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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 여행 - 타자라 열차를 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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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일-여행 14~16일째 

여행은 지도가 정확한지 대조하러 가는 게 아니다. 곳곳에 숨어있는 비밀스러운 보물처럼 인생의 신비가 베일을 벗고 슬그머니 다가올 때도 있다. 어느 낯선 골목에서 문득 들려오는 낮은 음악처럼 예상치 못한 기쁨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30일  아프리카에서 머무는 동안 가장 오래 머물렀던 곳은 탄자니아다. 세링게티의 사파리와 응고롱고로 그리고 킬리만자로를 거쳐 인도양의 흑진주로 불리는 아름다운 산호섬인 잔지바르에서 달콤한 휴식을 취했다.
모처럼 여유 있는 시간을 보내고 드디어 빅토리아 호수가 있는 잠비아로 떠나기 위해 짐을 꾸렸다.

 

매번 노마드처럼 짐을 풀고 꾸리는데 선수가 되었다.

다르에스살람에 있는 타자라 역은 깔끔했다. 표가 없는 일반인의 출입이 완전히 통제되는지 입구에서 철저히 검문을 하고 있었다. 타자라 열차는 탄자니아의 다르에스살람에서 잠비아의 카피리음포시까지 연결하는 길이 1860km의 국제열차다. 


중국이 5억 달러를 투자해서 만든 이 열차 이름도 탄자니아-잠비아 철도(Tanzania-Zambia Railway)를 줄여 타자라라 부른다. 

보통 45시간 이상 걸리는 이 열차는 화요일과 금요일 두 차례만 운행을 하기 때문에 그 요일에 맞춰 여행  케줄을 짜야만 한다. 예약은 필수다. 한 칸에 침대 네 개가 들어있는 퍼스트 클래스의 요금은  우리나라 돈으로 7만 원 정도 하는데 그곳에서 우리들은 2박3일을 보내야 했다.

기차 출발시간이 다 되어가자 큰 짐을 머리에 이고 손에 든 수많은 현지인들이 뛰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3등 칸은 미리 자리가 정해지지 않아 먼저 앉는 사람이 임자인 탓에  역은 아수라장이었다.

끝없는 평원을 가로지르는 이 열차를 왜 사파리 열차라고 하는지 알 수가 있었다. 평화롭게 노는 동물들과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보는 재미가 쏠쏠하여 일행들은 일주일이라도 기차 여행을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소리를 했다.

시원한 녹색 바람을 맞으며 정말 모처럼 안정된 마음으로 책을 읽기 시작했다. 말콤글래드웰이 쓴 아웃라이어는 일반적인 통념을 과감하게 뒤집는 내용들이었다. 성공한 사람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숨겨진 이점과 특별한 기회요소의 혜택을  누려왔다는 예리한 분석에 푹 빠져들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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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은 60대 언니들과 함께 4인실 일등칸을 쓰게 되었는데 인연이란 정말 묘하다 언니들은 여행광에 세련된 면면이 정말 나도 십 년 후 그렇게 아름답게 다듬어지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들게 했다.

기차가 마을을 지날 때마다 어린아이들이 고사리 같은 손을 흔들며 반겼다. 벽촌에서 자랐던 나의 향수를 자극하는 대목이었다. 정차할 때마다 아이들이 몰려와 뭔가를 달라고 열차에 매달리자 일행들은 사탕을 나눠주고 머리에 이고 온 과일들을 사 먹었다.

타자라 열차 내는 고양이 세수할 수 있을 정도의 물이 나왔고 식당 칸에서 음식을 주문하면 배달까지 두 시간 정도는 기다려야 했다.


그곳에서 처음으로 우갈리를 맛보았다. 아프리카 사람들에게 우갈리는 우리의 밥에 해당한다. 흰 옥수수가루에 뜨거운 물을 부어 나무 주걱으로 오래 잘 저으면서 익히면 된다. 

옥수수가루라고 하면 약간 노르스름한 옥수수 색깔을 떠올리기 쉽지만  우갈리의 재료가 되는 옥수수는 일단 말린 뒤에 껍질을 많이 벗기고 빻기 때문에 색깔이 희다. 우리 흰쌀과 현미를 생각하면 같다.

 

몸에 좋은 현미속에는 쌀 껍질층의 다양한 영양소가 있듯 옥수수의 껍질층에는 섬유소와 노란색 껍질에는 폐에 좋은 성분들 모두 다 벗겨냈다고 하면 맞다.

또한 우갈리는 반드시 뜨거워야 한다.  우갈리는 만든 즉시 먹든가 아니면 보온통에 넣어 식는 것을 막는다. 
그래서 탄자니아에는 아무리 서민층이라 하더라도 한 집에 보온통 두세 개쯤은 있다고 한다.

우갈리 그 자체는 아무 맛도 없고 푸석푸석해서 반찬이 필요하다.  포크로 한번 떠먹었는데 푸석푸석한 것이 씹는 느낌도 좋지 않고 아무 맛이 없다. 

우선 우갈리 덩어리에서 한 입에 먹을 만큼 떼어낸다. 주먹을 폈다 오므렸다하며 손바닥 안에서 우갈리를 주무르면 푸석했던 찰기가 생겨 떡처럼 되었다.  설탕이 들어가지 않은 백설기의 맛이다. 이 떡처럼 된 것을 같이 나온 고기스프에 찍어먹는데  아무튼 떡을 소스장에 찍어먹는 맛이다. 

 

일반 가정에서는 형편에 따라 삶은 콩이나 삶은 멸치, 야채를 푹 익힌 음치차라는 국물에 적셔서 건더기와 함께 먹는다.

우갈리와 라이스중 주로 치킨과 피쉬 그리고 비프 등을 곁들이는 것을 시켜 먹었지만 혹시나가 역시나였다. 입맛을 조절할 수가 없었다. 생선 사이에 든 뼈까지 모두 다 발라먹었다. 유일하게 맛있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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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자니아 국경을 기차 안에서 넘었다.
 

환전상들이 열차 안을 돌며 흥정을 하는 모습을 빈번하게 볼 수있다. 종착역인 뉴 카피리 음포시에는 환전소가 없기 때문에 환전은 주로 기차 안에서 이루어지는데 이 열차 안의 환율이 가장 유리하다고 알려져 있고, 사실 그랬다. 
 

사실 환율을 따져볼 여유가 없다. 일단 국경을 넘으면 더 이상 탄자니아 돈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 

조금 전까지 탄자니아 실링으로 마셨던 킬리만자로 맥주도 살 수 없다. 국경을 넘는 순간 탄자니아 실링으로는 그 어느 것도 살 수 없다는 것이 문제다. 달러당 1300실링이던 것이 잠비아는 달러당 4000콰차로 엄청난 화폐 인플레이 현상을 느꼈다

맥주 값도 갑자기 턱없이 비싸졌고 과일과 밥값도 똑같은 기차인데도 국경을 넘어서자 3인분에 9천 실링 하던 것이  5만 콰차를 내었으니 3천원에서 5천원으로 오른 셈이다.

잠비아 크와차(Zambian kwacha /ZMK). 

 

크와차 계산법은 0을 하나 빼고 3을 곱하면 된다. 1000K는 우리 돈으로 300원에 가격이다

기차 안에서 비자 비를 50달러씩을 준비하라더니 비자신청을 받던  관리인들이 영수증이 떨어졌다며 내리는 바람에 일부는 그냥 건너야 했다. 열차 안은 늘 분주했고 환전하라는 사람들이 수시로 들락거렸다.

이 열차에서 맞는 아침은 정말 상쾌하다. 유독 열차에서 보는 해돋이가 더 아름답게 느껴지는  특별한 이유를 설명 할 수 없지만 초록의 들판에 선명하게 떠오르는 아침 해를 잊을 수가 없다. 희망을 잉태한 원시의 모습 그대로 비쳤다.

아프리카 여행 중 이 타자라 열차는 한번쯤 꼭 타 보라고 권하고 싶다. 다양한 아프리카의 풍경을 한꺼번에 볼 수 있을 뿐만이 아니라  삼등칸에 탄 현지인들의  치열한 삶의 현장을 볼 수 있는 기회다 

나는 하룻밤 내내 생수 한통을 다 먹은 침대에서 잔 덕분으로 여행을 마칠 때까지 심하게 콜록거리며 다녀야 했다. 그러나 색다른 묘미를 느끼게 했던 잊지 못할 기차 사파리 여행이다. 틈틈이 읽었던 '처음 읽는 아프리카의 역사'와 아이팟에 담아간 영화 '만델라'를 보면서 머물고 있는 아프리카의 모습이 서서히 안개가 걷히는 듯 했다.

삶,
여행의 참맛
진정한 여유
그 녹지대
국립공원같은곳을 지나면서의 생각들
초가부터 슬래트 지붕
음베야의 도심들

타자라는 다르에스살람을 출발해 말라위와 국경지역인 음베야(Mbeya) 등  147개의 역을 경유하여 잠비아의 뉴 카피리 음포시(New Kapiri Mposhi)에  이르는 1860km에 달하는 거리를 연결한다. 

 

책에는 30시간 걸린다고 했지만 보통 40시간 정도 걸린다고 한다.  우리는 43시간 걸렸다.  사실 우리의 KTX로 달린다면 11시간이면 도착할 거리다. 버스로 가면 24시간 정도면 된다고 한다. 

하지만 기차노선은 도중에 국립공원을 지나는 덕분에 창밖으로  기차 사파리를 즐길 수 있다고   타자라를 타기로 했다.  실제로 거의 꼬박 이틀을 기차 안에서 먹고 자고 뒹굴게 된다.

*
독서도 했지만 고스톱도 쳤다. 나이드신 언니들이랑 고스톱 치는 맛이 삼삼했다.놀러온 정사장님은 그날밤 완전히 주머니를 털어야 했다. 초은언니가 실력을 제대로 발휘했다.


여행기간중 우리는 총 세번에 걸쳐 고스톱을 쳤는데 나는 늘 중간이었다.


잃은사람은  딱, 한사람이다. 누군지는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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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기비치에서의 이틀





글쓴이 송선순     http://www.parangse.kr/

잔지바르의 첫 밤.저녁내내 폭우가 쏟아졌다.
양철로 지붕을 만든 탓인지 맨 꼭대기기층인 우리 침실은
가슴으로 우박이 떨어지는 듯 했다.
습한 기온과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몹시 힘든 밤을 보내다
호텔서 제공하는 아침식사를 마치고 바닷가로 이동했다.

이 아프리카의 아침 식사는 아주 간단하다.
빵 두 쪽에 주스한잔 그리고 계란하나에 파인에플 한 조각이면
끝이니 저절로 다이어트 될 판이다.

스톤타운옆을 지나오다 과일시장에 나오는
두리안의 고소한 냄새의 유혹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토마토와 오이등 우리나라 과일들과 비슷하지만
열대과일들이 산처럼 쌓여진 시장에서 이것저것 고르는 재미가 쏠쏠했다.

가장 잘 익은 두리안을 사서 나눠먹을 생각을 하니
미리부터 입안에 침이 고였다.

잔지바르의 해변은 동, 서, 남, 북으로 나뉘는데 대표적인 비치는
북부에 있는  능기(Nungwi Beach)로 유럽인들의 한가로운
해변휴양지 같은 느낌을 주며  
동부에 있는 파제(Paje Beach)비치는 한적하고 일출을 볼 수 있어 좋다

우리 일행은 두 대의 봉고차에 나눠 타고 한 시간여 달려 썬셋 크루즈로 유명한
능기비치의 사피나 호텔에 숙소를 잡았다. 이곳에서 이틀을 보내게 될 예정이다.
전통적인 가옥으로 만든 단층짜리 숙소가 열대나무들과 어우러져
휴양지다운 맛을 풍기며 몹시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잔지바르보다는 목욕물도 잘 나오고 시설이 좋아 들뜬 것도 잠시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밤 일곱 시까지는 기다려야만
자가 발전기를 돌려 전원을 켤 수 있다는 말에
모두들 그 시간이 오기만을 기다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짐을 숙소에 던져 놓고 우르르 달려간 능기비치는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답고 고운 밀가루처럼 하얀 모래사장이 이어져 있었다.





먼저 도착한 유럽인들이 진을 치고 있는 해변 곳곳에는
현지인들이 만든 목걸이와 그림들을 전시해서 팔고
가끔 마사이족 복장으로 춤을 추는 공연도 벌어지고 있었다.

물속으로 깊이 들어간 일행이 성게에 찔려 피가 나자 현지인의 급 처방은
휘발유를 상처부위에 먼저 뿌린 다음 파파야 즙을 짜서 그곳에
발라 주었고 거짓말처럼 씻은 듯이 통증이 사라지는 효과를 보게 되었다.

일몰이 유명한 만큼 오후 네 시에 출발한다는 썬셋크루즈를 기다리다
갑자기 엄청 심한 바람과 함께 쏟아 붓는 스콜성 비로
모든 일정은 취소 될 수밖에 없었다.

아프리카에서 내리는 비는 언제나 강하게 그러나 매번 짧게 내린다.
비가 그 친후의 바다는 더욱 더 고요하게 밤을 맞고 있었다.

해변에 지어진 고급스런 호텔들이 즐비하지만
우리처럼 평범한 배낭 여행객들이 머물기엔 너무나 고액이다.
하룻밤 2천이나 3천 실링정도 하고
우리들이 머문 사피나 호텔은 방 한 칸에 우리 돈 7만 원 정도 하는 값이었다.

밤 일곱 시에 전기가 들어와 열두시면 호텔 전체가 전원이 꺼지기 때문에
새벽에 일어나 책을 보거나 하는 일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아무래도 전력난이 심각해 자체 발전기를 가동시키고
또한 전력낭비를 막기 위해 최선의 방책이라 해도  몹시 불편한 것은 사실이었다.

21세기를 살면서  손전등에 의지해야 한다는 사실이 서글펐으나
우리 숙소 옆의 고급 호텔은 밤 내내 휘황한 불빛이 비치고 있었다.
노트북 충전을 위해 호텔입구의 경비원에게 여러 번 헬프미 플리이즈를
했지만 번번이 거절당해 더욱 더 애타게 만들었던 곳이다.

이곳 잔지바르는 인도의 영향을 받아 호텔마다 인도식 헤나를 많이 권하고
마사지도 권하지만 질적으로 너무나 형편없다는 사실은 받아본 사람들이 모두 다 고개를 저었다.

밤이면 현지인이 운영하는 술집에 가서 보면 젊은이들은 주로
당구를 즐기고 작은 티브이 앞에 모여 축구경기를 보면서 열광하는 모습이
대단한 축구광들인 듯하다.

능기비치 옆 현지인 마을은 수영복을 입은 사람은 출입금지라는 표시가 있어
상당히 보수적인 부분도 있고 사진을 찍기 위해 카메라를 대면
여전히 심한 거부반응을 보낸다.

능기비치에서 만난 유럽 사람들은 에메랄드빛 바다에 떠 있는
다우’(dhow·바람의 힘으로만 움직이는 배)와 해풍에 몸을 맡기며
인생의 여유를 즐기는 사람들이었다.

아무리 전기불이 들어오지 않아 불편하다 해도
22세기에 다시 찾고 싶을 만큼
평화롭고 하얀 밀가루처럼 고운 모래의 감촉을 잊을 수가 없는  낭만적인 곳이다.









8일째 인도양의 흑진주 잔지바르를 향하다.





글쓴이 송선순      http://www.parangse.kr/

집 떠나온지 벌써 일주일이 지났다.

고온 다습한 다르에스살람. 다르에스 살람은 탄자니아의 수도로
까마귀 떼들이 떼 지어 노래하는 통에 새벽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해변, 인도양에 근접해 있음을 알리는 첫 신호였다.

아프리카에 도착하는 순간부터 여직 해발 2천고지 이상의
고지대에 머물다 처음으로 평지에 머문 탓인지 몹시 덥고 습한 기온이다

잔지바르로 떠나기 전 아침 일찍 다르에스살람의 시내를 돌아보기로 하고 길을 나섰다.
페리 선착장을 거쳐 피쉬마켓까지 가는 길은
도심의 번화가답게, 탄자니아의 수도답게 잘 정돈된 길과 정장을 입은 신사숙녀들이 많이 오갔다.

처음으로 본 인도양은 생각보다 맑았다.
해변 가까운 곳에서도 비취빛이 보이는 것이 아직도 오염이 되지 않은
청정해변임을 나타내는듯하여 경이로웠다. 해변엔 많은 사람들이 인도양의 바닷바람에
휴식을 취하고 있었고 가판에서 신문을 사서 읽는 사람들이 많았다
탄자니아는 아프리카의 다른 나라와는 달리 스와힐리어를 공용어로 사용한 탓에
신문을 많이 읽는다던 그 말을 실감하게 했다.

피시마켓은 바닷가에서 막 잡은 생선들을 잡아 올리는 바닷가 현장에 있었고
많은 사람들이 싼 경매를 하기 위해 한꺼번에 몰려들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생동감이 넘치는 그 자리엔 음식을 만드는 여자들은
하나같이 머리에 하얀 모자를 쓰고 있어 위생적인 모습을 보였지만
선뜻 음식을 사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음주주'라고 부르는 바나나 숯불구이나 튀김등도 우갈리와 함께 요리하고 있었다.

산통은 그때 터졌다. 거리에서 팔고 있는 거대한 문어를 삶아 슬라이스 된 조각 문어를
사기위해 우리일행은 그 문어 맛에 집중하고 있었고 그 틈을 타 쥐도 새도 모르게
어떤 언니의 카메라를 강탈당해 굉장히 우울하게 만들었다.

호텔로 다시 걸어가겠다는 생각을 접고 택시를 잡아타고 돌아와 짐을 꾸려
잔지바르행 시버스(페리호)를 타기 위해 항구로 출발했다.

페리호를 기다리며 줄을 선 긴 행렬에는 다양한 국적을 가진 사람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서양의 노란머리부터 인도인들, 이슬람들, 흑인 백인 황인종 할 것 없이
인종 백화점이라고 하면 맞을까?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모여  휴양 도시인 잔지바르행을 기다렸다.
우리는 그곳에서 4박5일을 머물 예정이다. 배 삯은 미국달러로 25달러였다.


약 세 시간을 달렸을까? 드디어 도착한 잔지바르는
강렬한 태양에 온 몸이 타들어 갈 듯 한 뜨거운 날씨에 포터들이
서로 짐을 들어주겠다고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고
인도양의 바다에는 예전 페르시아 상인들이 탔다던 다우선이 지나가고 있었다.

에메랄드빛 바다 속의 치어들이 페리호 근처로 달려드는 모습이 환하게 보일만큼 투명하게 맑았다.



검은 해안, 잔지바르

잔지바르는 인도양의 흑진주로 불리는 아름다운 산호섬이다.  향신료의 고장인 이곳은
1천년 이상 아프리카인과 아랍인,인도인들이 함께 살아온, 다문화가 공존하는 섬이다.

잔지바르(Zanzibar)라는 이름은
페르시아어로 잔지(Zanzi:흑인)와 바르(Bar:사주해안)의 복합어로 '검은 해안'을 의미한다.
이 이름이 붙여진 것은 계절풍을 따라 교역을 하러 온 페르시아 상인들에 의해서이다.
그들은 다우라 불리는 범선을 타고 12월쯤 잔지바르로 왔다가 6월쯤 역풍을 이용해 돌아가곤 했다.
이 섬에 처음 도착한 그들은  백옥같이 하얀 백사장에 흑인들이 살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잔지바르’란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선착장에는 출입국 관리소가 있어 많은 사람들이 붐볐다.
잔지바르에 가려면 탄자니아의 비자가 있어도 다시 입국심사를 받아야 한다.
여권까지 준비하여. 국경에서 심사받듯 다시 한 번 입국수속이 필요한 까닭은
잔지바르가 오랫동안 탄자니아의 섬이 아닌 독립국으로 지냈던 역사 때문이다.
비록 1964년 본토의 탕가니카와 잔지바르가 합쳐서
탄자니아 되었지만 오늘 날까지 잔지바르의 독립 요구는 계속 되고 있다한다.

한참을 출입국 심사를 받느라 지체하고 있는 동안
뜨거운 열기에 온 몸에서는 비가 쏟아지듯 땀이 흘러 내렸다.
그 많은 사람들이 통행하는 페리호의 선착장 입구가 좁아서
사람과 자동차, 리어카들이 섞여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우리 일행들은 개조된 리어카 두 대를 불러 짐을 싣고 숙소로 긴 행렬을 시작.
드디어 스톤타운의 카리브 인이라는 예약된 숙소를 찾기 시작했다.

스톤타운은 아랍인들의 석조 가옥 촌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문과 발코니가 있는
고층의 집들이 빽빽하게 미로를 이루고 있어 자칫하면 길을 잃기 쉬운 곳이라고 한다.  

잔지바르의 특성은 각 집안의 대문이 부의 상징이라더니 걸어 보면서 보니
문마다 화려한 조각을 하거나 스파이크를 박아 장식했고
조각 또한 다양했다.
꽃이나 나뭇잎을 조각한 것은 부에 대한 소망을, 물고기는 다산을  나타낸 것이라고 했다.
또한 문의 크기와 사용하는 나무 재질로 사회적, 경제적 지위를 나타내고
문에 붙어 있는 놋쇠로 된 스파이크는 인도 건축양식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인도에서는 코끼리가 집에 와서 부딪히는 경우가 있어 그것을 방지하기 위해
문에 놋쇠로 뾰족하게 생긴 스파이크를 박아 비록 잔지바르에 코끼리는 없지만 그 영향을 받아 만들어진 것이다.

잔지바르에 사는 사람의 대부분은 이슬람교도로 거리의 공원에도 모스크 가 있었다.  
공원에서 한가로이 휴식을 취하는 사람들이 자연의 일부처럼 보였고
이처럼 평화로운 곳이 잔혹하기 그지없는 노예시장의 거점이었다니
씁쓸한 역사의 흔적들을 어떻게 지울 수가 있을까?

인도양의 바람은 아픈 역사를  상쇄시키기라도 하듯 상큼하게 불어댔다.

카리브 인으로 숙소를 정했으나 불행하게도 전기불이 들어오지 않았다.
오후 일곱 시를 넘어야 자체 발전기를 가동하여 불을 켤 수가 있다는 통보다.

어두컴컴한 노예감옥을 연상하게 하는 그 숙소는
관광지의 특수를 노리는 바가지 값인지 일인당 2만원.
다닥다닥 번호가 붙은 방 한 칸에 4만 원 정도를 주고 자야하다니
우리나라의 새로 지어진 고급 모텔들의 가격들과 맞먹는 고가였지만
가격대비 시설은 천양지차였다.

천장에 달린 커다란 선풍기와 누렇게 퇴색된 모기장은 그 자체의
냄세 만으로도 역겨워 여행이란 누군가가 머물다 간 낡은 벽지 앞에서
옷을 벗는다던 표현이 절로 생각나게 만들었다. 나도 한때
그 낡은 모기장을 쓰다 떠나는 여행객의 한 사람일뿐이다.

배낭여행이란 조건을 탓 할 여유가 주어지지 않는 것이다.
주어진 여건에 최선을 다해 적응하는 것만이 최후까지 가장 잘
즐길 수 있는 방법임을 이미 터득한지 오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그 방에 머물 이유가 없는 우리들은 그대로
밖으로 뛰쳐나와 해변을 걸었다.

한없이 드넓은 바다는 세상의 모든 시름을 다 잊게 해 주었다.
고운 모래사장을 걷다보니 여행의 피로, 수개월째 나를 붙잡고 있는 생각의 울타리조차도
어쩔 수 없는 운명적인 일로 받아들여졌다.

기분 좋은 바람이 불고 있는 해변에는 다국적 사람들이 모여 석양을 즐기고 있었다.
각자 자기의 분수에 맞는 장소에서.

우리 일행은 모래사장을 걷다 전망 좋은 곳을 선택해 자리를 잡았다.
분위기가 부르조아틱 한 만큼 가격이 만만치 않았지만 모처럼 서울에서  삼겹살 먹는 값을
지불 할 생각으로 스파게티와 킬리만자로 맥주를 시켜 잔지바르의 첫 밤을 맞았다.

모래사장에서 뛰놀고 있는 수많은 아프리카인들의 활달한 모습을 볼 때마다
아직도 이질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내가
오랫동안  잘못된 편견에 길들여져 있음을 다시 한 번 깨달았던 순간이다.

잔지바르에 대한 팁

스톤타운의 복잡한 골목 못지않게 잔지바르의 역사는 복잡하고
그 사연도 절절하다.
1499년 바스코 다 가마의 발길이 닿은 후 포르투갈의 지배를 받았고,
1832년부터 150년 동안은 아랍 해상왕국 오만의 술탄이 통치했다.
술탄의 궁전이었던 경탄의 집을 비롯한 이슬람 유적지는 대부분  이 시대의 것이다.

아랍의 술탄은 이 곳 잔지바르 노예시장으로 동아프리카에서
생포한 아프리카인들을 데려와서 유럽 상인들에게 팔았다.
잔지바르는 향료와 노예를 노린 유럽 상인들의
아프리카 전초기지가 되었고, 술탄은 막대한 부를 축적하였다.


잔지바르의 볼거리

영국대성당
입장료-3500실링

영국 대성당은 1873년 폐쇄된 과거 노예시장 자리 위에 세워졌다.  
성당의 방향은 죽은 노예들이 실려 나갔던 방향대로 지은 것이다.

노예를 감금하던 대성당의 지하를 직접 들어가 보니 두 칸의 쪽방이 보존되어 있었다.
이 어둡고 좁은 방에 노예들을 쇠사슬로 묶은 채 감금해 두었다고 한다.
아직도  쇠사슬이 있었으며 천장이 낮아 일어서지도 못하는 곳에
수십 명의 노예가 쇠사슬에 매달려
팔리기를 기다리는 상품으로 있었다니 오싹하기 그지없었다.

오래전에 지어 방치한 탓인지 몹시 낡은 그 성당은
기독교식 성당과 고딕 건축, 아랍풍이 조화되어 잔지바르 특유의 조각이 있고
탐험가 리빙스턴은 노예무역을 유럽에 알려 이를 금지시키는데 노력을 했다.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후 농사일과 사금 채취 등 많은 노동력이 필요했던
유럽인들은 튼튼한 신체의 노예들이 필요했다. 그러나 원주민인 인디오들은 유럽인들이 갖고
온 질병이나 열악한 대우로 숨졌고, 장시간의 힘든 노동에는 적합하지 못했다.
결국 악조건을 버텨내고 긴 항해에서 살아남은 튼튼한 신체조건의 흑인들이 가장 인기가 좋았다.

그 흑인 노예들은 주로 부족간의 전쟁에서 진 사람들을 흑인들이 직접 잡아
백인들에게 팔아 넘겼다는 소리를 들으니 더욱 더 비감이 들었다.

"커피와 설탕이 유럽인의 행복을 위해 꼭 필요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이 두 식물이 두 대륙을 불행에 빠뜨렸음은 확실하다. 그들은 이것을 심을 땅을 얻기 위해
아메리카를 공략했고, 이것을 키울 사람을 얻기 위해 아프리카를 약탈했다."
어디선가 읽은 한 대목의 글이다.

향신료 투어
투어비-5천 실링

잔지바르는 각종 향신료가 유명하다.
아프리카의 순수한 블랙과 이슬람이 만나 뿜어 내는 조화로운 향기라고 한다.
농장을 직접 방문하면 현지인이 직접 설명을 해 주는데
천연색조화장품에 들어가는 식물부터 커피향이 나는 나무
바닐라 향을 만드는 나무
우리나라 생강과 똑 같은 향을 내는 식물
쵸코를 만드는 향신료의 재료가 되는 열매 등 다양하고 신기한 나무와
열매를 직접 보고 냄새를 맡게 해 준다.
어느 열매를 문질러 직접 입술에 바르자마자
금방 진한 오렌지색 립스틱이 되어 신기하기 그지없는 순간이었다.
투어에 참여한 여행자들을 위해 현지인들이 직접 야자수로 만든 모자와 가방을
선물하기도 하고 각종 과일들을 깎아 대접한다.
아프리카의 열대 과일나무들도 함께 구경할 수 있는 좋은 기회다.

포장마차촌
포로하니 공원에 열린 장터에는 구운 문어, 오징어, 소고기나 간 꼬치,
염소고기 등 음식과 수산물을 팔고 있다. 불에 직접 구어 주는 오징어와 삶은 문어는
일반 육지의 것과는 다른 싱싱한 맛으로 인기를 끌고 있다.
저녁 6시가 넘으면 수많은 사람들이 몰린다.

*머큐리의 고향 잔지바르

또한 이곳 잔지바르는
'그룹 퀸, 프레디 머큐리의 고향, 잔지바르'에서는 프레디 머큐리의 고향이다.

퀸의 리드 보컬 프레디 머큐리(Freddie Mercury)는 에이즈로 사망했다.
아프리카 잔지바르(현 탄자니아) 태생인 머큐리, 4옥타브를 넘나드는 목소리로
온 세상을 사로잡았던 그도 에이즈를 피해가지 못했다.

양성애자였던 머큐리는 에이즈에 감염 사실을 부인하며 말년에 은둔생활을 했다.
결국 1991년 11월 24일 에이즈 감염을 공개한 직후 세상을 떴다.

타망고의 이야기  

뮤지컬로도 공연되는 프로스페리 메리제가 쓴 <타망고>는 흑인매매가 성행하던 시대에 흔히 일어났던 노예들의 반란에 대한 이야기다.

프랑스 국적의 희망호는 르두 선장이 이끄는 튼튼한 노예선이었다. 르두 선장이 아프리카의 노예 해안에 왔을 때 이름난 전사이자 노예상인인 타망고를 만났다. 타망고는 30명 가량의 노예를 팔아넘겼다.

거래의 성사를 축하하는 파티에서 타망고는 술에 취한 나머지 그의 아내 중에 가장 아끼던 에이세를 르두 선장에게 팔아넘겨 버렸다. 다음날 술이 깬 타망고가 이 사실을 알았을 때 노예선은 이미 출항하고 난 후였다.

그는 서둘러 작은 배로 쫓아가 선장을 설득했다. 그러나 선장의 눈에 힘세고 건장한 타망고는 비싼 값을 받을 수 있는 노예일 뿐이었다. 선장은 타망고를 다른 노예들과 함께 배 밑바닥에 실었다.

다음날 아침, 타망고는 갑판위에 에이세를 발견한다. 가슴이 찢어질 듯 아프지만 그녀를 구해줄 수 없었다. 타망고는 반란을 결심했다. 에이세는 그의 부탁에 따라 쇠사슬을 자를 수 있는 도구를 빵 속에 숨겨 건넸다. 타망고는 자신과 동료들의 몸을 묶고 있는 쇠사슬을 조금씩 자르며 계획을 세웠다.

어느 날 모든 쇠사슬이 끊기고 타망고의 외침에 따라 무리를 이룬 흑인들이 갑판 위로 쏟아져 나왔다. 긴 시간 전투가 이어지고 마침내 타망고는 승리의 외침을 했다. 르두 선장을 비롯한 백인들은 남김없이 바다에 던져졌다.

그러나 타망고는 배를 다루는 법을 몰랐다. 실수로 돛대가 부러지고, 구명정에 옮겨 탄 사람들은 배가 뒤집혀 죽음을 맞이했다. 남은 이들은 심한 바다에 흔들리며, 때로는 타는 듯한 햇빛을 받으며 먹을 것을 위해 서로 싸웠다. 과자 한 조각에 싸움이 일어났고, 그 때마다 약자는 죽는 것이다.

얼마의 시일이 지났을까 인근을 지나던 영국 선박이 정처 없이 떠도는 선박을 발견했다. 그곳에는 죽은 흑인 여자와 겨우 사람이란 것을 분간할 수 있을 정도로 앙상한 흑인 남자가 있었다. 부서진 돛대의 발치에 앉아있는 그는 말하지도 움직이지도 못한다. 그가 바로 타망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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