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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오백년

오년이란 세월은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다.
초등학교에 입학해서 졸업에 걸리는 시간이 6년이니 그보다 한 해 적은 시간이겠고,
대학 4년 다니는 기간보다는 한 해 긴 시간의 단위이다.
갓입학해 병아리같은 초1짜리가 중학입학을 앞둘 즈음이면 쑥자라 반어른이 되어 다소 징그럽다는 인상마져 드는 엄청난 변화를 보인다.
대학4년의 정신적 성장과 인간관계의 확장은
이 시기가 단지 직업적 훈련의 장에 그치지않고
중년의 단조로운 일상과 노년의 외로움 또는 서운함을 견디게 해줄(과연?)  
정신적 토대를 제공해주는 의미있는 기간이었다.
그런데 테니스 판에서는(테니스 타고난 사람이 아닌 그저 평범한 아줌마 기준) 오년은 공을 쳐야 그것도 열심히 쳐야 공 왔다갔다하는 길이 어렴풋이 보이게 된다는 고작 걸음마단계거나 눈트임의 시간이다.
마흔이 넘어서 시작했기 때문에 30대 중반이 커트라인이라는 공 잘치는 클럽엔
갈 엄두도 못냈고 동네테니스에 자족하려했다.
나는 테니스에 오래도록 몸담고 계셨던 분들 보기에 시작한지 얼마 안된 애송이일테고 결국 아웃사이더로 주변적으로 떠돌 것이며 내 말은 변방의 희미한 외침이었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릴 것이다.
나는 테니스에 아무런 영향도 못 미치는 미미한 존재이나
테니스는 내게 엄청난 변화를 가져다 주었다.
막 테니스를 시작했을 때 7-8년 정도 과천에 살고 있었지만 잠시 시민단체활동하면서 알고 지냈던 지인 몇 분과 학부형으로 만난 관계거나 그저 인사하고 지내는 이웃 몇사람이 아는 사람의 전부였는데
테니스치면서부터 길에서 마주치는 라켓가방 맨 생면부지의 사람이나 코트에 발을 들여놓는 처음보는 사람에게조차 스스럼없이 말을 걸어 테니스 신상조사에 들어가는 이상한 버릇이 생겼고,
거기다 공을 한번이라도 같이 친 적이 있는 사람한테는 오랜 지기마냥 친한 체 알은 체를 하다보니
마당발이란 말이 욕인지 칭찬인지 아직도 잘 모르겠지만
시의원에 출마할꺼냐는 비아냥을 노상 듣고있고
(나만큼 정치혐오증을 갖고 있는 사람 나와보라고하지!)
과천에서 테니스치는 사람치고 날 모르면 간첩이라는 낭설이 떠돌 정도로
구력에 비해 아는 사람이 갑자기 많아져 버렸다.
얼마전 전철역 계단에서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아저씨와 맞닥뜨렸는데
황급히 목례를 하고나서 "어디서 공 치시는 분이셨더라?"하고 물었더니
이 아저씨가 말귀를 못알아들으며 재차 내가 뭐라고 하는 지를 되물었다.
"저 누구누구 아빤데요!"
아이 졸업식에서 사진을 찍어주셨던 같은 반 아이 아빠였으니 그 사람 어안이 벙벙해하는 것도 당연한 반응이고,
현재진행중인 인간관계의 거의 전부가 테니스와 관련이 있는 나로선 본듯한 아저씨를 보고 바로 테니스동호인으로 지목하는 것도 지극히 당연한 반응을 보인 셈이다.
그런데 이 테니스에 관한 글을 올리면서부터
과천 우물 안 개구리였던 내가 마치 전국구라도 된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일이 잦아졌다.
먼데 계신 분들의 격려나 공감한다는 답글을 접하면 순간 뿌듯하고 우쭐해지기까지 해서 시간낭비같아 그만 써야지했던 마음 한 켠이 무너져 버리곤 했다.
물론 이런 들뜬 마음을 스스로 경계하고 단단히 다잡으려는 노력과 반성을 바로 하면서.
그런데 먼 곳에선 호의적인 지인이 생겨나는데 반해
오히려 나랑 공치는 사람들, 자주보고 오래 잘지내왔던 사람들 사이에선
내 글로 해서 자신이 도마 위에 올라 난도질을 당했다고 불쾌해한다든지
나와 얽히는게 어떤 식으로 든 나중에 글 꼬투리가 되어 인터넷에 오를까봐 불안하다는 식의 반응을 보이니 참으로 난감하다.
좋은 얘기만 써라,
칭찬도 싫으니 자기에 대해선 일체 언급을 말아달라
왜 사서 고생이고 화근을 만드느냐 이 참에 글쓰는 걸 그만둬라
테니스공공매체(?)에서 손 떼고 블로그로 바꿔봐라
제발 너만 잘났고 너만 착한 척 하는 위선부리지마라
너의 추잡함도 인터넷에 올리겠다는 협박성 멘트에서부터
남들 신경쓸 것 없다 용기를 잃지말고 소신대로 써라 단 내 얘긴 빼고...
등등
주문도 가지가지고 요즘은 주위 사람들이 다 검열관처럼 보인다.
날 그토록 싫어한다면서 내 글은 왜 꼬박꼬박 읽어가지고 간섭들을 하는지!
나에 대한 비난이나 옹호 뭐 그런 시시비비의 글도 오르고.....
테니스에 관한 내 주관적 생각이 옳은지 그른지를 공론화해보려는 과정에서
자신의 사생활이 침해되었다고 느끼거나
나로 인해서 사실이 과장되거나 악의적으로 왜곡되었다고 격분하시는 분에게 심히 죄송스런 마음이 들어
자기얘기 절대불가의사를 밝힌 몇몇의 명단을 만들어 모니터에 붙여놓고
이들과 얽힌 얘기는 쏙 빼고 하하호호한 얘기만 써보도록 할까도 생각해봤다.
하지만 이젠 버릇이 되고 습관이 되어버린 에세이 쓰는 일을 내가 테니스를 계속 치는 한 관둘 수는 없을 것 같고 이 나이에 눈치나 보고 사는 건 비굴인 것 같아 화합을 해치지않는 범위의 얘기는 계속 쓸 생각이다.
한 클럽에서 공치면서 나와 눈 마주침도 피하려는 사람이 생겨나도 나로선 할 수 없는 일.





[테니스는 어떻게 완성 되는가?]




  • 全 炫 仲 05.02 06:42
    사람은 가도 글은 남는다...

    개인적으로 혜랑님의 글이 우향우 혹은 좌향좌한것은 없다고 봅니다.

    원래 인기가 높아지면 고달퍼 진답니다..ㅎㅎ..힘내시길....
  • 바람도리 05.02 10:29
    아침에 pc 켜면, 전테교에 들르고 혜랑님 글 읽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주변 분들은 아무래도 본인 얘기 같아서 신경 쓰일 수도 있겠지만,
    제 삼자들이 읽을 때는 자기 코트의 누군가를 연상하면서 읽게 됩니다.
    그만큼 혜랑님 체험담이 개인적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보편적이라는 뜻이겠지요.
    인터넷의 바다에서 공감하게되는 글꼭지를 만난다는 것은 매력적인 일입니다.
    언제고 off 에서 한번 뵈었으면 합니다. 즐테하세요.
  • 마이클 킴 05.03 09:58
    저도 혜랑님의 글에 공감합니다.
    닉네임이나 가명을 쓰고 사시는곳도 모르게 한다면 조금이라도 고민을 털어낼수 있었을텐데......
    몇년전에 길거리를 걸어가는데 라켓들고 스윙연습하면서 갔습니다.
    그런데 교차로에서 신호대기중었는데 차의 창문이 열리더니
    "와!! 마이클이다. 마이클님~~~ 안녕하세요~~여전히 미쳐있으시네요"라고
    여자분들이 외치길래 놀래가지고 쳐다봤더니 전혀 모르는분들이었지요.
    저도 어떨결에 손을 흔들어주긴 했지만 식은땀을 흘려야 했습니다.
    왠지 인기연예인이 된듯한...ㅎㅎ

    얼마전에는 민방위 훈련을 받는데 강의를 듣고 있었죠. 쉬는시간에 피곤해서 잠깐 졸았는데
    "마이클!! 알러뷰~~ 와~~~ 마이클...마이클...."하면서 강의실이 난리가 난겁니다.
    놀래가지고 눈떴더니 강의실 TV에서 마이클 잭슨 공연을 보여주고 있더군요.
    강사의 말인즉, 졸고 있는 사람들이 많아서 잠을 깨라고 시끌버쩍한 마이클 잭슨 노래를 틀어주는거랍니다. ㅎㅎ

    혜랑님의 글은 저역시 빼놓지 않고 읽습니다.
    테니스 에세이로서는 지금까지 혜랑님의 글보다 더 맛깔스럽고 재미있고 즐거운 글을 읽은적이 없습니다.
    저도 혜랑님의 글팬이니 주위의 반응은 그저 인기인이라면 겪어야할 일즘으로 여기시고 자주 글올려주시면
    좋겠습니다.

    오래전에 코트에서 만난 한분중에 전테교 이야기가 나왔고 혜랑님에 대해 궁금해하셨는데
    그분은 왠지 혜랑님께서 나이도 젊으시고(삼십대 후반정도),
    출중한 미모를 겸비한분처럼 느껴진다고 말씀하시더군요.

    반면 마이클의 글을 읽어보면 사십대가 넘은 사람처럼 보인다고 해서 충격을 받은적이 있답니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