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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 여행 - 루사카서 리빙스턴으로

감기 기운으로 일찍 잠자리에 든 탓인지 새벽 네시에 눈을 떴다
 

잠비아는 그동안 머물던 탄자니아보다 한시간 더 늦어 우리나라보다 일곱시간이 늦는 편이다.

잠비아의 수도이며 남쪽 지방의 역사적인 식민도시 루사카에서 첫 밤을 보냈다.도미토리 차차차는 깔끔하고 뜨거운 물이 콸콜 잘 쏟아져 만족스러웠다.

 

설사 8인실이라 해도 불과 물이 풍부하면 이젠 그야말로 퍼펙트한 만족이라는것을 깨닫게 되었다
잔지바르와 능기비치의 전력난으로 시간제로 불이 켜졌던때를 생각하면 황송하기 그지없다.

 

물도 졸졸 나오다 말고 머리감으려면 비누칠해 놓고서 한삼분 이상  기다리다가 또다시 조금 나오면 마무리하기까지 열번은 기다려야 할 상황이었으니..어찌 감지덕지 하지 않을까..

루사카는 1930년대 까지만 해도 그저 농사나 짓는 촌락이었다.  1931년 리빙스톤에서 이 곳으로 수도를 옮긴 후 북 로디지아의 수도가 되었으며,  1964년 독립을 하면서 잠비아의 수도가 되었다 잠비아는 세계적인 구리의 생산국이다.

영국의 지배를 받아 현지인들은 채굴 노동자로 일했을 뿐이다.  게다가 독립 후 독재정치와 부정부패로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중 하나가 되었다

 

잠비아는 주민의 80%가 하루 1달러 미만으로 살아가는 세계에서 가난한 나라 중 한 나라다. 

수도인 루사카는 잠비아 최대의 도시이지만 역사가 오래되지 않고 볼 거리도 그다지 많지 않다.  그러나 많은 여행자들이 이 곳에 들르는 이유는 빅토리아 폭포가 있는  국경도시 리빙스톤으로 가기 위해서 중간 기착점이기 때문이다. 

루사카도 케냐의 나이로비처럼 고도 1300m에 자리 잡은 고원도시이기 때문에 선선하다.  도시 이름은 마을의 추장이었던 루사카에 유래되었고 시내 동쪽으로 자리잡은 신시가지는 미국에 온 듯한 느낌이 들 정도다.

별이 총총이 뜬 루사카의 새벽은 고요하고 맑은 바람이 기분좋게 했다.  공동으로 사용하는 화장실과 샤워실 키친등은 저녁내내 환하게 불을  켜 놓는지 전혀 무섭지 않았다.

 

이쪽 사람들도 흑인들을 두려워하는지 철처히 입구를 지키고 하루종일 문을 봉쇄해 놓고 있었다.

점심 도시락 쌀주먹밥 재료를 준비해 놓고 컴에 자료를 흟어보니 여행 칠일째 팔일째 썼던 모시서 다르에스살람으로 가는 길과 다르에스살람에서 잔지바르에서 보낸 첫밤의 여행기가 빠져 있음을 그때서야 깨닫게 되었다.

작업하다 불이 나가 완전히 확인을 다시 하지 못하고 유에스비를  김양재씨편에 보낸것이 문제였다.

큰일이었다. 능기비치것만 기사를 보내고 그 이전것이 없으니 어떻게 할 도리가 없어 편집장께 문자를 여러번 보내 다음달에 기사를 올리는것으로 마무리했다.

 

마음이 불편했다. 그냥 전기불탓만 할것이 아니고 조금 더 완벽하게 꾸렸어야 했는데...

동이트자 한사람 두사람 주방으로 몰려 들었다. 루사카로 7시간동안 버스를 타야 한다니 주먹밥을 만들고 일행들이 가져온 라면으로  현지에서 사온 라이스를 넣어 짬밥을 만들어 드렸더니 굉장히 만족한 아침이었다는 칭찬을 들었다.

상당히 세련된 도외지 풍의 루사카를 돌아보고  역사적인 콜로니얼 도시, 로디지아(잠비아의 옛 이름)의 수도였던 리빙스톤으로 다시 떠날 준비를 했다. 끊임없이 떠나는 것에 길들여진 우리들의 가슴속에는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동경으로 가득했다.

아프리카 곳곳을 달리다 보면 이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자주 느낀다. 그만큼 광활하고 드넓다. 
순도 높은 청량감이 어떤 것인지를 확실히 깨닫게 하는 하늘을 보며 아프리카의 하늘을 꼭 한국으로 가지고 가고 싶을 만큼 유혹하고 있었다.

루사카인터시티 버스터미널은 인산인해 그야말로 국제적인 버스행렬탓인지  다양한 사람들이 즐비했고 대도시답게 여성들의 헤어스타일이 멋졌다.

단순히 머리를 땋는 사람만 있는것이 아니라 파마머리와 생머리 멋장이들이 많았다.

아홉시반 리빙스톤행 국제버스에 짐을 싣고 버스에 올라탔으나 언제 왔는지 미리 타고 있던 수많은 현지인들이 좋은 자리를 다 차지하여 우리는 맨 뒷쪽 자리에 줄줄이 앉에 되었다.

7만콰차 우리나라 돈으로 2만원정도 되는 돈이다 .버스는 생각보다 편안했으나 타자마자 어느 선교사인지 목사인지 한동안 영어로 설교를 하고 기도를 하고 아멘할렐루야를 외치며 내려갔다.

의자가 안락해서 독서를 해 보려고 책을 폈으나 뜻하지 않은 복병으로 일곱시간 내내 골머리를 앓아야했다. 머리위에 달린 브라운관에서 시스터엑트에 나오는 합창단들이 춤과 노래를 하는데 주로 성경을 리메이크한곧들이었는데 어찌나 큰 볼륨으로 우리 귀를 괴롭히는지 환장하게 만들었다.

볼륨을 낮춰 달라는 요청을 해도 들은척도 안하고 창가엔 커튼도 없이 강렬한 아프리카 태양과 찢어질듯 귀를 괴롭히는 노래소리를 들으며 일곱시간을 달렸으니 상상해 보라.

비행기 안에서 준 귀마개와 휴지를 틀어막아도 그 소음으로 부터 완전히 해방될 수가 없었던 순간이다.

중간 휴게실에서 또한 잊지못할 해프닝이 있었다. 화장실을 가려면 1000콰차(우리돈 300원) 정도를 내야 한다해서  마침 친구에게 1000콰차를 달라해서 주고 들어가 볼일을 보고 나오니 내 손에 두툼한 지폐를 열장정도 쥐어주는것이었다.

의아해서 그 잔돈을 받아들고 친구에게 내미니 친구가 깔깔거리며 자기는 천콰차라고 생각하고 주었는데 아무래도 만콰차짜리를 준 모양이라며 낄낄거렸다.

그렇다면 화장실 한번 사용하는데 5천콰차를 낸것이다. 우리나라 돈 1500원. 어쩐지 화장실이 깔끔하더라 했더니 완전 바가지를 쓰고 말았다.

겨우겨우  일곱시간을 견디다 리빙스톤에 도착했다.

현지시간 오후 5시를 넘기고 있었다. 오자마자 들르려고 마음먹었던  리빙스턴 박물관은 이미 클로즈. 할수없이 다음날 아침 8시에 오픈한다고 하니 갈 수 밖에 없었다.

우리 리빙스톤의 숙소


졸리보이스
 

Jollysboys-졸리스는 프랑스어로 즐겁다는 뜻

기나긴 버스 여행의 피로를 한 방에 날릴 수 있는 평화로운 정취가 한눈에 들어왔다. 유유히 수영하고 있는 젊은 외국인들과 인도풍으로 꾸며놓은 리셉션장 너무나 마음이 놓였다.

 

우리일행 31명이 들어갈 방을 배정했다 우리여자들은 무려 16명이 쓰는 도미토리가 배정되었지만 그래도 행복했다.

서둘러 기차안에서 부터 입었던 옷을 빨아 널어놓고 수영장앞에서 글을 쓰는 나는 모처럼 여유롭고 행복한 웃음을  웃을 수 있었다.

여행이란 이런것이 아닐까.. 목이 아파서 맥주는 못마시지만 그래도 이아름다운 정원의 숙소에서
좋은 분들과 어울려 함께 식사를 할 수 있다는것 옆에 초은이 언니가 저녁을 준비하고 유선생은 열심히 서빙을 하고 있다.

아프리카에서 머물렀던 백펙커스중 가장 낭만적인 숙소였다. 졸리보이엔 수없이 많은 망고나무가 있었는데 한바퀴 그 나무밑을 돌고나면 한소쿠리씩 망고를 주어올 수 있어 질리도록 망고로 실컷 배를 채웠다.

*
리빙스턴여행까지 뒤돌아 보면 이번 아프리카 여행의 장점과 단점을 적어보자.

 

여행사-인도로 가는길

한달 아프리카 여행치고는 경비가 싸다는것,600만원. 싼 이유를 절실히 깨달았다.

다에르 살람서 기차를 타고 카피리 음포시역에 내리기까지 총 43시간. 그곳에서 다시 루카스까지 세시간 이상을 버스로 달렸고 다음날 루카스서 리빙스톤까지 일곱시간 이상을 달렸다.

그렇다면 빅토리아 폭포를 보기 위해 우리가 거리에서 보낸 시간을 총 합산해 보면 5박6일정도가 된다


다르에스 살람서 바로 리빙스톤까지 오는 버스나 비행기는 없었는가?

다르에스 살람서 카피리음포시까지 기차로는 43시간이지만 버스로는 24시간이면 되었다는데 버스를 선택했다면 시간 절약을 할 수 있었지 않았을까?

 

몹시 지루하고 불편한 미니봉고를 오래 타는것은 그야말로 지옥이다.

 

http://www.parangse.kr/ 송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