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미련하셨군요! 이렇게 밖엔 드릴 말씀이 없네요!"


그동안 수술만은 피해보라고 충고해주셨던 분에게  사고치고 나서 사후적으로 나 어떡하면 좋으냐고 울상짓는 아이처럼  의사의 MRI판독결과와 수술이 불가피한 정황을 전화로 전했더니 긴 한숨과 함께 실려 왔던 답변이었다. 


다 잘 될 거라는 위로를 기대했다가 대신 미련하다는 꾸중을 들으니 자학과 열정을 혼돈하며 테니스에 빠져들었던 지난날이 그저 허망하게 느껴졌고 때늦은 후회가 밀려왔다.

며칠동안 수술에 대한 초조와 불안으로 전전긍긍했지만 막상 수술 전날 입원해 혼자 책도 읽고 누워 천장을 올려다보면서 이생각저생각하다보니  특별휴가라도 얻은 양 마음이 설레고 오랜만에 느긋하고 차분해지면서 기분이 좋아졌다. 


페더러의 부인이 한번의 임신과 진통 끝에 귀여운 쌍둥이를 얻었듯  어차피 전신마취하는 김에 그동안 골칫거리였던 어깨랑 무릎이라는 두마리 토끼를 한번에 잡자. 그리고 날아보는거야!

문득 나달처럼 타고나기는 오른손잡이었는데  오른손을 다쳐 왼손으로 테니스 배워 일찌감치 국화가 됐다는 젊은 엄마가 떠올라 전화해서 오른팔에 비해 왼팔근력은 50%밖에 안되기 때문에 근력을 다지는 것이 관건이란 얘길 듣고 수술 후에도 왼손으로 공치면 오히려 전화위복이 아닐까하는 장미빛 환상에 젖어 푹 잘잤다.

쇠고기도 부위별로 결이나 맛이 다르듯 우리인간의 신체부위도 더 아프고 덜 아프고가 분명 있었다.
아마 고문전문가들은 이를 잘 알고 있었을테지만. 영화에서 잔챙이 채무자에게 마피아가 돈 갚으라고 강요할 때 다리 부러뜨리겠다는 협박을 하는데 어깨 부러뜨리겠다면 좀 더 순순히 돈을 내놓지 않을까?

내가 유관순 역을 맡았다하더라도 일경이 수술한 어깨를 건드리면 뭐든 다 불어버릴 것같았다.  사흘쯤 지나니 참을만 해져서 문병 온 친구들에게  어깨 수술이 너무 아파 무릎은 공짜로 한 것같다는 농담을 할 여유도 생겼지만.

수술 후 하루 이틀 무통주사나 진통제를 충분히 투여해서 환자의 극심한 통증을 경감해주는 것이  환자의 인도주의적차원에서나 향후 빠른 회복에 도움이 된다는 것이 외국의학계의 최근 경향이라는데 우리나라에선 아직 참아야하느니라 식으로 인고가 환자의 유일한 미덕인데다...


진통제가 회복을 늦출 거라는 통념이 지배적이어서  동정심 눈꼽만큼도 없어보이는 간호사들에게  간이 다 상해도 좋으니 눈이 좀 멀어도 괜찮으니 제발 주사 좀 놔달라고 악을 쓰고 말았다.

아무튼 심신이 지치고 유약해 있는 동안 참 많은 회원들이 문병을 와주었고 간호사들은 진통제를 한없이 졸라대던 참을성없는 아줌마가 도대체 뭐하는 사람인지 의아해했다.

조폭마누라?ㅋㅋ

환자복이 잘 어울린다든지 언니가 없으니까 코트가 휑한 것같다느니 화장하고 있는 거야? 세수도 안했는데 화장은 무슨...어! 테니스 안치니까 아주 뽀얘지고 예뻐졌는데!

내가 테니스치기 전엔 밉상이 아니었거든. 빨리 나아도 또 전처럼 공 칠건 아니지? 절대 안그래, 나 이 수술 두번은 못하겠어! 뻔한 위로의 멘트와 상투적인 답이 오가기도 했지만 공 안치더라도 코트에 자주 나와서 라인도 긋고 점심상도 차리고 눈도장찍어놔야  나중에 언니 컴백하면우리가 공을 쳐주지! (그땐 언닌 지금보다 더 못칠거고 우린 지금보다 더 잘칠텐데) 


위문공연 와서 비수를 찍고 가는구나싶은 젊은 그러나 솔직한 엄마의 살벌한 발언이 마음에 걸렸는데 곰곰 생각해보면 이미 너도 알고 나도 아는 테니스판의 현실이었다. 촘촘한 인간관계의 그물망을 펼쳐놓거나 적어도 그안에 걸려 있어야지  절대 잊혀진 존재가 되어서는 안된다. 뭐 그런 불문율?

내 딴엔 테니스란 대의의 제물로 임당수에 빠졌지만  옛날얘기 각본대로 용궁으로 가게 되고 나중엔 연꽃 타고 환생하게 되는 테니스심청이쯤으로 알았다가 감독의 변덕으로 아예 스토리에서 갑자기 사라져버리는 조연이나 엑스트라가 되버린 것같았다.

정형외과병동은 그럭저럭 재미있는 곳이었다.

밤이면 여기저기에서 통증으로 신음소리 새어나오는 통에 잠들기 어렵지만 그런대로 익숙해지면 피차에 죽을 병은 아니란 여유도 있고 자연치유력이란 뒷배도 있어 갈수록 좋아지는 시간과의 싸움이고 팔 다친 사람이 다리 다친 사람을 돕고 도움을 받을 수도 있어 연대감이 형성되기도하고...


교통으로 분류되는 그룹은 합의볼 때까지 나이롱환자로 있으면서  낮에는 보험회사사람이 불쑥 나타날까봐 억지 수인노릇을 하지만  저녁땐 무료함을 달래러 떼지어 술집으로 노래방으로 사우나하러 사라졌다 아침이면 나타나고 눈 오고나서 기온이 떨어지자 언 길에 낙상한 할머니, 할아버지들도 심심치 않게 들어오셨고 문병 온 동년배는 늙었으면 이런 날에는 조심조심해서 X구멍 들썩 말고 집구석에 있어야 자식들한테 민폐안끼친다고 친구를 나무란다.

노년에 하체부실이나 골다공증으로 고생하지 않으려면 아무래도 한살이라도 젊을 때 운동해둬야하는데
테니스만큼 좋은 운동이 없는데... 오며가며 친해진 옆방 휠체어아저씨가 어쩌다 다쳤냐 물어서 테니스하다가요했더니 테니스도 골프도 한쪽만 써서 별로 좋은 운동이 아니라고...

언니가 얘기를 하도 왔다갔다해서(횡설수설이라서)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모르겠어!하고  짜증섞인 불평을 하고 돌아간 산악회 후배 얘기도 마음에 걸렸다.그동안 테니스 얘길 맘가는대로 내멋대로 쓰다보니 이젠 횡설수설하는게 철저히 몸에 밴 건 아닐까?

어쩌면 괜히 테니스에 시비를 걸어보는 건지도 모를 일이다.

운전한지 은혼식 정도는 되어가지만 아직도 난 며칠 안하다보면 다시 운전대잡을 엄두가 나질 않는다.  아직 오른손이 자유롭지 않으니 당연 유사시 안전사고를 염두에 둬서 운전은 당분간 쉬어야지만 글 올리는 것도 한 몇 주 쉬었더니 퇴원하고 며칠이 지나도 쓸 엄두가 나질 않았다.


지난번 잠수하겠단 울울한 글로 근심을 드렸으니 이젠 씩씩한 모습으로 많이 좋아졌다고 해야겠는데 언제나 그러했듯이 애초 의도대로 글이 써지지 않으니....





[테니스는 어떻게 완성 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