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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도 롤랑가로스 여자 결승; 에넹-피에르스 관전기

2004년도 6월에 "테니스 코리아 에세이 코너"에 이미 실었던 글입니다.
거기에서 읽었던 분들은 읽지 말아 주세요.
중복게재를 밝혔으니 이해해 주시겠지요?

                *               *               *

2004년 6월 4일 토요일, 프랑스 파리, 비 조금 뿌리고 짙게 흐림

지금은 새벽 5시. 여기는 몽파르나스(서울로 치면 신촌같은 곳으로서 젊은이들이 많이 모인다.)의 한 인터넷 카페다. 어느덧 어둠이 걷히고 하늘이 옅은 청자색으로 물들었다. 춥지도 덥지도 않은 날씨에 새벽 공기가 상쾌하다. 아마도 섭씨 14도 정도나 될까. 어젯밤 11시부터 롤랑가로스 테니스 남자 준결승 나달-페더러 편을 쓰고 있는데, 곧 마칠 수 있을 듯 해서 버티다가  밤을 새게 되었다.

그러나 작업은 그 후로도 한참이나 더 걸려서 마치고 나니 아침 9시 반이 되었다. 인터넷 사용료만 25유로(1유로=1,300원)나 냈다. 밤새 맞은 편 바에 들락날락하면서 생맥주를 세 잔, 커피를 세 잔 먹었으니 그 값도 20유로 정도 된다. 그러나 평생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일이니 아깝지 않다. 글을 끝내고 인터넷 사이트 “테니스리포트”에 올렸다.

호텔로 돌아와서 아침을 청해 먹고 샤워를 했다. 한잠도 못 잤지만 몸은 견딜 만 했다.
6번과 10번 지하철을 타고 20분 정도 가서 “뽁 도뙤이으(Porte d'Auteuil)” 역에 내려서 롤랑가로스로 걸어 들어간다. 걸어서 10분이 못되는 거리다. 성지를 순례하러 가는 듯 진지한 얼굴들을 하고 파리 시민들과, 영어, 스페인어를 쓰는 여타의 타국인들이 줄줄이 스타디움으로 향하고 있다. 암표를 파는 청년이 있다. 값이나 알아보려고 물었더니 250유로(센터코트)라고 한다(원래 가격은 58유로). 내가 안 사겠다고 했는데도 얼마면 사겠느냐면서 계속 따라 오다가 돌아갔다.

센터코트 표는 당연히 매진이다. 부속코트(Annexe)표를 11유로 주고 사서 들어갔다. 여자 결승 경기는 3시로 예정되어 있다. 지금은 1시다. 사람들이 몰려 있는 코트가 있길래 들어가 보았다. 나달과 푸에르타가 3, 4번 코트에서 나란히 연습을 하고 있었다. 관중은 나달 쪽이 열 배는 많았다. 나달은 딸기색 빨간 바지에다 코발트 블루 티셔츠를 입고 나왔다. 색깔이 화려해서 흡사 왕자님의 예복 같았다. 서 너 명의 팀이 따라 나와서 연습을 돕고 있었다.
푸에르타는 평범한 흰색 상, 하의에, 코치 한 사람을 데리고 연습하고 있었다. 나달의 사인을 받으려면 경쟁이 심하겠다고 판단하고 차라리 푸에르타의 사인볼을 받으려고 그쪽 코트의 출구 쪽에 자리 잡고 앉아 기다렸다. 푸에르타가 잠시 휴식하는 동안 그의 벤치로 사람들이 몰려가더니 줄줄이 사인들을 받아 갔다. 건너편 쪽이라 나는 보고만 있었고... 연습을 마치고 푸에르타가 바로 내 코앞을 지나갔지만 그는 사인을 거절하고 그냥 지나갔다. 어차피 우승자는 아닐테니 서운하지 않다 라고 속으로 생각하였다.

중앙도로를 걸어서 100여 미터 떨어진 수잔랑글렌(한국에서는 수잔랑랑 이라고 흔히 말하지만)코트로 갔다. 맥캔로와 노아가 한 편이 되어 45세 이상 남자 복식 결승을 하고 있었다. 상대팀은 환갑나이는 되어 보이는 미국의 한 선수와 호주 선수였다(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노아 쪽이 첫 셋 5대0으로 앞서고 있었다. 노아는 이제 점수 관리보다 관중 서비스를 주목적으로 플레이하고 있었다. 자기가 친 볼을 따라서 상대편 코트로 껑충 뛰어 넘어 가서는 상대편과 합류하여 자기편인 맥캔로를 상대로 3대1로 플레이를 하였다. 혹은 자기 머리 위로 넘어가는 로브를 애초에는 받으려는 듯하다가는 갑자기 포기하고 비켜나면서 맥캔로를 보고 뛰어! 라고 소리쳤다. 얼굴모양을 괴이하게 만들어 상대편을 놀리기도 하였다. 양 볼에 바람을 넣어 부풀리다가 오무리다가 하면서 리턴 준비중인 상대편의 집중을 어렵게 하는 것이었다. 관중들은 물론 즐거워하였다. 끝까지 보지는 않았지만 노아 팀이 이겼겠지. 프랑스 테니스의 영웅 노아는 지금 레게풍의 샹숑으로 인정받는 가수다. 그리고 가난하고 의지할 데 없는 어린아이들을 보호하는 자선프로그램을 주도하고 있다. 프랑스의 명사중의 명사이다.

이어서 45세 이하의 결승도 보았다. 프랑스의 샹피온과 어떤 호주 선수가 한 팀이고 상대는 스웨덴의 복식조였다. 이들은 45세 이상 부와 달리 시종 진지하게 플레이하고 있었다. 그러나 20년 전 과거에는 최고의 기량을 자랑하던 이들이겠지만 지금의 그들의 플레이는 생각보다 루즈 하였다. 런닝은 굼뜨고, 스트로크는 무디고, 볼을 따라가는 능력도 눈에 띄게 느렸다. 오래 보고 있을 맘이 생기지 않았다. 스포츠는 최고를 지향한다는 본질을 알 것 같았다.

오늘은 어떤 행운을 의탁해서도 센터코트 표를 구하기 어려울 듯 싶다. 프랑스인들이 피에르스에게 기대를 잔뜩 걸고 나처럼 표 없이도 몰려들어 광장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길어야 3셋인 여자 경기에서 경기도중 관전을 포기하고 나올 사람도 없을 것이므로, 어제처럼 도중에 나가는 사람에게 표를 얻어 입장할 요행을 바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서 다른 방면에서 보람을 찾기로 했다. 구내의 테니스 박물관(Tenniseum) 구경을 했다.

테니스의 기원, 라코스테와 3명의 남자 선수가 그랜드 슬램과 데이비스컵을 휩쓸던 프랑스 테니스의 전성기인 1920년대 이야기, 야닉 노아의 롤랑가로스 우승으로 다시 의욕에 불을 당기고 있는 현대의 프랑스 테니스, 테니스 라켓 제조 광경,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저장해 놓은 롤랑가로스와 데이비스컵의 중요 순간, 선수 프로필, 테니스 관련 서적, 역대 우승자 사진, 등등이 주요 전시물이었다. 포괄적이고 수준 있는 전시였지만 환상과 매혹을 불러일으킬 정도는 아니었다. 방명록을 들춰보니, 언뜻 보기에 한국인의 서명은 보이지 않았다. 내가 한글과 영문으로 소감문을 적어 넣었다.

“지난 한 세기동안 인류에게 행복을 주었던 테니스, 다음 세기 동안에는 한국인도 한 몫을 맡게 되기를 바랍니다.”

지름 1미터는 될 성싶은 기념 테니스볼 앞에서, 그리고 유니폼을 입은 안내 여성과 기념 사진을 찍었다. 바게트에 소시지와 겨자소스 넣은 샌드위치로 점심을 먹었다. 4.5유로. 겨자 맛이 코가 찡하게 매운 것이 아주 매력적이었다. 생맥주로 목을 적셨다.

                  *                *                 *

지금부터가 여자 결승 관전기이다. 그런데 직접 센터코트에서 본 것이 아니라 코트 외벽 스크린을 통해서 보았으므로 현장 분위기를 정확하게 파악했다는 자신이 없다. 그 점을 감안하고 읽어 주시기 바란다.

여자 결승은 센터코트 동편 앞 데이비스 광장 바닥에 앉아 대형스크린으로 관전했다. 1920년대에 프랑스가 데이비스컵에 연승을 하던 때의 주역 네 명의 남자 선수의 동상과 데이비스 컵 모형으로 꾸며진 천 평 정도의 공간이다. 화면은 해상도가 그리 높지 않아서 텔레비젼만큼 선명하지 않았다. 우리 나라 기업, 엘지나 삼성에서 찬조해서 선명한 것으로 교체해도 좋겠다고 속으로 생각했다.

경기는 비교적 단조로운 패턴으로 흘러갔다. 비교적 짧게 끝나는 랠리와 범실로 엮어져 갔다.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은, 피에르스의 연이은 스트로크 범실이었다. 매치 내내, 그는 에넹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자기 스트로크와 싸우고 있었다. 두 번째로 눈에 들어오는 것은, 피에르스가 어설프게 받아서 루즈하게 넘긴 볼을 에넹이 매섭게 위닝 스트로크로 응징하는 것이었다. 피에르스의 선전을 기다리는 프랑스 관중들이 표정을 굳힌 채 오랫동안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그러다가 몇 게임에 하나씩 피에르스의 위닝 샷이 터지면 기다리고 기다렸다는 듯이 환호를 질렀다. “마리!” 하고 헤어지는 연인을 부르듯이 간절히 외치기도 하였다. 피에르스를 응원하는 나도, 경기 흐름의 반전을 목을 매고 기다리다 지쳐서 점점 더 침울하게 되었다. 빗방울이 떨어지다 말다 했다. 차라리 비가 와서 중단이라도 되었으면 하고 바라기도 했다. 그러나, 중단하고 다시 시작한들, 피에르스가 전략을 바꾸어 국면을 전환시켜 낼 것 같지 않았다. 피에르스는 자신의 전술을 오로지 고집하는 듯 했다.

기다림과 목마름 속에 순식간에 승부가 결정 났다. 셋 스코어 2 대 0이다(6:1, 6:1).

피에르스는 에넹의 8강 전 상대, 샤라포바와 꼭 같은 전술을 사용하였고 꼭 같은 좌절을 한 것으로 보인다. 베이스라인에 가까이 서서, 빠르게 되받아 치려는 전술 말이다. 베이스 라인에 붙어 서서, 에넹의 빠르게 좌우로 빠지는 공을 받아 내려 하니 그러기가 참으로 어려웠다. 받아내더라도 밋밋한 공에 그쳤고 좀 위력 있게 강타를 하려 하면 스트로크 실수가 나왔다. 그에 비해, 에넹은 아예 멀찍이 베이스라인 2.5 미터 뒤에 서서 여유있게 스트로크를 하였다. 서비스 리턴 때는 그 자리에서 다시 두 걸음 뒤로 물러나며 리턴 하였다. 피에르스는 서브리턴을 할 때, 베이스라인에 바싹 붙어 있거나, 심지어 라인을 밟고 서 있었고, 세컨 서브는 안으로 점프해 들어가면서 리턴 한다. 에넹의 서브 속도는 아주 빨라서 170 킬로 짜리가 많았다. 그 빠른 서브를 베이스 라인을 밟고서 리턴 할 수 있었다는 것은 피에르스의 높은 능력이라고 인정해 줄 수 있다. 그러나 리턴했다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리턴 공이 타이밍은 빠르지만 클레이 코트에서는 그 효과가 대단치 않았다. 다소 발이 빠른 에넹 같은 이는 그 리턴 볼을 충분히 잡아서 공격할 수 있었다. 여러 번 반복된 전형적인 게임 진행 포맷중의 하나는, 에넹의 강 서브를 피에르스가 좀 불완전하게 리턴하면 그 리턴 볼을 에넹이 포핸드로 잡아서 역크로스 강타를 하는 것이다. 피에르스는 자기 왼 쪽의 텅 빈 코트로 볼이 빠져나가는 것을 따라가기를 포기하고 바라보고 있다. 나는 “왜 그런 식으로 성급하고 설익은 리턴을 하고는 역습 당하나요? 꼭 그렇게만 해야 하나요?” 하고 소리치고 싶었다. 베이스 라인에서 뒤로 많이 물러나서, 스트로크 대결을 한다면, 꼭 이긴다고 할 수는 없지만, 이번처럼 승리를 헌납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한 선수의 플레이는 상대방 플레이에 매 순간 영향을 받는다. 상대가 에러 없이 안정된 공을 쳐 오면 나는 당연히 조심이 되고 더욱 포인트를 아껴야만 한다. 반대로, 상대가 수시로 에러를 해 주고 점수를 바쳐 오면, 나는 점수에 여유가 생겨 더욱 더 자신감 있게 마음껏 휘두르게 된다. 에넹도 랠리가 7, 8개 이상 이어지면 에러를 하는 선수다. 그의 컨트롤은 그렇게 좋다 할 수 없다. 그런데 4, 5구 이전에 피에르스가 에러를 해 주니 에넹은 참으로 편한 게임을 했다. 두 번째 셋 중간쯤 언젠가 스크린 자막에 보니 언포스드 에러가 24 대 12라고 데이터를 보여주었다. 피에르스가 두 배의 범실을 하고 있었다. 에넹이 하나 실수하면 하나 더 보태서 2개의 실수로 갚는 꼴이었다. 에넹은 아마도 맘속으로 ‘마리, 너무나 고맙다.’ 하는 말을 수시로 하였을 듯 하다.

이런 “빠른 되받아 치기” 전술은 하드 코트나 잔디 코트에서는 충분히 가치가 있을 전술이고, 클레이에서도 움직임이 둔한 상대방에게는 효과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클레이 코트의 베이스 라인 뒤에서 질긴 스트로크를 하는 상대를 만나면 결정적인 취약점을 가진 전술이 될 수가 있다. 제일 먼저, 그러한 빠른 되받아 치기가 수비력이 좋은 상대에게는 결정구가 되지 못한다. 즉 포인트를 얻어내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 다음으로, 상대가 일단 받아넘겨서 스트로크 대결로 양상이 진행되면 베이스라인에 붙어선 포지션은 매우 취약하다. 내 코트의 양 구석으로 길게 오는 볼을 좇아 갈 방도가 없다. 마지막으로, 상대는 충분히 시간을 쓰면서 매 스트로크를 안정되게 치는데 비해 나는 쫓기면서 스트로크 하는 셈이 되므로 아무래도 에러율이 높아질 것이다. 면이 빠른 코트에서는 빠른 공이 가지는 위력만으로 득점이 가능하므로 그런 플레이의 보람이 있지만, 면이 느린 코트에서는 그 보람을 거두기가 어렵다. 내가 보기에, 한 점을 얻는 동안에 세 점을 주는 폭이었다.

나의 전술 평가는 사실은 피에르스의 플레이에 대한 모욕이 될지도 모른다. 인생을 걸고 테니스를 하는 프로들의 플레이에 비해 내 분석은 즉흥적이고 일면적이고 얄팍하다. 그와 그의 팀은 내 분석보다 훨씬 깊고 종합적인 진단을 하고 나서 최선의 전략을 선택하였을 것임에 틀림없다. 내 분석이 설사 장난감 유리 구슬만큼의 가치가 있을지 모르지만, 피에르스의 게임은-참패한 게임조차도, 다이아몬드만큼이나 값이 있다는 것을 안다. 만 분의 일이라도 내 글이 그의 심기를 상하게 할 것 같다면 나는 이 글을 차라리 지우겠다. 그러나 그가 화를 내기보다는 아마도 “재미있는 의견이군요.” 하고 웃어 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그는 보기보다 아량이 있는 여자였다. 이 글 뒤에 나오는, 승부 결정 직후의 그의 태도를 보면 말이다.

사실은 이 분석을 같이 나누고 싶은 사람들은, 바로 매일 코트에서 만나는 내 테니스친구들이다. 시종일관 강한 볼로 상대를 제압하겠다는 생각을 조금만 참고, 랠리를 최소한 7, 8 개만 끌어 가 준다면 매 게임마다 아기자기한 재미를 더하게 되고 운동량도 엄청 늘어날 것인데..... 그리고 그들이 원하는 강한 볼도 궁극적으로는 그러한 부드러움에서 나올 것인데.... 자신의 힘을 너무 믿는 나머지 강타로 일관하다가 3, 4구 이내에 넷에 걸치거나 아웃 시키는 플레이를 볼 때는, 나는 엑스타시에 이르기 전에 끝나버린 사랑의 행위보다도 더욱 안타깝다.

나는 왜 피에르스의 샷 하나 하나에 일희일비하는가. 나는 약자이며 약자가 이기는 게임을 소망한다. 내가 세상살이에서 겪는 약자로서의 좌절감과 고통을 보상받고 더 나은 상승을 약속 받기 위해 그를 응원한다. 내가 내 삶에서 간절히 바라던 것, 몸부림치며 수고했지만 얻지 못한 소망들에 대해 다시 한 번 띄워 보내는 구애의 몸짓이다. 정원이 딸린 고급 맨션을 가질 만한 부자가 못된 것, 회사 내에서 승진하지 못한 것, 시험에 실패한 것, 연인에게 버림받은 것, 좋은 아들이 되지 못한 것, 좋은 남편, 부모가 되지 못한 것. 이런 가지가지 좌절과 실패로 지금도 가슴앓이 하면서, 때로 자정 넘은 시간에 벌건 눈으로 창 밖 칠흑 같은 어둠을 응시하는 나이다. 난 내가 아끼는 스타가 압도적으로 불리한 조건을 이겨내고 끝내 성공을 쟁취하는 것을 눈으로 보고 싶다. 인생의 승부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역전은 지금도 가능하다는 것을 확인하고 싶다.

그러나 가능할 것만 같았던 역전은 일어나지 않았다. 나와 같은 감정을 가지고 열중하던 관중들은 실현되지 않은 소망을 숙제처럼 다시 가슴에 담고 한층 무거워진 다리를 일으켜 세워 스타디움을 나선다. 아 어쩌면 저리 불쌍할까. 내가 다시 일어설 가망이 옅은 것처럼 그도 패배하였구나. 그가 언제 다시 그랜드슬램 결승 무대에 서기나 할까? 난 지하철을 타고 다시 세상 밖으로 나가야만 한다. 퇴장하는 인파로 북적일 지하철이 어쩐지 짜증나고, 집에 가면 해결해야 할 과제가 가슴을 무겁게 한다. 그러나 나는 잘 안다. 이 삶의 번거로움을 절대 거역하지 못하리. 테니스는 하나의 드라마이고 공연일 뿐, 인생 자체는 결코 아니라는 것을. 인생은 그보다 수 만 배의 무게가 있는 엄연한 현실임을. 어쩌면 주인공이 실패하는 비극영화를 보고 난 듯, 내 에이는 가슴이 이내 아물어질 것을 기다리며 고개를 한 번 흔들어 보고 긴 숨을 쉬어 본다.

승부는 결정 났지만, 아직도 시상식 준비를 하고 있을 즈음에, 스타디움 출입구 계단을 내려오는 여자 분이 있었다. 다시 들어갈 거냐고 말을 걸었다. 그는 나에게 다음 경기가 뭐가 남아 있느냐고 물었다. 남자 복식이라고 대답하니, 아마도 돌아오지 않을 거라고 하면서 표를 그냥 주겠다고 했다. 그러나 나가다가 돌아서서 책 한 권을 사 달라고 한다. 롤랑가로스 매거진을 8 유로에 사서 주었다. 대가를 치르는 편이 나도 맘이 편하다. 얼른 코트 안으로 들어갔다. 시상식 장면이라도 내 눈으로 보고싶었다.

피에르스는 내가 본 가장 다정스러운 패배자였다. 승부가 끝나자마자 넷으로 달려가서는 에넹을 양팔로 감싸 안고 다정스럽게 양볼에 비주(프랑스 사람들이 뺨에 하는 입맞춤 인사)를 하고 무어라 말을 건넸다. 아마도 '축하한다. 당신 참으로 훌륭한 게임을 했다.' 이런 내용이었겠지. 그의 성숙한 태도는 모범적이다, 하지만 인간미가 덜 있다. 좀 내숭스럽지 않은가. 그런데, 참으로 자연스럽게도 그는 벤치에 앉아서 지긋이 수건으로 눈물을 훔쳤다. 뱃속에서 복 바쳐 오르는 것으로 보이는 눈물이었다. 조신하게 앉아서 자신의 슬픔에 한동안 몸을 맡기도 있었다. 그렇지, 슬픈 게 당연하지. 당신 같은 1류 프로선수도 좌절하고 낙심하는구나. 그래, 나 혼자만 인생에 절망하는 게 아니구나. 내가 매일 좌절하고 낙담하듯이 피에르스도 오늘은 불쌍한 한 인간으로 저 벤치에 앉아 있다.

이윽고 시상식이 진행되었다. 피에르스는 눈물을 닦고 나서는 다시 우아한 미소를 띄고 대회의 여러 관계자들에 대해 일일이 감사의 말을 한다. 볼 보이, 심판, 관중, 자기 스탶 들 등등. 한 5분은 되리 만치 감사의 말을 길게 하니 관중들도 웃음을 터뜨린다. 불어로 말하고 나서 영어로도 덧붙인다. 그는 캐나다 태생이니 영어가 모국어일 것이다. 그를 우승을 노리는 투사로만 알았었다. 그러나, 그는 울음과 웃음과 사람에 대한 정을 풍부히 가진, 인간미 있는 사람임을 알겠다. 내가 피에르스의 팬이 되길 잘했구나. 그의 글래머스러운 몸매에 저런 여성스러움과 사람냄새가 있다니....

이어서 벌어진 남자 복식 경기를 보고 나서 7시쯤 센터코트를 나섰다. 3시간 전에, 환호하는 피에르스의 팬들로 가득 차 있던 데이비스 광장이 고즈넉하다. 가랑비에 젖은 몇 장의 낙엽이 아스팔트를 장식하고 있다. 드높던 기대와 가슴 졸임은 실재하지 않은 환상이었던 양, 흔적조차 없다. 우리의 소망과 탄식은 빗물에도 씻겨 내리나보다.

비요크만과 미르니이 대 브라이언 형제의 복식 결승도 볼 만 했다. 이 네 사람은 모두 다 일급의 복식 플레이어이지만 그들 사이에도 우열의 차이가 보였다. 미르니이는 눈에 띄는 결함은 없지만 좀 단조로운 플레이에 그치는 것 같아서 A-라고 보면, 브라이언 형제는 복식다운 활발한 움직임이 있어서 A+라고 하고 싶고, 비요크만은 상대의 의표를 찌르는 비호같은 포칭과, 넓은 수비 폭이 돋보여서 단연 A++라고 할 것 같았다. 비요크만은 그 대단한 브라이언 형제의 볼을 수시로 달려들어 포칭을 해 내었다. 그의 팀 승리의 80 프로는 그의 덕인 것처럼 느꼈다. 셋 스코어 2 대 1이었다. 경기 내내 “비요크만” 하고 외치면서 응원하는 중년 남자가 있었다. 아마도 그의 친한 친구인 듯 했다. 경기가 끝나고 비요크만은 그에게 다가가서 오랫동안 얘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나는 그 대화가 끝날 때까지 한참이나 기다리다가 그의 사인볼을 받았다.

어제 저녁은 호텔비가 좀 비쌌다(68 유로). 오늘은 유니폼을 입고 있는 안내 여성에게 싼 호텔이 있는 곳을 알려 달라했다. 종이에 적어 준대로 버스를 두 번 타고 쁠라스 드 끌리시(Place de Clichy)로 갔다. 그곳의 한 중국음식점에 들어가니 뷔페가 11 유로란다. 싸다. 식은 음식은 손님이 알아서 렌지에 데워 먹게 되어있었다. 스프랑, 고기요리랑, 밥이랑 해서 4인분은 먹은 듯 하다. 배가 남산만 해 졌다. 아침부터 지금까지 샌드위치 두 개만 공급한 내 위장에게 약간의 보상을 한 셈이다. 호텔로 들어가는 골목에는 다양한 취향의 바와 레스토랑이 있었다. 중년 손님들로 가득 찬 바, 인도식 바, 터키식 찻집, 그리스식 찻집, 등등. 여러 개성이 어우러져 돌아가는 파리의 삶을 증거하고 있었다. 아침용 바게트와 캔 맥주를 사서 호텔로 들어갔다.

호텔은 25유로(3만 5천원) 짜리로 그야말로 실비 호텔이다. 화장실은 층마다 하나가 있어서 공동으로 사용하게 되어 있었다. 낡기는 했지만 깨끗하게 관리되어 있었다. 12시가 되어 자려고 누웠는데, 호텔 주인 할아버지가 쓰는 로비 층의 방에서 한 시간 여 동안 부부가 말싸움을 하고 있었다. 냄비를 신경질적으로 긁는 소리와 두드리듯 하는 도마질 소리, 냉장고를 "쾅"하고 닫는 소리가 내 마음을 심란하게 했다. 나이가 많이 든 저 부부에게 저렇게 까지 상대방을 공격해야만 할 일이 있구나. 이게 우리 삶인가. 인생은 과연 축복이라는 게 사실인가 하는 회의가 들었다.

"그래, 이게 구질구질하지만 버릴 수 없는 우리 인생이지. 연꽃은 시궁 내 나는 썩은 흙에 뿌리를 두고 자란다지. 이런 인생 속에 연꽃을 피울 수 있는 그 어떤 날을 위해 진흙 구덩이 같은 삶을 포기할 수 없는 거야!"

파리의 한 지붕 밑에서 동양의 한 중년 남자가 꿈과 회의로 엮어진 잠에 빠져들었다.





[테니스는 어떻게 완성 되는가?]




  • 게임돌이 04.14 13:40
    가슴 짠하게 하는 깊은 글이군요

    요즘 봄 타듯하는 저처럼 .... 

     


    이곳 저곳에 묻어나는


    가슴시리게 하는 글들이 삶의 무게를


    삶을 생각하게 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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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위기 때 베스트 작전 10가지

    위기 때 베스트 작전 10가지 1. 포치 '곤란할 때는 포치'하라는 말이 있는데, 실제로 마음먹고 해보면 이것이 적중하기도 한다. 위기 상황, 즉 서비스 게임을 지키기가 불가능할 때, 첫 서비스가 들어갔는데 상대의 리턴이 좋은 때 등은 포인트 획득에 어려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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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비엔느 동호인 테니스 대회 참관기-둘 째날

    오늘은 2007년 7월 25일(수요일) 두 번 째 경기가 있는 날이다. (사실은 지금 동시에 두 개의 토너먼트에 참가하고 있다. 또 다른 한 대회는 St. Andre la gaz라는 리옹 동쪽 한 시간 거리에 있는 테니스 클럽에서 주최하는 토너먼트인데, 어제 밤 첫 경기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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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비엔느 대회 참관기-셋째 날

    7월 26일(목요일) 저녁 7시 반이 경기 시작이다. 6시 15분에 집에서 출발했다. 참치 샌드위치를 3.25 유로에 사서 먹으면서 고속도로를 달렸다. 샌드위치 빵이 축축해져 있어서 입에 닿는 감촉이 별로였다. 7시경 코트에 도착하니 상대방도 이미 와서 기다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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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좋은 볼을 치기 위해 텐션을 조절하라.

    좋은 볼을 치기 위해 텐션을 조절하라. 라켓을 새롭게 바꾸고 난 후 볼이 제대로 잘 맞지 않는 경우가 있다.강한 파워를 내고 싶은데 볼에 강한 힘이 실리지 않는다. 컨트롤 볼을 치고 싶은데 마음대로 잘 안 된다. 스핀볼을 자유롭게 치고 싶은데 스핀이 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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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 볼을 1초만 더 자세히 보라.

    볼을 1초만 더 자세히 보라. 테니스에서 가장 먼저 배우는 것이 ‘볼을 끝까지 보라.’라고 할 수 있다. 코치가 볼을 끝까지 보라고 매번 레슨 때마다 강조를 할 것이다. 볼을 끝까지 보는 자세가 아주 중요하며 정확한 타구를 원한다면 볼에서 눈을 떼지 말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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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 최신 스매시 타법

    최신 스매시 타법 스매시는 호쾌하고 장엄하게 터지는 테니스의 꽃이라고 할 수 있다. 코트에서 시원하게 내리 꽂는 스매시는 자신은 물론이고 보는 사람도 시원하게 느낄 것이다. 상대가 로브로 올린 볼을 한 방에 통쾌하게 스매시로 결정을 짓는다면 다시 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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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 실력과 인간성이 있는 우수클럽에서 활동하라.

    실력과 인간성이 있는 우수클럽에서 활동하라. 테니스를 하는 분위기가 즐겁고 환희에 넘쳐야 한다.항상 달려가는 곳이 코트라고 하면 그 코트는 뭔가의 의미를 시사해 주는 것이 좋다. 코트에 나오는 사람들을 보지 않으면 보고 싶고 언제나 함께 게임을 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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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 강한 센터 볼 다음 앵글 샷을 사용하라.

    강한 센터 볼 다음 앵글 샷을 사용하라. 앵글 샷은 서비스 라인이나 50~70cm 정도 베이스라인 쪽으로 각을 많이 주는 샷으로서 상대방을 많이 움직이게 하여 자세를 흩트리는 것이 목적이다. 그러나 앵글 샷은 실수하기 쉽고 자주 사용하면 상대방이 앵글 샷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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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 리더십이 있고 유머를 겸비하라.

    리더십이 있고 유머를 겸비하라. 테니스를 하는 사람들은 조금은 삭막하고 메마른 것 같다. 이는 승부를 눈앞에 두고 적과의 싸움을 해야 하는 게임의 성격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너무 인간미가 없고 냉정한 것 같다. 테니스를 잘 하려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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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 No Image

    사랑해요

    보고 싶어요 마음이 울적 해 지고 외로울 땐 더 그립고 보고 싶어요. 사슴처럼 커다란 눈망울이 아름다운 당신 당신의 고운 눈망울에 흐르는 맑은 시냇물이 그립고 보고 싶어요 사랑해요 연분홍 봉숭아 꽃으로 물들여 놓은 서쪽 하늘 노을을 보면 노을을 닮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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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 코스를 노리는 경기를 하라.

    코스를 노리는 경기를 하라. 초중급자들에게는 볼을 줄 곳이 많고 다양하게 볼을 칠 수 있다. 그러나 상대가 고수가 포진해 있으면 볼을 칠 곳이 별로 없다. 고수들은 웬만한 볼들을 다 받아 넘기며 기회가 왔을 때는 바로 위너로 작렬시키기 때문이다. 결국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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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 강서브는 다양한 토스와 타점으로 극복하기

    강서브는 다양한 토스와 타점으로 극복하기 우리 동호인들은 강서브를 가지는 것은 최대의 로망이다. 세계적인 선수는 아니더라도 아주 강한 서브를 자신의 무기로 개발하여 에이스를 내는 게임을 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그것이 쉬운가? 쉽다면 누구나 강서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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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 No Image

    2004년도 롤랑가로스 여자 결승; 에넹-피에르스 관전기

    2004년도 6월에 "테니스 코리아 에세이 코너"에 이미 실었던 글입니다. 거기에서 읽었던 분들은 읽지 말아 주세요. 중복게재를 밝혔으니 이해해 주시겠지요? * * * 2004년 6월 4일 토요일, 프랑스 파리, 비 조금 뿌리고 짙게 흐림 지금은 새벽 5시. 여기는 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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