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도 함께 내다 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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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엄마 아빠는 그닥 금슬이 좋지는 않았지만 자식들 앞에서 거의 싸우질 않으셨다.
그래도 가끔은 아빠가 언성을 높이고 엄마도 높은 톤으로 맞대꾸를 할 때가 있었는데
엄마는 몰래몰래 헌책방 아저씨를 불러다가 수집벽이 있어 한없이 늘어나기만했던 아빠책을 뒤로 야금야금 팔아치우셨다.
돈으로도 얼마씩 받았지만
지폐는 아저씨가 더러운 장갑을 벗고 침 튀겨가며 여러번 센 끝에 고스란히 엄마 손으로 건네진 다음엔 우린 구경도 할 수 없었고
이빨에 잔뜩 끼지만 바닥이 드러날 때까지 부지런히 손이 가게하는 강냉이 한자루가 우리형제들 차지였다.
주전부리 귀하던 시절 달달한 강냉이도 감지덕지라 다른 심부름엔 시큰둥했지만
넝마아저씨 쩔렁거리는 가위소리를 듣고 엄마가 저 아저씨 좀 부르거라하면
냉큼 대문열고 뛰어나가 목청껏 큰소리로 불러들이곤 했다.
나중에 아빠는 찾는 책들이 없어진 걸 아시고 노발대발하셨는데
엄마는 집이란 공간은 한 뼘 늘어나지 않고 노상 그대로인데다 더는 책꽂이 들여놓을 빈 벽이 없는데도 당신은 끝없이 책을 몰아들인다고 대들고 ....

대부분의 스냅사진에선 등장인물들이 카메라를 의식해서 환하게 웃고 있다.
행복한 순간의 포착이기보다 가식적으로나마 행복해 보이려고 애쓰는 순간의 포착에 가깝다.
그래도 스냅사진들을 가지런히 철해놓은 가족앨범을 보고있노라면 이세상 모든 가정이 다 행복해보인다.
아빠가 돌아가시고 친정에 있던 앨범 속 빛바랜 가족사진을 보면서
내 유년이 사진 속 웃고있는 표정마냥 그렇게 행복하진 않았겠지만
그리 불행했던 것도 아니였나보다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클럽마다 사무실에 들어서면 기본사양으로 갖추고 있는 물건들이 있다.
우승트로피나 우승패가 뽀얗게 먼지 쌓인 채로 한구석에 진열되어있고
마치 시골집 대청마루 위나 안방 벽에 다닥다닥 붙어있는 사진액자마냥
오래된 단체사진 액자들이 벽 위에 쫄러리 연대순으로 걸려있는데
그 사진들을 올려다보다 얼굴은 몇 년 몇 십년 애띠어 보이지만
대단히 촌스런 헤어스타일과 복장을 한 몇몇 회원들을 알아보고 놀라움과 웃음을 터뜨리....
웃으면서 다정하게 어깨동무하고 서있거나 쪼그리고 앉아있는 사람 중에는
하찮은 일로 해묵은 원망과 감정의 앙금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도 있을테고
술자리나 코트에서 언성 높이고 싸웠던 사람도
몰래 좋아하다 손한번 잡아보지 못하고 떠나보내야했던 사람도 있을테고
사진만 같이 찍었지 서로에 대해 통성명한 적조차 없는 사람도....

어제 지인의 소개로 장롱에 묵히고 있던 카메라랑 렌즈들을 팔아보겠다고
묵직한 알루미늄 케이스가방을 들고 작은 카메라쌕들을 주렁주렁 어깨에 매고
이리저리 다녀봤지만 아직 임자를 못만났나보다.
IMF 때 남편 마고자금단추 떼고 돌반지, 약간의 내 소유 금붙이를 팔면서
(최근 세계경제가 휘청하면서 금값이 치솟는 걸 보니 아깝고 억울하단 생각이...)
내 손에 난데없는 현금이 쥐어지자 신이 나서
이것저것 집안에 있던 돈 되는 물건들을 내다 팔기 시작했다.
굳이 헐값으로 넘길 이유가 없는데도 피아노나 세척기, 에어컨 등은 자리 차지한다고
또 이전 몇년동안 쓰임이 없었거나 향후 몇년 지나도 별로 쓸 일이 없는 물건이라서....
등등의 이유로 팔려나갔다.

몇 년 전 앨보로 계속 고생을 하자 코치님으로부터 눈 딱감고 라켓 다 팔아버려서
레슨마저 쉬면서 한달만이라도 테니스중독을 철저히 해독해보라는 강권을 받아들여서
새 라켓은 물론이거니와 라켓 사고 나서도 정들고 아까와서 중고로 못 넘기고 가지고 있던 헌라켓 몇자루까지 죄다 팔아버렸다.
그래서 한 달 후 푼돈이 된 돈에다 거금을 얹어서 겨우 앨보에 좋다는 순한 라켓 두자루를 샀다.
싸게 사서 비싸게 팔아 다만 얼마라도 이문을 남기는 것이 통상적인 장사의 이치인데
나는 비싸게 사서 싸게 팔고 있으니....

가끔 동호인시합 나가는 나도 불필요한 물건 집안에 쌓이는 게 짜증나는데
일주일에도 몇 번씩 있는 시합 다 뛰는 사람들은 참가상품이 큰 골치꺼리겠다.
국화부상위권자를 친구로 둔 엄마한테 들은 얘긴데
집안이 입상상품으로 받은, 상자도 안 뜯은 물건들로 발디딜 틈이 없어
물류창고에 들어선 느낌이었다고.
참가상품 주는 대신 참가비를 낮추면 좋겠다는 게 대부분 시합 뛰는 엄마들의 공통된 의견일텐데 주최측의 상업적 이해와 참가상품에 연연하는 일부 엄마들의 가벼운 타산때문에 실현불가능하다고.

이젠 책읽기가 즐거운 일이기는 커녕 노안과 싸우며 몇 자 읽는 게 고역이고
노화와 죽음을 연상시키는 짜증나는 일이 되어버렸다.
단골이었던 책가게에 오랫만에 들려 이 책 저 책 겉핥기 하고 있는데 서점 주인이 반색하며 알은 채를 하기에
빈 손으로 나오기 뭣해 이젠 노안이 와서 책은 못 읽겠네요하는 변명을 했다.
나도 옛날 엄마가 했듯이 헌책가게 아저씨를 불러 먼지쌓인 책들을 팔아치워야 할텐데
요즘세상에 헌책가게가 있기나 할런지.....





[테니스는 어떻게 완성 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