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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테니스기간중에 WTA에선 과거 명승부, 유명 선수 스토리에 이어 WTA 심판 캐더 누니를 인터뷰해 그의 스토리를 최근 소개했다. 

 

누니는 프랑스테니스협회의 교육과정을 이수하고 프랑스오픈 심판으로 뽑혀 일을 시작, 전세계 몇 안되는 골드 배지 테니스 심판으로 활약하고 있다. 

 

캐더 누니는 프랑스오픈과 코리아오픈 등에서 여자결승전 체어 엄파이어를 한 테니스 심판으로 우리나라 테니스인들 사이에서 얼굴이 많이 알려져 있다.    편집자

 

캐더 누니가 테니스에 눈을 뜬 것은 아주 우연한 기회였다.

 

1983년 프랑스의 야닉 노아가 프랑스오픈 우승을 할 때 프랑스 남부 페르피냥에 사는 알제리 이민자의 아들 누니는 7살이었다. 누니의 4살 많은 형 밀루와 농구 게임을 했다.

 

누니는 “6살 때부터 농구를 했는데 테니스를 접할 기회가 없었다.  노아가 프랑스오픈에서 우승 한 후 형이 먼저 테니스를 하고 싶어했다. 그는 벽에 공을 치기 위해 나무 조각으로 라켓을 만들었다”라고 회상했다.

 

테니스는 프랑스에서 값 비싼 스포츠였고 그 당시에 가난한 아프리카 이민자의 누니 형제에게는 테니스레슨을 받을 수도 없고 테니스장을 사용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형이 아이디어를 내 테니스클럽에서 청소도 하고 클레이코트 흙고르기도 하면서 테니스장을 써보려고 무진 애썼다.

 

누니는 어느날 자신이 허드렛일을 하는 클럽에서 지역 테니스대회가 열렸는데 거기서 대회 진행을 하는 심판이 눈에 들어왔다.  테니스가 선수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선수가 아니더라도 테니스장에 일을 할 수 있는  길이 보였다. 

 

누니는 테니스장에서 일하며 번 돈을 긁어 모아 테니스 레슨을 받았다. 테니스 심판이 되려면 테니스를 알아야 한다는 생각이 앞섰기 때문이다. 테니스선수가 아닌 심판이라 하더라도 서브는 어떻게 넣고 스트로크는 어떻게 해야 하는 지를 알아야 심판도 할 수 있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레슨을 받고 테니스 맛을 안 누니는 지역 성인테니스대회 심판으로 데뷔했다. 그때 나이 12살이었다.

 

누니가 12살 나이에 처음 심판대에 앉아 게임을 보며 아웃이라고 말하면 사람들은 엄청 좋아했다. 경기를 마치고나면 어른들로부터 칭찬을 들었고 그 칭찬에 기분이 좋아 점점 더 심판의 직업에 매력을 느꼈다.

 

누니는 심판이 되려고 전문적인 길을 찾아 나섰다. 클럽에 물어보니 코치가 프랑스테니스협회의 심판 양성 과정을 소개했다.

 

“프랑스테니스협회는 테니스 심판이 되기 위한 좋은 교육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었다. 당시 프랑스에서는 테니스대회도 많아져 심판이 많이 필요한 시기였다. 협회는 심판 양성에 투자를 하고 좋은 교육프로그램을 운영했다.”

 

착실하게 프랑스협회의 심판과정을 이수한 누니는 국가의 관심을 받으며 성장했다.


1991년 여름에 누니를 포함해 전국의 젊은 심판들이 롤랑가로스에서 열린 주니어대회 공식 캠프에 초대를 받았다.

 

이 캠프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둔 누니는 1년이 채 지나지않은 16살 나이에 프랑스오픈에서 라인 심판으로 데뷔하게 되었다.

 

누니는 “당시 테니스를 본 것은 동네 시합에서 본것이 전부였기에 프랑스오픈 대회장에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고 말했다.

 

당시에 누니는 TV에서만 보던 곳에 자신이 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고 매일 아침 롤랑가로스 근처 숙소에서 눈을 뜨면 '내가 여기서 뭐하는거야?' 하며 행복해 했다. 그해에 누니는 심판 가운데 최연소 그랜드슬램 참가자로 기록됐다.

 

누니는 “경기장에 최고의 선수들로 가득한 것을 보는 것은 꿈만 같았다. 내 나이에 이미 프랑스오픈에 참여한 것이 큰 성과였고 모든 것을 다 이룬 착각에 빠졌다”고 당시 감동을 잊지 못했다.

 

늘 5월 말에 열리는 프랑스오픈은 고등학교 학기중에 열렸다. 누니의 선생님은 ‘공부냐 테니스냐 둘중에 하나을 택해야 한다’고 하길래 누니는 테니스를 택했다.

 

누니는 대학에서 사회학을 공부한 후 방학때 고향의 바에서 일하면서 테니스대회 심판 수입으로 살아나갔다.

 

1998년 프랑스 푸아티에의 ITF 레벨2 단계에서 화이트 배지를 받은 누니는 이집트 카이로에서 레벨 3를 통과해 2002년에 브론즈 배지를 달았다. 2004년에 실버 배지, 2007년에 골드 배지를 달고 2008년부터 WTA 심판 팀의 일원으로 합류했다. 남자테니스대회 심판의 길과 여자 테니스대회 심판의 길 중에서 여자쪽을 택했다.

 

그는 골드배지를 달고 프랑스오픈 여자단식 결승전 네차례((2007 년, 2009년, 2013년 및 2014년), 윔블던 여자 결승전 한번(2018년) 심판으로 활약했다.

 

2000년 시드니, 2008년 베이징, 2016년 리우올림픽에도 참가했다. WTA 파이널과 WTA 프리미어 이벤트에서 수많은 결승을 주재했다.

 

누니에게는 심판으로서 좋은 추억도 있었지만 초년병시절 악몽같은 날도 있었다.

 

"미국을 처음 여행했을 때 몬트리올과 보스턴에서 ATP 대회 라인 심판으로 선정되었다. 하루 전에 비행기를 예약했고 교통편과 호텔을 알아내는 데 쉽지 않았다. 보스턴에서 여권을 잃어 버렸다. 비가 아주 많이 내리고 있었는데 누군가 벤치에서 여권을 찾아줘 다행스러웠다“고 말했다.

 

2010년에 누니는 아내 멜라니 코네사를 만나 현재 오스카와 로잘리 두 자녀를 두었다.

누니는 "아내가 처음부터 많은 여행을 하고 다니는 것을 알고도 청혼을 받아줬다"며 자신은 행운아에 속한다고 자랑스러워했다.

 

20년 동안 전세계 주요 도시를 다니며 여행을 하는 것이 그리 쉽지 않고 가족과 오랫동안 떨어져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누니는 고통을 겪더라도 테니스 심판의 일 만큼은 꼭 하고 싶어했다.

 

누니는 “나는 테니스 심판을 하고 싶었고 최고의 체어 엄파이어가 되고 싶었다. 내게 이 일은 내 인생길에서 직업 그 이상이다. 이것이 나에게 줄 수 있는 모든 기회를 계속 누리고 싶다. 이 일의 매력은 새로운 장소를 발견하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새로운 식당을 찾는 것이다. 

 

여러 토너먼트를 다니며 좋은 친구를 사귀었다.  16살 때, 나는 무언가를 하기 원했지만 테니스 심판의 일이 내가하고 싶은 일이라고 말하고싶지 않았다.

 

나는 길을 정해 최선을 다하고 내가 도달할 수 있는 수준에 도달하고 싶었다. 매년 많은 것을 개선하려고 노력하며 한 걸음 더 한 걸음 더 나아가려고 했을 뿐이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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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테니스피플 박원식 기자

사진=테니스피플 황서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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