을 따내었다. 연말랭킹도 급격히 상승하여 22위에 랭크되었다. 1985년엔 16세로 랭킹 톱텐에 진입, 연말랭킹을 6위로 마크한 그녀는 1986년 8개의 타이틀을 따내며 랭킹 3위에 올라 세계를 놀라게 하였다. 


당시 언론에서는 슈테피 그라프로 불리우는 독일 소녀가 13년 연상의 철의 여인 나브라틸로바의 시대를 종식시킬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라고 내다보았고 그 꿈은 현실로 다가왔다.

앞서 설명했듯이 87년은 그녀의 첫 메이저 타이틀의 해였다. 당시까지만 해도 난공불락이었던 나브라틸로바의 아성을 프랑스 오픈에서 무너뜨리면서 새롭게 등장한 그라프는 윔블던, US오픈에서 연속 준우승하면서 그녀 생애 처음으로 랭킹 1위에 올랐다. 랭킹1위에 걸맞는 성적은 88년에도 이어졌다. 


그라프 생애 최고의 해인 88년에는 4대 메이저대회를 모두 휩쓸며 모린코놀리(53), 마거릿 스미스 코트(70)에 이어 여자테니스 역사상 3번째로 그랜드슬램의 위업을 달성하였던 것이다. 그녀는 정식종목으로 채택된 88 서울 올림픽에서도 미모의 아르헨티나 선수 가브리엘라 사바티니를 일축하며 금메달을 획득, 언론으로부터 골든슬램(Golden Slam)이라는 칭호가 부여되었다. 

골든슬램은 한해에 4대 메이저 대회와 올림픽을 제패하는 것을 의미하며 남녀 통틀어 현재까지 슈테피 그라프가 유일하다. 서울올림픽에서 그라프는 동료 클라우디아 코데-킬쉬(Claudia Kohde-Kilsch)와 짝을 이뤄 복식에서도 동메달(준결승에서 체코의 노보트나/수코바 조에게 패함)을 획득하기도 하였다.

그랜드슬램을 달성한 그라프의 메이저 타이틀은 그녀의 나이 30세인 1999년까지 계속되었다. 그녀가 거둔 4대 메이저 대회의 단식 타이틀은 호주호픈 4회(88-90, 94), 프랑스오픈 6회(87, 88, 93, 95, 96, 99), 윔블던 7회(88, 89, 91-93, 95, 96), US오픈 5회(88, 89, 93, 95, 96) 등 총 22개로서 마거릿 스미스 코트(24개)에 이어 역대 2위를 기록하고 있다. 


준우승 9회를 포함하여 메이저 대회에서만 총31회의 결승진출을 이루어낸 것이다. 그녀는 생애 통산 타이틀 또한 107회를 기록, 나브라틸로바(167회), 크리스 에버트(154회)에 이어 역대 3위를 달리고 있다. 그녀의 업적은 랭킹분야에서도 탁월함을 나타내었다. 1987년 처음으로 연말랭킹 1위에 올라 90년까지 4년간 연속 1위, 91년과 92년에는 모니카 셀레스(Monica Seles)에게 1위자리를 내주었지만 93년부터 96년까지 다시 4년간 연속 1위를 차지하였다. 


특히 그녀가 이룬 186주 연속 1위, 총377주 1위의 기록은 역사상 유례없는 기록으로 남게 되었다.

90년대 여자 테니스는 <그라프의 시대, 셀레스의 도전>으로 요약될 수 있다. 80년대 후반 그라프의 라이벌은 나브라틸로바였지만 90년대 초 모니카 셀레스의 등장으로 그라프-셀레스라는 새로운 라이벌 구도가 형성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경쟁구도를 막은 사건은 바로 93년 독일 함부르크 대회였다. 


그라프와 셀레스의 라이벌 대결이 있던 날 관중 속에서 어느 괴한이 칼을 들고 갑자기 나타나 경기중 벤치에서 쉬고있는 셀레스를 피습, 등을 칼로 찌르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범인은 현장에서 즉각 체포되었고 진행중인 경기는 취소되었다. 


부상을 입은 셀레스는 곧바로 병원에 이송되어 얼마 후 퇴원했지만 이 사건으로 정신적, 육체적 충격을 받고 이후 2년간 테니스 활동을 중단하게 된다. 셀레스는 2년 후 선수생활을 재개하였지만 사건이 있던 시점은 셀레스가 그라프를 꺽고 승승장구하던 시기였기 때문에 셀레스로서는 선수생활에 상당히 치명적으로 작용했다.


당시의 범인은 그라프의 광적인 팬이자 정신이상자였는데 본의아니게 셀레스에게 폐를 끼치게 된 그라프는 사건 이후 셀레스가 입원한 병원을 방문, 위로하였다. 하지만 이 사건이후 현재까지 셀레스는 독일에서 개최되는 경기에 한번도 참가하지 않았다.


1987년부터 1996년까지 10년간 한차례도 거르지 않고 매해 메이저 타이틀을 획득했던 그라프도 1997년 프랑스오픈 후 부상을 입게되어 한동안 경기에 출전하지 못했다. 이 때문에 97년 연말랭킹은 28위로 떨어지게 되었으나 98년 윔블던 대회에서 다시 코트에 복귀하여 전성기 때의 감각을 찾는데 성공, 톱텐에 재진입하게 된다. 


그라프는 99년 프랑스 오픈에서 힝기스를 상대로 그녀의 마지막 메이저 대회 타이틀을 차지하였고 당해 윔블던에서도 결승까지 올랐으나 데이븐포트에게 패하였다. 99년 프랑스오픈과 윔블던 준우승으로 랭킹이 3위까지 올랐으나 그라프는 곧 은퇴의 길을 택하게 되었다. 만30세를 넘겨 선수생활을 계속하기는 무리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슈테피 그라프를 훌륭한 테니스 선수로 키우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던 사람은 바로 그녀의 아버지 페터 그라프였다. 하지만 그는 슈테피가 여자테니스를 평정하며 상당한 상금수입을 올리게 되자 돈을 직접 관리하기 시작하였는데 수입을 개인적으로 유용하고 탈세 등의 범죄를 저질러 97년 정부로부터 실형을 선고받고 수감되었다. 


그는 이듬해 감형이 되어 풀려났지만 슈테피 그라프가 당시 아버지의 탈세 내용을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이 사건으로 슈테피와 아버지는 결별하게 되었다.

그라프는 아버지 페터와 어머니 하이디 사이의 1남 1녀중 장녀이다. 두살 아래인 그녀의 남동생 미카엘 그라프(Michael Graf)는 카레이서로 활동하고 있다. 그녀가 남동생을 통해 알게 되어 7년간이나 사귀어 온 남자친구 미카엘 바텔스(Michael Bartels, 독일의 카레이서)와는 99년 여름에 이르러 관계를 정리하였다. 


이것는 99년 프랑스오픈 이후 남자 테니스의 스타 안드레 애거시와 급격한 진전을 이룬 직후 그라프가 내린 결정이었지만 남자친구를 바꾸게 된 원인에 대해서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새로운 연인 애거시와는 지난 가을 결혼하였으며 얼마후 아이를 출산하게 되었다. 현재 미국 라스베가스의 호화저택에서 애거시, 새로 태어난 아이와 함께 즐거운 한때를 보내고 있는 그라프는 자신의 수입으로 만들어진 재단을 통하여 전 세계의 불치병 아동, 기아상태에 있는 아동들을 위하여 구호활동을 벌이고 있기도 하다.
<끝>

<필자 후기>
한달간 지속되었던 <테니스의 전설들>을 드디어 마칩니다. 그동안 애독해주셨던 독자분들에게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테니스의 전설들> 총14편을 집필하면서 느낀 것이지만 역시 시리즈물은 힘들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애당초 <테니스의 전설들>이외에 <주목해야 할 세계의 주니어 선수들>, <그랜드슬램 대회의 역사> 등을 계획하고 자료까지 준비했었는데 이번 시리즈물로 집필능력에 한계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다른 일도 해야 하고 해서.. 어쨌든 긴 글을 읽으시느라고 수고하셨습니다. 그럼 즐거운 크리스마스와 연말 보내시고 내년 언젠가에 다시 뵙도록 하겠습니다. 답글을 남기시며 성원해주신 분들께 다시한번 감사드립니다.


<테니스의 전설들>에 사용되었던 참고문헌을 끝으로 저는 이만….

><참고문헌>
1.신문/잡지/방송(개인소장자료)
-Bild/Sueddeutsche Zeitung 1999-2001년 테니스 관련 특집기사 모음.
-ZDF/ARD/DSF/Eurosport 테니스 경기/해설 영상 자료(녹화분).
-Deutsch 2000.3월호-2001. 11월호

2.인터넷 자료 사이트
-www.frenchopen.org
-www.tennistours.com
-www.sportsillustrated.cnn.com
-www.tenniscorner.net
-www.usatoday.com/sports/tennis/tennis.htm
-http://tennis.about.com
-www.wimbledon.com
-www.usopen.org
-www.tennisfame.org
-www.terra.com/specials/sportsicons/


3.CD 자료
-브리테니커 사전(멀티미디어판 2000 CD) 스포츠인 인명편
-Enkarta Enzyklopadie Plus 2000

.





[테니스는 어떻게 완성 되는가?]


  • 윤태웅 11.04 11:11
    그런 전설적인 인물도 한 남편의 아내로서 평안하게 산다고 하니 보기좋군요.우리 인생의 종착역은 역시 인생의 동반자를 만나는 것 아니겠습니까?
    히히 전 아직 대학생입죠(95학번 28세 입니다.) 마지막 학기를 다니면서 테니스에 열라 몰두하고 있는중입니다.

  1. 나달은 누구? - 경기할 때 열정, 집중, 긍정 이 세가지를 늘 생각한다

    라파엘 나달 롤랑가로스 12번 우승 인터뷰 나달은 말 실수를 거의 하지 않는다. 늘 공손하고 겸손하고 상대를 존중한다. 자신은 늘 배우는 자세로 테니스를 대한다고 했다. 아래는 롤랑가로스 남자 단식 우승한 라파엘 나달과의 공식 인터뷰. -결승전에 27번 ...
    Read More
  2. 알렉산더 즈베레프는 누구?

    알렉산더 즈베레프( Alexander Zverev) 독일 국적의 세계랭킹 5위 1997년생, 2013년에 프로에 데뷔했으며, 2016년에 러시아에서 열린 샹트페테르브크 대회에서 첫 투어 타이틀을 획득했다. 첫 우승 당시 결승전 상대는 페더러와 함께 스위스 듀오로 불리는 스...
    Read More
  3. 결국 남는 것은 사람- 37살 '코트의 황소' 다비드 페레르

    스페인의 다비드 페레르(37)가 은퇴수순에 들어갔다.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오픈을 끝으로 은퇴를 선언한 페러가 나달과의 바르셀로나오픈 3회전을 끝으로 정들었던 코트를 떠난다. 나달과의 경기막판에 빗방울이 떨어져 은퇴하는 페레르의 심경을 나타내는 듯...
    Read More
  4. 알리아심은 누구..35년 만에 마이매미 역사 새로 쓴 차세대 리더

    2019년 3월18일부터 시작된 마이매미 마스터즈 테니스 대회에서 역사적인 기록을 이어가는 선수가 있다. 준결승에 오른 18살, 캐나다의 펠릭스 오제 알리아심이다. 알리아심은 3월 28일 열린 8강전에서 22살, 13위인 크로아티아의 보르나 초리치를 2-0으로 이...
    Read More
  5. 피에르 위그 에르베르는 누구?..복식에서 4대 그랜드슬램 우승한 실력파

    2019년 호주오픈에서 정현과 32강 진출을 놓고 대결한 프랑스의 피에르 위그 에르베르(Pierre-Hugues Herbert)는 1991년생으로 188cm의 장신에 속한다. 당시에 정현에 3-1로 승리했으며 2015년 윔블던 1회전에 이은 두번째 맞대결 승리였다.(윔블던 3-2승) 200...
    Read More
  6. 페더러 - 오늘날의 나를 있게 해준 사람은 피터 카터

    17년전인 2002년 남아공에서 신혼여행 중 교통 사고로 사망(당시 37세)한 페더러의 코치 피터 카터 사진=팍스 스포츠 페더러는 8일 CNN과의 인터뷰에서 "오늘날의 나를 있게 해주고 나의 기술을 완성 시켜준 사람" 이라고 말하며 눈시울을 붉혔습니다. 1964년...
    Read More
  7. 스테파노스 치치파스는 누구 - 차세대 세계 테니스 리더

    2019년 20살이 되는 그리스 청년의 미래는 희망적이다. 치치파스는 2018년 넥스트 제너레이션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으며, 스톡홀름 투어 에서 첫 ATP 타이틀도 손에 쥐었다. 2016년 프로데뷔 후 2년만에 세계 랭킹 15위에 올라있다. 20위내에 올라있는 선수...
    Read More
  8. 보르나 초리치는 누구?

    보르나 초리치(인스타그램) 올해 21살인 초리치는 크로아티아 태생으로 2013년 프로에 데뷔했다. 10월8일자 세계 랭킹 19위에 올라있으며 통산 투어 타이틀 2개를 보유한 선수로 차세대 ATP 리더로 부상하고 있다. 2017년부터 이탈리아 출신의 리카르도 피아티...
    Read More
  9. 조코비치는 누구..니키필립과 마리온 바에다 만나 대선수의 길로

    조코비치는... 세르비아의 베오그라드에서 1987년 2월 태어난 조코비치는 4살 때부터 테니스를 시작하였다. 아버지를 비롯해 삼촌과 숙모까지 모두가 프로 스키선수 출신이었으며, 가족들도 조코비치가 훌륭한 스키선수가 되어주기를 원했다고 전해진다. 그러...
    Read More
  10. 테니스 코트의 지배자..도미니크 팀은 누구?

    사진=테니스피플 2018년 US오픈에서 승승장구 하며 탑 시더들을 위협한 20대 선수가 있었다. 당시 세계 랭킹 9위에 올라 있던 오스트리아의 도미니크 팀이다. 클레이코트를 특히 좋아하는 팀은 ‘도미네이터’(지배자)라는 별명을 갖고 있다. 강력한 탑스핀 포핸...
    Read More
  11. 존 밀맨은 누구?...우리나라대회 '단골손님' 밀맨

    밀맨은 2012년 부산오픈 챌린저 때 구멍난 테니스화를 신고 경기를 했다 존 밀맨(1989년 6월 14일생)은 호주 브리즈번 출신 선수로 역대 최고 랭킹은 52위. 룩 소 렌센이 코치를 맡고 있다. 투어 우승은 없고 결승에 한번 올랐다. 우리나라 챌린저와 퓨처스에 ...
    Read More
  12. 라파엘 나달은 누구?

    라파엘 나달에 대하여 테니스 팬들이 조금은 잘못 알고 있는 부분들이 있다. 탑 5에 항상 자리하고 있지만 클레이 코트에서만 유독 강하고 다른 코트에서는 그저 그런 선수로 평가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나달의 기록을 세세하게 들여다 보면 그런 선입견은 옳...
    Read More
  13. 코치는 선수에게 배우는 직업-도미니크 팀을 업그레이드 시킨 귄터 브레스닉

    ▲ 11년간 선수를 키우면서 그 경험담을 모아 책을 낸 귄터의 '도미니크 팀 방식' 베테랑 오스트리아 감독(57세) 귄터 브레스닉은 도미니크 팀의 코치다. 오스트리아에서 30년간 감독직을 맡아온 귄터는 지난 11년 동안 도미니크 팀을 맡아 훈련시켰고 업그레이...
    Read More
  14. 디에고 슈와르츠만은 누구?

    인스타그램 170CM로 현역 ATP 선수중 키가 가장 작아 붙여진 별명이 [작은 거인]인 디에고 슈와르츠만은 1992년 아르헨티나 브에노스 아이레스에서 태어났다. 친구들이나 가족들은 별명으로 Shorty(키작은 사람)..땅꼬마(?)로 부른다고 한다. 2010년 프로에 데...
    Read More
  15. No Image

    신선한 충격 - 비욘 보그

    비욘 보그 동계 스포츠의 강국 스웨덴이 오늘날 테니스의 강국으로 우뚝 선 것은 불과 20여년 전이었다. 스웨덴은 현재 노만, 요한슨, 엔크비스트, 그리고 복식의 강자인 비요르크만과 신세대 기수인 빈시게라 등 호화군단을 자랑하고 있고 80년대엔 매츠 빌란...
    Read More
  16. No Image

    테니스의 신 - 지미 코너스

    지미 코너스 로드 레이버와 로이 에머슨이라는 두명의 걸출한 스타를 앞세워 60년대 남자 테니스를 좌지우지했던 호주의 테니스는 70년대에 이르러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된다. 물론 그들의 후배인 존 뉴컴(John Newcome)과 켄 로스웰(Ken Rosewall)이 명맥을 이...
    Read More
  17. No Image

    호주 테니스의 아버지 - 로드 레이버

    로드 레이버 매년 초 호주오픈이 열리는 맬버른 경기장. 그곳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여러 해동안 센터코트로 사용해 왔던 한 웅장한 경기장을 발견하게 된다. 그 경기장의 이름은 로드 레이버 아레나(Rod Laver Arena). 호주인들은 60년대 남자테니스계를 평정...
    Read More
  18. 원조 테니스 천재 - 르네 라코스테..사업가로 대성공

    르네 라코스테(위키피디 wikipedia) 아직 은퇴를 발표하고 있지는 않지만 90년대를 호령해왔던 샘프라스, 애거시의 시대가 서서히 가고 20세 초반 신세대 선수들로 세대교체가 이루어지고 있었던 시절 130년 테니스 역사상 가장 위대했던 테니스 선수가 누구였...
    Read More
  19. No Image

    아가씨의 부인 - 슈테피 그라프(여)

    슈테피 그라프(여) - 테니스의 전설! 1985년 윔블던 대회 남자 결승. 4세트만에 우승자가 확정되는 순간 독일 각지에서는 때아닌 도심의 경적소리가 울려퍼졌다. 1930년대에 프랑스오픈을 제패한 바 있는 폰 크람(G. von Cramm)과 헨켈(H. Henkel)이후 약 50년...
    Read More
  20. No Image

    테니스의 아버지 - 이반 랜들

    70년대 지미 코너스와 비욘 보그의 라이벌 관계가 무르익고 후반에는 존 매켄로가 뛰어들어 남자 테니스의 3인 경쟁체제가 확고해질 무렵, 당시 공산권 국가 체코슬로바키아에서 겁없이 도전장을 내민 이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이반 랜들이다. 랜들의 성과는 ...
    Read More
Board Pagination Prev 1 2 Next
/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