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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척동자한테도 배울 건 배워야

요즘 지하철을 자주 타고 다니다보니
집안에 단돈 천원 한장에 모신 물건들이 많아졌다.
쇼핑도 귀찮아하는 타고난 귀차니스트한테
앉은 자리에서 지갑 열어 천원 한장 꺼내주면(이 부분이 조금 귀찮기는 하지만)
냉큼 그 자리에서 신기하고 요긴한데다 저렴하기까지한 물건을 건네 준다.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맨날 거기서 거기인 슈퍼 생필품 사기보다 재밌고
택배 기다릴 필요없어 홈쇼핑보다 상큼하고
발품 팔아야하는 재래시장 장보기보다 편리하고
바가지 쓴 것같아 뒷맛이 씁쓸한 백화점 나들이보다 달콤한 거래다.

그런데 추석 즈음해서 샀던 생밤 깎는 가위는 거금 삼천원이나 주었는데,
날밤은 잘도 새면서 날밤 살 시간은 없는 바쁜 일정을 소화해내다보니,
차일피일 미루다 마침내 비오는 어제 밤 한 되를 사서
드디어 생률깎이 시범을 보일 수 있었다.
지렛대 원리를 이용한 이놈의 밤깎는 가위의 포장비닐을 벗기자
좀 불량스러워 보이는 외관이 어째 석연치 않았다.
지하철 아저씨는 쓱싹쓱싹 잘도 깎더구만 날들끼리 서로 잘 맞물리지도 않으니...
그래도 익숙해지면 좀 낫게 깎이겠지하고
테니스 대하듯 인내와 열심으로 밤과 가위와 씨름을 했다.
울퉁불퉁 못나게 깎였지만 그래도 떫은 속껍질 다 벗겨서 입에 넣으려는 감격의 순간
어느틈에 남편이 낚아 채갔다.
억울하다. 어떻게 깎은건데....
이건 마치 잠시 딴생각하며 네트 앞에 서있다
상대의 기습적인 패싱샷이 내 귀를 스치고 지난 듯이 아득했고,
남편의 밤 낚아채는 동작이 포칭과 아주 흡사하다는데로 생각이 미쳤다.

다행한 일은 내게도 오도독 오도독 생밤 몇 알 씹어 볼 기회가 있었고---
남편이 채뜨려가기 전에 속껍데기 조금 남아있는 채로 그냥 내 입으로 쏙 가져가는
소위 "반박자 빠르게 선제공격해서 상대의 리듬을 빼앗는" 기막힌 생존전략 덕분이다.
더욱 다행한 일은 불량가위로 장시간 위험하고 귀찮은 작업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열손가락 온전해 오늘도 테니스를 칠 수 있었다는 점이다.

그런데 조금 전 남은 밤 몇 알을 과일깎는 보통 칼로 깎아보았더니
웬걸 너무 잘 깎였다.
서툰 목수 연장만 나무란다더니!
매일쓰던 과도한테 배운 점(내 스스로 깨달은 점?)
난 그동안 공 못친다고 공 빨리 안는다고 애꿎게 라켓만 드립다 자주 바꾼 사람은 아니었는지?
하는 반성을 해본다.





[테니스는 어떻게 완성 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