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화상 ---- 서정주
애비는 종이었다, 밤이 깊어도 오지 않았다.
파뿌리같이 늙은 할머니와 대추꽃이 한 주 서 있을 뿐이었다.
어매는 달을 두고 풋살구가 꼭 하나만 먹고 싶다 하였으나····
흙으로 바람벽한 호롱불 밑에
손톱이 까만 에미의 아들.
갑오년이라든가 바다에 나가서는
돌아오지 않는다하는 외할아버지의 숱 많은 머리털과
그 커다란 눈이 나는 닮았다 한다.
스물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 할이 바람이다.
세상은 가도 가도 부끄럽기만 하드라.
어떤 이는 내 눈에서 죄인을 읽고 가고
어떤 이는 내 입에서 천치(天痴)를 읽고 가고
나는 아무것도 뉘우치진 않으련다.
찬란히 트여오는 어느 아침에도
이마 위에 얹힌 시의 이슬에는
몇 방울의 피가 언제나 섞여 있어
볕이거나 그늘이거나 혓바닥 늘어뜨린
병든 수캐마냥 헐떡거리며 나는 왔다.
이 시는 시인이 23세 때(1937) 추석절에 쓴 글입니다.
스물 세 해 동안 자신을 키운 것의 팔할이 바람이라고 본 것은
참으로 시인의 탁견이라 생각됩니다.
바람이란 그 시작의 끝을 알 수 없지만
자연의 모든 것을 안고 있는 것이니까요
옆에 있어야 할 것이 없으면 그 바람이 차갑게 느껴지니
....하긴 사람의 일,세상의 일도, 자연아닌 것이 없는 것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