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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장애인고용공단] 기간제 근로자/청년 인턴 서류 합격 + 면접 후기,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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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기간이지만 좋은 경험이 될 것 같아 지원했던  한국장애인고용공단기간제 근로자 모집!

 

서류전형에 합격하고 면접을 보고왔다.

 

지부마다 어디는 청년인턴으로 뽑고 어디는 기간제 근로자로 뽑던데 왜 제각각 인지 궁금했다.



장애인고용공단 면접 관련 글이 많이 없어 

면접을 앞두고 있는 분들께 도움이 되고자 면접 후기를 간단하게 남긴다.

 


 

-면접 시간:  25분 내외

-면접관 수: 6명



질문 복기

 

1. 간단한 자기소개

 

2. OO 회사에서 인턴을 했다고 했는데, 여기서 한 일이 무엇인지?

 

3. 성격의 장단점

 

4. 본인이 생각하기에 장애인 관련 문제는 무엇인가? (추가질문) 콕 집어서 한가지 문제를 말한다면?

 

5. (자기소개서 관련 디테일) OO 활동에서 OO를 통해 주는 메시지가 무엇이었는지?

 

6. 왜 장애인 분야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지?

 

7. 혹시 우리나라에서 분류하고 있는 장애의 종류가 몇가지 인지 아는지? 장애 유형을 말해봐라.

 

8. 10년 후 자신의 모습을 어떻게 그리는지?

 

9. 활동한 것을 보면, 독특하기도 하고실천 쪽에 가까운 것 같은데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나가고 싶은 것인지?

 

10. 본인이 일하게 되면 하게 될 업무가 무엇인지 알고 있는지? 설명해 봐라.

 

11. 혹시 다른 곳 지원서를 쓴 곳이 있는지? 합격해도 일을 중간에 못하게 되는건 아닌지?

 

12. 하게 될 일이 반복 작업이고, 전화를 하면서 끈질기게 요청해야 할 수도 있는데 잘 할 수 있는지? 끈질김이 있는지?

 

13. 마지막으로 준비한 말이 있는지?

 

+ 자소서 관련 두세 질문이 더 있었을 수도 있음​



 


 



공공기관 면접은 처음이었다. 기간제 근로자 채용이라 다대다 면접으로 간단할 줄 알았는데

면접자 한명, 면접관 여섯명이었다.

 

면접 분위기는 내가 느끼기엔 나쁘지 않았다. 나는 두번째로 면접을 봤고, 앞에 보신 분보다 좀 더 길게 봤다.

나는 이번 면접에서 장애인 관련 경험을 강조 하고 싶었는데, 그 부분은 80%는 성공 한 것 같다.

하지만 답변의 구성은 훨씬 더 많이 연습 해야 한다.

 






[OPIc/오픽 AL 후기] ① 오픽 시험 대학생 할인받는 법(+준비물, 유의사항)

내가 스피킹 시험에서 오픽을 선택한 이유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검색해보면 오픽과 토스를 여러 방면에서 비교해 놓은 글이 많다. 

 

가장 많이 언급되는 오픽의 장점은 시험 결과가 빠르게 나온다는 것!

일반적으로 일주일 후면 결과가 나오고,

서류 접수 시즌에는 조기 발표하는 이벤트도 한다고 한다. 

(5일 만에나오는 조기 발표가 있다고!)

 

나는 결과가 급하게 필요한 경우는 아니었다.  때문에 오픽을 선택함에 있어 실질적으로 고려한 점은  아래의 딱 두 가지다.

 

 

① 대학생 할인을 받을 수 있다.

 

2019년 2월 기준으로 토스 77,000원 오픽 78,100원이다.

 

시험 시간은 토스 20분, 오픽 40분(오리엔테이션 제외)인데 한 시간도 안 되는 시험 시간에 8만 원 가까이 되는 돈을 써야 한다니..!₍o̴̶̷᷄﹏o̴̶̷̥᷅₎

 

응시료가 비싸니까 한 번에 시험을 잘 봐야겠다는 부담을 나도 모르게 느끼고 있었는데, 오픽은 할인이 된다.

 

대학생이라면 1년에 한번 오픽 시험 할인을 받을 수 있다는 꿀 정보!!ㅎㅎ

http://https://univ.opic.or.kr/opicb2b/login/showLoginView

 

위 링크로 접속하면 회원가입 후 할인된 가격인 66,000원에 시험 신청이 가능하다.

 

단, 꼭 재학생이어야 한다는 점!!! 대학연합으로 할인된 가격에 응시하고 싶다면 반드시 시험 당일에 규정 신분증과 재학 증명서를 제시해야 한다.

 

정말로 입실할 때 감독관님이 신분증과 재학 증명서 둘 다 확인하고 들여보내 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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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연합 평가라고 해서 시험 일시가 크게 제한되어 있는 것도 아니다.

 

오픽 일반 정규시험과 같이 시험평가일 / 시험장이 다양하기 때문에 대학생이라면 꼭 할인받고 시험 보시길!!

 

 

② 답변 제한 시간에 대한 부담이 적다.

 

토익 스피킹은 문제마다 정해진 시간 내에 답을 해야 하는 반면,

 

오픽은 문항당 제한 시간이 없다. 짧으면 1분, 자신 있는 문항에 대해서는 길게는 2분 30초까지 자유롭게 말할 수 있다.

 

오픽 시험시간 40분이 너무 길다는 후기도 많이 봤는데, 막상 시험을 보고 나니

 

1) 내 맘대로 시간 배분을 할 수 있기 때문에 부담이 적었고

 

2) 시험시간 40분을 다 채우지 않아도 퇴실할 수 있기 때문에

 

자유롭게 이야기하듯 시험 볼 수 있어서 좋았다.

 

그래도 개인 취향이니까 본인에게 맞는 대로,,!

 

나처럼 템플릿을 외워서 말하는 게 싫은 사람들은 오픽을 추천한다ㅎㅎ

 

2. 오픽 준비물, 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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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준비물: 규정 신분증(주민등록증/운전면허증/기간 만료 전의 여권 중 하나), 대학연합으로 신청한 경우 3개월 이내 발급한 국문 재학 증명서

 

- 신분증을 제외한 물건은 일체 꺼내 놓을 수 없으니 참고! 필기구 사용 금지 (물병은 허용해 주었음)

 

- 시험 시작 10분 전까지 입실 완료 (지각 시 입실 불가)

 

+ Tip: 물을 가져갈 수 있다면 중간중간 마시면서 말하면 좋다.






아프리카 여행 - 리빙스턴 박물관과 무쿠니부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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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빙스턴의 숙소 졸리보이의 새벽은 더없이 아름답게 시작되었다.


망고나무 아래에 만들어진 벤치에 앉아 새소리를 들으며 서서히 떠오르는 아프리카 태양을 맞는일은 아무때나 경험하는것은 아니다. 그만큼 평화로운 정경에 심리적으로 안정되었다는 뜻이다.

그곳에서 난생처름 당구를 쳐 보았다. 큣대(?)를 잡은 손이 엉성했지만 주방에서 일하는 흑인의 도움을 받아 나는 서서히 익숙해져갔다.

이곳 아프리카 사람들은 가는곳마다 거의 당구대를 설치해 놓는다. 음식점이나 술집 그리고 빽팩커스등 시장한 모퉁이에도 있어서 전 국민들이 당구를 즐겨치는것을 알 수 있다.

내가 당구치는 모습이 하도 엉성한 탓인지 주방에 있는 흑인 가족들은 모두 나를 쳐다보며 웃고 있었다.

우리의 생각으로  미개한 지역에 살고있는 아프리카 인들은 많은 불만을 품고 사는것 같지만 막상 그들을 가까이에서 보면 찡그리거나 불안해하거나 하는 어두운 표정을 짓지 않는다.


그들은 있는 그대로 자신과 현실을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인지 어쩌면 현실에 만족을 못하고 사는 우리들보다 더 훨씬 스스로 행복하다고 느끼며 사는듯한 느낌을  받는다.

 

우리들의 부질없는 욕심이야말로 행복의 적이라는것을 깨달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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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아프리카 소말리아어 단어 중에 '누로'라는 말이 있다. '직관'이라는 뜻이다.


알라의 선물이며 하늘의 선물이라고 생각하는 그 누로. 죽음에서 탈출한 동물이나 사람은 알라에게서 '누로'를 선물로 받는다. 
 

흰개미가 침으로 집을 짓는 것도, 도마뱀이 알을 깨고 나와 먹이를 찾아내는 것도 '누로'에  의해서라고 생각한다. 

 

총구가 막혀 있으면 방아쇠를 당겨도 총알이 나가지 못하듯 지혜의 통로,  사랑의 통로, 감성의 통로가 막혀 있으면 하늘이 쏘아보내 주는 '누로'도 나에게 꽂히지 않고 허공으로 비켜가기 때문에 그들은 늘 그 하늘의 선물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며 늘 비우고 행복한 일상을 맞는지도 모르겠다.

전날 미쳐 보지 못했던  리빙스톤 국립 박물관(Livingston Museum)을 찾았다.

 

입구에 커다란 동상과 비행기가 제일 먼저 눈에 띄었다.  입장료 5불 ..다양한 아프리카의 역사와 유물, 리빙스톤의 일대기가 사진으로 전시되어 있었다.
 

내전으로 인한 피폐한 상황과 원시시대 사용하던 도구들의 진화과정도 상세하게 보여 주었다. 이름이 알려진 것에 비하면 이 박물관은 그리 많은 자료가 있는편이 아니었다.

리빙스턴은(David Livingstone) 스코틀랜드 출신의 선교사이자 탐험가로, 빅토리아 폭포를 발견했다. 


선교 활동을 하며 잠베지 강 유역을 탐험하던 리빙스톤은 1855년 11월 현재의 잠비아와 짐바브웨 국경 부근에서 거대한 폭포를 발견하고 영국 여왕의 이름을 따  빅토리아 폭포(Victoria Falls)라고 명명했다. 


노예해방에 공헌했고 가난하고 병든 아프리카를 사랑한 위대한 선교사를 기념하기 위해  리빙스톤이라는 도시 이름을 쓰기 시작했다.

리빙스톤은 잠비아의 폭포를 보기위해 상당히 성시를 이룬 도시였으나 최근 짐바브웨에서 빅폴 라는 폭포옆의 도시를 개발함으로 더 훨씬 많은 관광객들이  빅폴을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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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쿠니 부락

탄자니아에 마사이 마을이 있다면 잠비아에는 전통적인 무쿠니 부족이 있었다. 무쿠니는 큰 나무를 뜻하고 추장이 관리를 한다.

 

마을에 도착하자마자 아이들이 한꺼번에 수십 명이 몰려들었다. 사탕과 초콜릿을 나눠주니 카메라 앞에서 스스로 멋진 포즈를 잡았다.

어린이들은 발랄했고 그동안 만났던 어떤 소녀들보다 더 맵시 있었다. 입성은 거칠었지만 순박한 눈빛과 밝게 웃는 모습이 예뻤다.

무쿠니 마을의 인구는 총 6천 여 명.

 

마을 전체가 둥근 지붕의 갈대 잎으로 만들어 우리나라의 한옥처럼 단아한 인상이었다. 담장이 없는 집은 독신자의 집이며 옛날 양반집을 찾아가면 열두 대문을 거치듯 이곳도  추장을 만나기전에는 여러 가지 절차를 거쳐야 했다.


큰 나무를 중심으로 많은 사람들이 모여 악기를 연주하고 경기를 하면서 다양한 놀이를 통해 평화스러운 모습을 하고 있었다.

집의 구조는 마사이 마을에서 보았던 것과 비슷한 형태였고  여전히 입구는 좁고 방안은 어두컴컴했지만 유독 깨끗한 마을 이미지가 선명하게 남았다

이곳은 관광객들을 위해 마을을 조성한듯한 느낌을 주는곳이다. 마사이족 부락도  마찬가지다. 우리나라의 용인의 민속촌처럼 전시용으로 대부분의 흑인들이 사진찍는것을 거부하지만 이 마을은 아이들부터가 적극적인 자세로 포즈를 잡는 편이다.

외부인들이 많이 방문하는 만큼 선진화 되어있고 한번 마을을 구경하는데 미화로 5달러나 된다 우리일행 30여명이 한꺼번에 돌아보면 그 돈도 만만치 않다.

 

무쿠니에 더 많은 사람들이 찾는 이유라면 차로 10분거리에 폭포가 있고 그 마을의 높은곳에서 보면 빅토리아 폭포에서 쏟아져 나오는 물안개가 보일 정도다. 






아프리카 여행 - 카피리음포시에서 루사카까지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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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시간만에 카피리음포시역에 도착했다. 신선한 바람이 제일먼저 인사했다. 기차에서 미쳐 비자를 발급받지 못한 분들은 줄을 서서 먼저 비자신청이 먼저였다.

비자신청비 50불,화장실을 가려고 찾으니 없다.


자물쇠로 굳게 닫혀진 화장실을 찾아 들어가보니 엄청 깔끔하기는 한데 제사를 지내는 제단처럼
높은곳에 설치해 놓고 계단을 올라가야만 볼일을 보게  만들어놓 았다.

가는곳마다 아무튼 화장실이 다채롭기 그지없었다.

아프리카의 교통수단은 대체적으로 미니봉고다. 두대의 봉고로 나눠타고 루사카로 출발했으나 두어 시간이면 도착한다는 루사카는 가도가도 끝이 없었다.

중간에 교통순경에게 걸려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 했다. 봉고에 짐을 너무 많이 실었다는것,일행중 누군가 자신들의 사진을 찍었다는것. 코에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다.

일행들은 모두 봉고에서 내려 폴리스 오피스에 가서 여권을 보여주며 일일히 검문당하고 한분은 직접 왜 사진을 찍었는가 진술서까지 쓰고나서야 해방될 수가 있었다.

정작 사진을 찍은 사람은 따로 있었는데 마침 그 장본인은 천만다행으로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으나 엉뚱한 사람이 봉변을 당했다.

이런 저런 이유로 2박3일 지친 심신은 더욱 더 지치고 세명이 앉아야 할 의자를 네명이 앉도록 개조한 봉고의자가 너무나 불편해서 숨이 막힐 지경이고 온 몸이 뒤틀릴 지경...

그렇게 힘든 상황에도 티없이 맑고 푸른 하늘에 하얀 솜을 뜯어 붙인듯한 흰구름과 지평선 너머까지 푸르른 들판의  나무와 끝없이 펼쳐진 옥수수나무, 하얗게 꽃이 핀 감자꽃등 밖의 풍경이 아름다우니 그나마 위로가 되는 상황.

잠시 화장실을 가기위해 정차를 해서 보니 내 키보다 더 큰 옥수수 밭 사이에 만들어진 미니 화장실 옆에는 옹기종기 어린아이들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우리들의 일거수 일투족을 쫒았다.

오래된 펌프를 그곳에서 보았다.  우리가 품어대면 물이 안솟던 그 펌프에서 현지인이 손대자마자
물이 폭포처럼 쏟아져 내려왔다. 거리엔 나무와 나무사이 빨래줄같은것을 만들어 놓고 고기를 걸어놓고 팔고 있었다.

어디를 가나 옥수수찐것이나 과일등을 파는 아녀자들이 달려들어 금방 우리 주변에는  현지인들이 가득했고 잘 사면 마켓보다 더 훨씬 물건이 싸고 싱싱한것들도 많이 있었다.

일행중 모 사장님은 내릴때마다 아프리카 여인들의 인기를 독점했다. 왜냐면 무엇이든 사다가 일행들을 나눠주느라고 펑펑 돈을 썼으니 인기만점일 수밖에...

영원히 도착하지 않을 것 같은  루사카 숙소 '차차차'에 도착했다. 루사카는 마을의 추장이름에서 유래되었고 유럽에서 온  이주자에 의해서 루사카라는 지명이 붙게 되었다고한다.

게스트하우스 차차차는 상당히 세련된 도외지 풍이었다.

 

가운데 수영장까지 갖춰져 있었고 입구엔 술과 음식을 파는 레스토랑이  있었지만 가격이 비싸서 우리같은 배낭 여행객들이 이용하기엔 너무 부르조아틱하다.

우루루시내 중앙마켓을 구경하기 위해 짐을 놓자마자 걷기 시작했다. 거리엔 도외지풍의 세련되고 아름다운 여성들의 의상부터 헤어스타일까지 모두가 여직 보아온 아프리카식이 아니었다.

큰 거리의 울창한 나무들부터 쉴사이 없이 오가는 자동차의 행렬속에서는 더이상 박달나무를 들고 다니는 마사이족 같은 부족을 연상할 수가 없었다.

우리일행은 일단 보면 실망할 것이라는 박물관을 제쳐두고 중앙마켓까지 씩씩하게 행진을 했다.

엘지라는 우리나라 상표가걸린것만 보아도 기분 좋았고 특히 재잠비아 한인회 사무소라는 글자를 보았을때는  아무볼일도 없으면서 반가운 마음 하나도 불쑥 문을 열고 들어갔다.

조국을 떠나 머나먼 타지에서 한국인들이 정착하여 뿌리내리고 산다는것을 생각하면 가슴이 뜨거워진다

얼마나걸었을까?

중앙 마켓 가까이 다가가자 수많은 남자들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우리를 주시하기 시작했고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말대로 거의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며 기어코 센트럴마켓을 찾기는 했으나..

마켓 사이사이엔 각자 개성있는 음악들을 대단히 커다란 볼륨으로 틀어 놓아 온통 마켓은 소음덩어리였다. 협소한 상점들 가운데를 통과하는데 식은땀이 흐를만큼 긴장시키는 눈빛들 휘파람소리들...

겨우 끝까지 가서보니 거리엔 잡다한 야채와 과일들을 파는 사람들과 당구를 치는 젊은이들이 일시에 우리들에게 시선을 집중하고 금방 우리들을 둥그렇게 둘러싸 두려움에 떨며 되돌아 와야 했다.

눈빛이 몹시 거칠었다.

서둘러 아무것도 사지 못하고  이마트같은 큰 쇼핑몰에 갔다. 그동안 지나왔던 탄자니아에서는 상상도  할 수없는 풍경이었다. 흑인들이 카터를 끌고 유유히 쇼핑하는 모습은 조금전 거리에서 만난 부랑자같은 사람들과는 확연히 틀렸다. 세련된 여성들이 많았다. 

진열대에는 엄청나게 많은 물건이 쌓여있 었다. 우리는 쌀중에서 가장 비싼 일본의 스시쌀을 샀다.
일킬로에 우리돈 1만5천원정도. 그곳에서는 물건을 사면 반드시 영수증을 들고 나와야 
입구에서 지키는 경찰이 물품과 영수증을 대조하고서 밖으로 내 보내준다.

나는 그곳에서 어린아이 사진을 찍는다고 친구한테 된통 한방을 맞았다. 무지막지하게 성질을 내고 있었다. 아프리카 사람들은 아무나 카메라를 들이대면  화를 당한다는거다. 나는 그 아기의 엄마에게 이미 허락을 얻어낸 상태였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모르는 친구가  기기막혀서 말이 안나와 눈을 꼭 감고 입을 다물었다.
 

다른 일행들이 있어서 차마  내 성질을 다 피울수가 없었지만 갈수록 예민한 친구에 대해 언젠가
일침을 놓겠다는 생각을 했다.

숙소로 돌아오자 좋지않은 소식이 기다리고 있었다. 일행중 젊은이들중 하나가 교통사고가 나서 병원에 입원했다는 소식이다

가해자는 현지 병원의 닥터로 사고가 나자마자 일행들은 그자리에서 자동차넘버 사진을 찍고 운전자 사진을 찍어 꼼짝도 못하게 한 다음 경찰을 불러온 다음 병원으로 옮겨졌다한다.

그야말로 똑똑한 한국인이다.

 

외국에서 특히 후진국에서 사고가 나면 무조건 제나라 편을 들어 치료비도 받기가 힘들다는것이 일행들의 반응이다.

병문안을 다녀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어마어마하게 큰 병원, 병원안의 응급실만 찾는데 거의 이십여분 이상을 걸어야 할 정도라 하니 나의 상상력으로는 잘 그림이 안그려졌다. 이 후진 아프리카에도 그렇게 의료시설을  잘 해놓았다는것이 믿어지지가 않았다.

불행중 다행으로 그녀는 바로 퇴원을 했고 우리들은 열명이서 한 방을 쓰는 도미토리에서 잠시잠깐 눈을 붙였다.

삶은 선택의 연속이다. 인간은 자신의 의지에 따라 선택을 하게되고  그 선택에 대한 책임을 지게 된다. 엘리자베스 퀴블로 로스 박사는 그의 자서전 '생의 수레바퀴'에서  “신이 우리에게 준 가장 큰 선물은 자유의지“라고 말한다. 

 

그 자유의지에 따라 인간들은 자기의 삶을 만들어 간다. 

 

http://www.parangse.kr/   송선순






아프리카 여행 - 루사카서 리빙스턴으로

감기 기운으로 일찍 잠자리에 든 탓인지 새벽 네시에 눈을 떴다
 

잠비아는 그동안 머물던 탄자니아보다 한시간 더 늦어 우리나라보다 일곱시간이 늦는 편이다.

잠비아의 수도이며 남쪽 지방의 역사적인 식민도시 루사카에서 첫 밤을 보냈다.도미토리 차차차는 깔끔하고 뜨거운 물이 콸콜 잘 쏟아져 만족스러웠다.

 

설사 8인실이라 해도 불과 물이 풍부하면 이젠 그야말로 퍼펙트한 만족이라는것을 깨닫게 되었다
잔지바르와 능기비치의 전력난으로 시간제로 불이 켜졌던때를 생각하면 황송하기 그지없다.

 

물도 졸졸 나오다 말고 머리감으려면 비누칠해 놓고서 한삼분 이상  기다리다가 또다시 조금 나오면 마무리하기까지 열번은 기다려야 할 상황이었으니..어찌 감지덕지 하지 않을까..

루사카는 1930년대 까지만 해도 그저 농사나 짓는 촌락이었다.  1931년 리빙스톤에서 이 곳으로 수도를 옮긴 후 북 로디지아의 수도가 되었으며,  1964년 독립을 하면서 잠비아의 수도가 되었다 잠비아는 세계적인 구리의 생산국이다.

영국의 지배를 받아 현지인들은 채굴 노동자로 일했을 뿐이다.  게다가 독립 후 독재정치와 부정부패로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중 하나가 되었다

 

잠비아는 주민의 80%가 하루 1달러 미만으로 살아가는 세계에서 가난한 나라 중 한 나라다. 

수도인 루사카는 잠비아 최대의 도시이지만 역사가 오래되지 않고 볼 거리도 그다지 많지 않다.  그러나 많은 여행자들이 이 곳에 들르는 이유는 빅토리아 폭포가 있는  국경도시 리빙스톤으로 가기 위해서 중간 기착점이기 때문이다. 

루사카도 케냐의 나이로비처럼 고도 1300m에 자리 잡은 고원도시이기 때문에 선선하다.  도시 이름은 마을의 추장이었던 루사카에 유래되었고 시내 동쪽으로 자리잡은 신시가지는 미국에 온 듯한 느낌이 들 정도다.

별이 총총이 뜬 루사카의 새벽은 고요하고 맑은 바람이 기분좋게 했다.  공동으로 사용하는 화장실과 샤워실 키친등은 저녁내내 환하게 불을  켜 놓는지 전혀 무섭지 않았다.

 

이쪽 사람들도 흑인들을 두려워하는지 철처히 입구를 지키고 하루종일 문을 봉쇄해 놓고 있었다.

점심 도시락 쌀주먹밥 재료를 준비해 놓고 컴에 자료를 흟어보니 여행 칠일째 팔일째 썼던 모시서 다르에스살람으로 가는 길과 다르에스살람에서 잔지바르에서 보낸 첫밤의 여행기가 빠져 있음을 그때서야 깨닫게 되었다.

작업하다 불이 나가 완전히 확인을 다시 하지 못하고 유에스비를  김양재씨편에 보낸것이 문제였다.

큰일이었다. 능기비치것만 기사를 보내고 그 이전것이 없으니 어떻게 할 도리가 없어 편집장께 문자를 여러번 보내 다음달에 기사를 올리는것으로 마무리했다.

 

마음이 불편했다. 그냥 전기불탓만 할것이 아니고 조금 더 완벽하게 꾸렸어야 했는데...

동이트자 한사람 두사람 주방으로 몰려 들었다. 루사카로 7시간동안 버스를 타야 한다니 주먹밥을 만들고 일행들이 가져온 라면으로  현지에서 사온 라이스를 넣어 짬밥을 만들어 드렸더니 굉장히 만족한 아침이었다는 칭찬을 들었다.

상당히 세련된 도외지 풍의 루사카를 돌아보고  역사적인 콜로니얼 도시, 로디지아(잠비아의 옛 이름)의 수도였던 리빙스톤으로 다시 떠날 준비를 했다. 끊임없이 떠나는 것에 길들여진 우리들의 가슴속에는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동경으로 가득했다.

아프리카 곳곳을 달리다 보면 이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자주 느낀다. 그만큼 광활하고 드넓다. 
순도 높은 청량감이 어떤 것인지를 확실히 깨닫게 하는 하늘을 보며 아프리카의 하늘을 꼭 한국으로 가지고 가고 싶을 만큼 유혹하고 있었다.

루사카인터시티 버스터미널은 인산인해 그야말로 국제적인 버스행렬탓인지  다양한 사람들이 즐비했고 대도시답게 여성들의 헤어스타일이 멋졌다.

단순히 머리를 땋는 사람만 있는것이 아니라 파마머리와 생머리 멋장이들이 많았다.

아홉시반 리빙스톤행 국제버스에 짐을 싣고 버스에 올라탔으나 언제 왔는지 미리 타고 있던 수많은 현지인들이 좋은 자리를 다 차지하여 우리는 맨 뒷쪽 자리에 줄줄이 앉에 되었다.

7만콰차 우리나라 돈으로 2만원정도 되는 돈이다 .버스는 생각보다 편안했으나 타자마자 어느 선교사인지 목사인지 한동안 영어로 설교를 하고 기도를 하고 아멘할렐루야를 외치며 내려갔다.

의자가 안락해서 독서를 해 보려고 책을 폈으나 뜻하지 않은 복병으로 일곱시간 내내 골머리를 앓아야했다. 머리위에 달린 브라운관에서 시스터엑트에 나오는 합창단들이 춤과 노래를 하는데 주로 성경을 리메이크한곧들이었는데 어찌나 큰 볼륨으로 우리 귀를 괴롭히는지 환장하게 만들었다.

볼륨을 낮춰 달라는 요청을 해도 들은척도 안하고 창가엔 커튼도 없이 강렬한 아프리카 태양과 찢어질듯 귀를 괴롭히는 노래소리를 들으며 일곱시간을 달렸으니 상상해 보라.

비행기 안에서 준 귀마개와 휴지를 틀어막아도 그 소음으로 부터 완전히 해방될 수가 없었던 순간이다.

중간 휴게실에서 또한 잊지못할 해프닝이 있었다. 화장실을 가려면 1000콰차(우리돈 300원) 정도를 내야 한다해서  마침 친구에게 1000콰차를 달라해서 주고 들어가 볼일을 보고 나오니 내 손에 두툼한 지폐를 열장정도 쥐어주는것이었다.

의아해서 그 잔돈을 받아들고 친구에게 내미니 친구가 깔깔거리며 자기는 천콰차라고 생각하고 주었는데 아무래도 만콰차짜리를 준 모양이라며 낄낄거렸다.

그렇다면 화장실 한번 사용하는데 5천콰차를 낸것이다. 우리나라 돈 1500원. 어쩐지 화장실이 깔끔하더라 했더니 완전 바가지를 쓰고 말았다.

겨우겨우  일곱시간을 견디다 리빙스톤에 도착했다.

현지시간 오후 5시를 넘기고 있었다. 오자마자 들르려고 마음먹었던  리빙스턴 박물관은 이미 클로즈. 할수없이 다음날 아침 8시에 오픈한다고 하니 갈 수 밖에 없었다.

우리 리빙스톤의 숙소


졸리보이스
 

Jollysboys-졸리스는 프랑스어로 즐겁다는 뜻

기나긴 버스 여행의 피로를 한 방에 날릴 수 있는 평화로운 정취가 한눈에 들어왔다. 유유히 수영하고 있는 젊은 외국인들과 인도풍으로 꾸며놓은 리셉션장 너무나 마음이 놓였다.

 

우리일행 31명이 들어갈 방을 배정했다 우리여자들은 무려 16명이 쓰는 도미토리가 배정되었지만 그래도 행복했다.

서둘러 기차안에서 부터 입었던 옷을 빨아 널어놓고 수영장앞에서 글을 쓰는 나는 모처럼 여유롭고 행복한 웃음을  웃을 수 있었다.

여행이란 이런것이 아닐까.. 목이 아파서 맥주는 못마시지만 그래도 이아름다운 정원의 숙소에서
좋은 분들과 어울려 함께 식사를 할 수 있다는것 옆에 초은이 언니가 저녁을 준비하고 유선생은 열심히 서빙을 하고 있다.

아프리카에서 머물렀던 백펙커스중 가장 낭만적인 숙소였다. 졸리보이엔 수없이 많은 망고나무가 있었는데 한바퀴 그 나무밑을 돌고나면 한소쿠리씩 망고를 주어올 수 있어 질리도록 망고로 실컷 배를 채웠다.

*
리빙스턴여행까지 뒤돌아 보면 이번 아프리카 여행의 장점과 단점을 적어보자.

 

여행사-인도로 가는길

한달 아프리카 여행치고는 경비가 싸다는것,600만원. 싼 이유를 절실히 깨달았다.

다에르 살람서 기차를 타고 카피리 음포시역에 내리기까지 총 43시간. 그곳에서 다시 루카스까지 세시간 이상을 버스로 달렸고 다음날 루카스서 리빙스톤까지 일곱시간 이상을 달렸다.

그렇다면 빅토리아 폭포를 보기 위해 우리가 거리에서 보낸 시간을 총 합산해 보면 5박6일정도가 된다


다르에스 살람서 바로 리빙스톤까지 오는 버스나 비행기는 없었는가?

다르에스 살람서 카피리음포시까지 기차로는 43시간이지만 버스로는 24시간이면 되었다는데 버스를 선택했다면 시간 절약을 할 수 있었지 않았을까?

 

몹시 지루하고 불편한 미니봉고를 오래 타는것은 그야말로 지옥이다.

 

http://www.parangse.kr/ 송선순






아프리카 여행 - 응고롱고로 분화구에 가다.





사파리 마지막 밤 


해발 2천2백고지의 심바 캠프장은 무진장 추웠다
 

대부분 저녁 내내 추위에 떨다 일어나 꼭두새벽부터 뜨거운 차에 몸을 녹였다.

수백 년 된 무화과나무를 중심으로 쳐진 텐트들은 동이 트자 하나씩 윤곽을 나타냈다. 무화과나무는 아프리카 인들이 대단히 신성시 하는 나무라고 했다.

아침 아홉시에 문을 여는 응고롱고로 분화구 안으로 들어가는 날이라서 분주했다.  심바 캠프장에는 세계 각지에서 온 사파리 차량들이 벌떼처럼 모여 천장의 뚜껑을 열고 사파리를 떠날 짐을 꾸리고 있었다.

응고롱고로는 현지의 말로 '거대한 구멍'을 의미한다.
 

수백만 년 전 이곳의 화산이 폭발할 때 용암은 흘러내리고, 화산재는 세렝게티를 덮었다. 용암이 빠져나간 산의 윗부분은 그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내려앉고 말았다. 내려앉은 타원형의 분화구는 동서 19㎞, 남북 16㎞나 된다. 분화구 속을 사파리 하는 데도 3~4시간 걸린다. 참으로 넓다. 분화구의 바닥은 해발 1700m이고, 분화구를 감싸고 있는 화구의 높이는 2200~2300m나 된다.

응고롱고로 분화구는 동서로 19km, 남북으로 16㎞인 거대한 구역에 자리 잡은 동물의 요람으로 떠나기 전부터 설레기 시작했다.

입구에는 벌써부터 마사이족들이 직접 만든 목걸이를 팔기위해 벌떼처럼 몰려들었고 아침안개가 걷히지 않은 분화구를 내려다보며 서서히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산비탈을 따라 600m 깊이의 분화구로 들어가는 길은 급경사라 스릴이 있다. 동물들은 인근 세링게티 초원에서 병풍같이 둘러쳐진 능을 수시로 넘나든다고 했다.

분화구에 내려가니 그곳은 천국이었다. 그곳은 아프리카라고 하기엔 적절하지 않는 곳이었다.

특별한 신의 은총을 받은 자 만이 살 수 있을 것 같은 별천지. 끝없는 초록의 평원에 유유히 풀을 뜯고 있는 동물들의 모습은 적자생존이라는 엄청난 단어조차도 그곳에서는 잊어버려도 되는 낙원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맑은 하늘에 동동 떠 있는 구름. 초록의 향연, 각양각색의 동물들이 한가로이 노니는 그 곳은 하얀 먼지를 일으키며 달려오는 랜드로바의  시동소리 조차도 음악으로 들리는지 자동차가 옆에 와도 어느 동물하나 움직이며 도망가지 않고  여유 있게 풀을 뜯고 있었다.

왜 사파리가 아프리카 여행의 진수인지를 깨닫게 하는 순간이었다.

이렇게 응고롱고로의 동물들처럼 자신을 자유롭게 놓아주어야한다. 놓아줌은 자신과 마음속에 자라고 있는 대상에  대한 사랑을 의미한다.  놓아준다는 것은 기다리는 은총이 올 수 있도록 자신과 인생에  자유를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종일 세링게티 공원을 덜덜거리는 차를 타고 헤매며'빅5'를 보기위해 바삐 움직였으나 그곳에서는 다들 여유롭게 날 보아 달라는 듯  사자, 코끼리, 코뿔소, 버펄로 등이 유유자적 머물고 있었다.(빅5- 표범  사자, 코끼리, 코뿔소, 버펄로로  크기도 하고 사냥이 어렵고 값나가는 동물이라 붙여진 별명)  

아프리카 여행의 진수를 다 맛본 것과 같다고 말하던 일행 한분은 남은 기간은 그야말로 덤이라고 덧붙였다. 그만큼 응고롱고로가 주는 의미는 컸다.

그런데 홍학은 어디 있는 것일까?
 

영화 '아웃 어브 아프리카'에서 카렌과 데니스가 경비행기를 타고  하늘을 오를 때 그 뒤를 따르던 수많은 홍학들이 저기 저 먼 먼 호수에서 물을 먹고 있었다. 우리들을 위해 한번쯤 날라주면 더욱 더 판타스틱 했을 터인데 그들은 호수위에서 유유히 자신의 삶을 관조하며 즐기고 있었다.

내가 카렌이 아니듯 그들 또한 영화 속의 홍학이 아니려니....

글쓴이 송선순         http://www.parangse.kr/
 






아프리카 여행 - 세링게티 초원을 달리다.






셋째 날-1월 2일 세링게티로 투어 가는 날 2박3일.

너무 청명하고 맑고 고요한 아루샤의 아침. 아프리카에서의 세 번째 아침이 밝아온다. 이곳도 이슬람교가 많은지 새벽 다섯 시가 되니  어김없이 기도소리가 울려 퍼졌다.

2박3일의 사파리를 떠나는 날이다.

세렝게티 국립공원에서 사파리, 마지막 날 응고롱고로 분화구 속을 둘러보고 마사이 마을을 돌아오는 일정이다. 사파리의 가격은 천차만별이지만 우리들은 450불 미국 달러로 결제를 했다.  어마어마한 액수다.

'사파리'는 스와힐리어로 '여행'을 뜻하는 말이다.
 

길이 험해 자주 모래구덩이에 빠지기 때문에 사파리용으로 개조한  4륜 구동 지프, 랜드로바를 타야한다 그 자동차는 천장에 뚜껑이 달려 있어 사파리를 할 때에는 지붕을 열어  맹수들을 더 잘 볼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다.  


호텔에서 제공하는 아침을 먹고 세링게티로 사파리를 떠날 간단한 짐을 꾸렸다 . 큰 짐은 호텔에 맡기고 초원에서 머물 2박3일간의 간단한 짐만  배낭에 꾸려 총 다섯 대의 랜드로바에 나눠 타고 오전 10시 호텔을 출발했다.

우리 차에 오른 멤버들은 60대 가까운 여성들과 20대,40중반의 남자 선생님 한분이 함께 하여 보디가드 역할을 해 주셨다.

덜컹거리는 랜드로바는 굽이굽이 계곡을 넘어 응고롱고로 입구에서 멈췄다. 수도 없이 많은 원숭이 떼들이 우리를 기다렸다는 듯이 나타났다. 한 외국인 어린아이가 들고 있던 사탕봉지를 그대로 낚아채 나무위로 도망가는 그 원숭이의 이름은 사납기로 소문난 바분이었다.

아이까지 배에 안고 동료들에게 뺏기지 않으려고 사력을 다해 도망가면서도 기가 막힌 솜씨로 사탕껍질을 벗겨 껍질만 나무 밑으로 내려 보내는 것이 한두 번 강탈해 본 솜씨가 아니었다.

뺏고 빼앗기는 생존의 광경은 한동안 볼거리를 제공했고 응고롱고로 공원의 허가증을 받는데 걸리는 기다림의 지루함을 잊게 해 주었다

'지상 최고의 동물 왕국, 세렝게티'는 마사이 말로 '끝없는 평원'이라는 뜻이다. 300만~400만 년 전에 형성된 이 평원은 약 1만4천800㎢로  300만 마리의 동물과  독수리와 황새 등 350여종의 조류가 어울려 살고 있는 지상에서 가장 오래된 생태계중 하나다.

1951년 탄자니아 정부가 99년간 마사이족의 땅인 세렝게티를 빌리기로 하고 국립공원으로 지정한 이후 마사이족의 삶은 변화하기 시작했다. 동물보호 등의 이유로 더 이상의 사냥이 불가능해졌기 때문이다.

꿈틀대는 야성을 숨죽여 지켜보는 사파리 여행. 아프리카 여행의 백미는 역시 사파리리라고 한다. 대자연을 호흡하며 생명의 외경을 깨닫는 여행이 시작되었다.

세렝게티로 가는 길에는 창과 활을 멘 마사이족이 수백 마리의 양과 소떼들을 몰고 있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었다. 그들은 주로 진한 색깔의 보자기를 두르고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치렁치렁 울긋불긋하게 치장했다.

가도 가도 끝없이 펼쳐진 세링게티 초원이 펼쳐지고 있었다. 아프리카에서도 열대우림과 사막의 사이에 분포하는  사바나(아열대 초원)는 풍부한 먹이와 알맞은 기온 및 습도로  수만 종이 모여 사는 동물의 파라다이스다.

망망대해처럼 펼쳐진 거대한 초원을 종횡무진하며 때 묻지 않은 대자연을 체험한다는 것은 아주 특별한 경험이다. 제일 먼저 우리를 반기는 것은 귀엽기 그지없는 톰슨가젤이었다. 작은 사슴같이 생긴 톰슨가젤은 귀엽게 꼬리를 흔드는 것이 제일 인상적이다

주로 톰슨가젤은 얼룩말과 누와 함께 풀을 뜨고 있는 모습을 자주 보게 되는데  같은 종이 아님에도 무리가 함께 어울릴 수 있는 것은 먹는 풀의 종류가 다를 뿐 아니라   색맹인 누와 후각이 안 좋은 얼룩말이 맹수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한 전략적 동거인 셈이라고 한다.

처음 본 못생긴 누는  소의 뿔과 염소의 수염, 말의 꼬리를 조합한 것 같은 외모 때문에 동물계의 프랑케슈타인으로 불린다.

끝없는 초록의 평원을 달리며 사자를 보았고 어슬렁거리며 나타난 표범을 보며 소리쳤고  키가 큰 기린이 풀을 뜯는 모습을 보며 그 긴 목을 어떻게 하고서 먹는지를 궁금해 하며 감탄에 감탄의 소리를 질러대며 초원위에 머물렀다.

이렇게 우리 삶은 마음에도 이따금 환기가 필요하다. 굳게 닫힌 일상의 창을 열고 새로운 공기를 마시기 위해 여행을 떠나야 하고 푸른 초원의 정기를  마셔야 한다.

아프리카는 사람만 검은 것이 아니라 세링게티에 흐르는 강물조차도 검고 누런 흙탕물이었다. 그 안에는 악어가 있고 거대한 하마가 푸푸 하며 숨을 쉴 때마다 분수처럼 원을 그리는 풍경을 보며 어린애처럼 좋아하는
모습들은 나이를 초월한 순수 그대로였다.

첫날 세링게티에서의 켐프는 불도 들어오지 않는 곳이었다. 캄캄한 곳에서 차려주는 저녁상을 기다리다 메인디쉬가 나오기도 전에 잠에 골아 떨어졌으나 스파게티 맛이 일품이었다는 소리를 그 다음날에서야 듣게 되었다.

이른 새벽에 일어나서  하늘의 별들이 바로 가슴까지 와 닿는 크고 반짝이는 별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렇게 첫 밤을 보내고 다시 초원을 향해 길을 나서던 우리 일행의 자동차가 수렁에  30여분 이상 차를 밀고 당기느라 출발이 늦어졌다.

자동차가 낡은 탓인지 펑크는 왜 그리 자주 나는지 세링게티 공원의 휴게실에서 다른 차가 오길 기다리느라 한 시간도 더 넘게 보낸 것을 시작으로 크고 작은 사고가 빈번히 일어나는 중고 랜드로바의 경험은 아프리카 여행의 필수라고 하는 말을 실감하게 했다.

질리도록 뛰어노는 동물들도 심드렁해 질 즈음 우리들은 마사이 마을로 갔다.

사파리에 대한 팁.

늘 세링게티에 동물들이 많은 것은 아니다. 건기가 시작되면 동물들은 케냐의 마시이마라 공원으로 대 이동을 하게 된다. 우리 인간에게는 국경을 넘는것이지만 동물에게는 먹이가 풍부한 우기를  찾아 이동을 하게 되는데 주로 12월부터는 세링게티,6월부터는 케냐의 마사이 마라에서 사파리를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세링게티는 주로 가이드들이 야생동물을 찾아 정해진 길을 벗어나지 않아 자연을 훼손하지 않아 아직도 자연그대로 보존되어 있지만 마사이마라는 동물을 찾아 경계 없이..

 

글쓴이 송선순     

 http://www.parangs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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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全炫仲 03.18 17:48
    보기에는 저래도 아랬쪽 풀숲에 뱁이 많을것 같은 예감이...ㅎㅎ.
    글을 읽는 자체만으로도 아프리카에 대한 궁굼증이 많이 해소되네요.감사합니다^^



아프리카 여행 - 나이로비에서 아루샤 가는 날






길고 멀고 험한 길이었다.


케냐의 나이로비에서 탄자니아의 아루샤 가는 길은 비포장도로에 덜컹거리는 수준이 온 전신을 마비시킬 만큼 충격이 심했다.

 또한 덜컹거릴 때마다 자동차에선 이상한 소리가 나  언제 어떻게 멈추게 될지 도무지 불안한 느낌을 벗어날 수가 없었다.

두 대의 자동차로 나눠 탄 일행은 아프리카의 모든 먼지란 먼지를 다 뒤집어쓰고 아루샤에 일곱 시간 만에 도착했다.

아루샤는 녹지대였다. 킬리만자로와 세링게티 사파리를 가기 위한 중간 기착지로
아름드리 망고나무에 주렁주렁 망고가 달린 모습, 푸른 잔디. 첫 이미지는 풍요 그 자체에 향긋한 전원의 나무 냄새가 기분 좋게 했다.

아루샤까지 오는데 더욱 더 시간을 지체하게 만든 것은 케냐와 탄자니아 국경, 나망가에서 너무 많은 시간을 할애한 탓이다..두 대의 봉고차로 나눠 탄 일행 중 우리를 안내하는 길잡이가 타고 오는 차량이 너무 늦게 오는 바람에 비자를 신청하는데 트레블이냐  트랜짓이냐를 선택하는 것에 골머리를 앓았다.

트랜짓은 30불 트레블은 50불이라는 탄자니아 비자비를  어떤 것으로 주어야 하는지.. 그곳에서 만난 한국인 여자 선교사는 탄자니아 13일 머물 거라면 14일까지는 트랜짓로 할 수 있으니 30불이 맞는다고 하는 통에 아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하지만 사무실의 직원들은 완강히 50불의 비자 비를 내야 한다고 승강이 하는 통에  우리의 길잡이를 40여분 이상 기다렸으나  늦게 도착한 길잡이 또한 50불의 트래블로 해서 비자 비를 내야 한다고 했다.

케냐의 국경을 넘어 탄자니아로 걸어오는 30여 미터를자동차에서 내려 모두 걸어서 들어와야 하는데 그 사이 우리 일행 중의  한 사람이 흑인에게 여권을 뺏겼으나 다행히 다시 찾아 한숨 돌렸다.

거의 같은 시간에 탄자니아 국경을 출발했건만  우리와 다른 차를 탄 일행들이 너무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한 시간 이상 망고나무 아래에서 여행의 대 선배들이 경험했던 세계여행 이야기를  경청할 수 있었다.

60을 넘긴 두 분은 평범한 주부지만 틈만 나면 여행을 떠난다는 여행 마니아였다.
중학교 때부터 김찬삼 여행기를 접한 이후 여행 자유화 되면서부터 떠났으니 여행구력 최소 20년 이상 되는 분들이었다.

주로 자유여행을 즐기던 두 사람은 여행지에서 만나 여행 반려자가 되어 그리스와 그외 중남미등 배낭여행의 다양한 경험을 들려주어 나의 배낭여행 구력4년은 그야말로 완전 초년생임을 잘 일깨워 주었다.

참, 아름다운 삶이었다. 인생을 살면서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산다는 것만큼 복된 삶도 없을 것이다.

아루샤의 숙소는 부루조아틱했다. 아루샤 투어리스트인. 부산의 조선호텔만큼이나 푹신한 이불에 어느 교수가 말한 대로 흰색에서는 모든 것을 더 잘하게 만든다는
뽀얀 이부자리에 깔끔한 초현대식의 화장실. 삼성 티비, 공주풍의 흰색 모기장까지 쳐져있었다.

하지만 전력이 모자라는지 형광불빛이 너무 약해 책의 활자를 구분 할 수가 없는 것이 치명적인 약점이었다.

방 배정을 마치고 환전을 친구가 했다.1달러1400실링. 정월 초하루라서 모든 가게들이 다 문을 닫아 과일이고 뭐 간단히 살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할 수 없이 일행들과 함께 스낵바를 찾아가 간단히 저녁식사를 하자고 제안 우르르…….몰려 슈퍼에 들러 케냐맥주 트로커를 샀다.

그리고 가는 길에 우리 일행 중 젊은 미모의 아가씨가 강도를 당했다. 어깨에 멘 미니 가방을 탈취 당했다. 거의 순식간에 이루어 진 일이다. 길을 걷고 있는데 무작정 달려들어 낚아 챈 다음 사라져버려 가장 중요한 여권을 잃어버렸다. 얼마나 무서운 도시인지 경종을 울린 사건이다.

스낵바에서 간단히 햄버거를 시켜서 먹는 둥 마는 둥. 우리들의 저녁을 우울하게 만들었다. 슈퍼에서 산 맥주 세병을 호텔 베란다에 앉아 일행들과 함께 나눠 먹으며 다양한 인생의 면면을 엿 보았다.

주로 선생님들인 여행팀원들은 '상상해온 삶'의 밑그림을 실천하는 이번 아프리카 여행의 설렘을  가감 없이 표현하고 있었다.

인생이란 너무 눈부시게 살 필요는 없다.
 

오히려 눈에 잘 뜨이지 않지만 내용이 들어 있는 삶을 살아가면 되는 것이다. 그것은 결단코 남과의 비교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느끼고 스스로 만족하며 빛을 만들며 사는 것이   아름다운 삶을 사는 것이라던 책의 한 구절이 떠오르던 대화들이었다.

어둠이 점점 깊어지자 내일 세링게티로 떠날 2박3일 사파리에 대한 설렘을 안고 잠자리에 들었다.

아루샤-150불 바꿈 1불 1300실링


지출
450불씩 세링게티 2박3일 투어비
저녁식사-햄버거 2900 스프 2900
맥주 투르커 슈퍼서 3병-4500실링

글쓴이 송선순      http://www.parangse.kr/






아프리카 여행 - 타자라 열차를 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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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일-여행 14~16일째 

여행은 지도가 정확한지 대조하러 가는 게 아니다. 곳곳에 숨어있는 비밀스러운 보물처럼 인생의 신비가 베일을 벗고 슬그머니 다가올 때도 있다. 어느 낯선 골목에서 문득 들려오는 낮은 음악처럼 예상치 못한 기쁨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30일  아프리카에서 머무는 동안 가장 오래 머물렀던 곳은 탄자니아다. 세링게티의 사파리와 응고롱고로 그리고 킬리만자로를 거쳐 인도양의 흑진주로 불리는 아름다운 산호섬인 잔지바르에서 달콤한 휴식을 취했다.
모처럼 여유 있는 시간을 보내고 드디어 빅토리아 호수가 있는 잠비아로 떠나기 위해 짐을 꾸렸다.

 

매번 노마드처럼 짐을 풀고 꾸리는데 선수가 되었다.

다르에스살람에 있는 타자라 역은 깔끔했다. 표가 없는 일반인의 출입이 완전히 통제되는지 입구에서 철저히 검문을 하고 있었다. 타자라 열차는 탄자니아의 다르에스살람에서 잠비아의 카피리음포시까지 연결하는 길이 1860km의 국제열차다. 


중국이 5억 달러를 투자해서 만든 이 열차 이름도 탄자니아-잠비아 철도(Tanzania-Zambia Railway)를 줄여 타자라라 부른다. 

보통 45시간 이상 걸리는 이 열차는 화요일과 금요일 두 차례만 운행을 하기 때문에 그 요일에 맞춰 여행  케줄을 짜야만 한다. 예약은 필수다. 한 칸에 침대 네 개가 들어있는 퍼스트 클래스의 요금은  우리나라 돈으로 7만 원 정도 하는데 그곳에서 우리들은 2박3일을 보내야 했다.

기차 출발시간이 다 되어가자 큰 짐을 머리에 이고 손에 든 수많은 현지인들이 뛰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3등 칸은 미리 자리가 정해지지 않아 먼저 앉는 사람이 임자인 탓에  역은 아수라장이었다.

끝없는 평원을 가로지르는 이 열차를 왜 사파리 열차라고 하는지 알 수가 있었다. 평화롭게 노는 동물들과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보는 재미가 쏠쏠하여 일행들은 일주일이라도 기차 여행을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소리를 했다.

시원한 녹색 바람을 맞으며 정말 모처럼 안정된 마음으로 책을 읽기 시작했다. 말콤글래드웰이 쓴 아웃라이어는 일반적인 통념을 과감하게 뒤집는 내용들이었다. 성공한 사람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숨겨진 이점과 특별한 기회요소의 혜택을  누려왔다는 예리한 분석에 푹 빠져들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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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은 60대 언니들과 함께 4인실 일등칸을 쓰게 되었는데 인연이란 정말 묘하다 언니들은 여행광에 세련된 면면이 정말 나도 십 년 후 그렇게 아름답게 다듬어지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들게 했다.

기차가 마을을 지날 때마다 어린아이들이 고사리 같은 손을 흔들며 반겼다. 벽촌에서 자랐던 나의 향수를 자극하는 대목이었다. 정차할 때마다 아이들이 몰려와 뭔가를 달라고 열차에 매달리자 일행들은 사탕을 나눠주고 머리에 이고 온 과일들을 사 먹었다.

타자라 열차 내는 고양이 세수할 수 있을 정도의 물이 나왔고 식당 칸에서 음식을 주문하면 배달까지 두 시간 정도는 기다려야 했다.


그곳에서 처음으로 우갈리를 맛보았다. 아프리카 사람들에게 우갈리는 우리의 밥에 해당한다. 흰 옥수수가루에 뜨거운 물을 부어 나무 주걱으로 오래 잘 저으면서 익히면 된다. 

옥수수가루라고 하면 약간 노르스름한 옥수수 색깔을 떠올리기 쉽지만  우갈리의 재료가 되는 옥수수는 일단 말린 뒤에 껍질을 많이 벗기고 빻기 때문에 색깔이 희다. 우리 흰쌀과 현미를 생각하면 같다.

 

몸에 좋은 현미속에는 쌀 껍질층의 다양한 영양소가 있듯 옥수수의 껍질층에는 섬유소와 노란색 껍질에는 폐에 좋은 성분들 모두 다 벗겨냈다고 하면 맞다.

또한 우갈리는 반드시 뜨거워야 한다.  우갈리는 만든 즉시 먹든가 아니면 보온통에 넣어 식는 것을 막는다. 
그래서 탄자니아에는 아무리 서민층이라 하더라도 한 집에 보온통 두세 개쯤은 있다고 한다.

우갈리 그 자체는 아무 맛도 없고 푸석푸석해서 반찬이 필요하다.  포크로 한번 떠먹었는데 푸석푸석한 것이 씹는 느낌도 좋지 않고 아무 맛이 없다. 

우선 우갈리 덩어리에서 한 입에 먹을 만큼 떼어낸다. 주먹을 폈다 오므렸다하며 손바닥 안에서 우갈리를 주무르면 푸석했던 찰기가 생겨 떡처럼 되었다.  설탕이 들어가지 않은 백설기의 맛이다. 이 떡처럼 된 것을 같이 나온 고기스프에 찍어먹는데  아무튼 떡을 소스장에 찍어먹는 맛이다. 

 

일반 가정에서는 형편에 따라 삶은 콩이나 삶은 멸치, 야채를 푹 익힌 음치차라는 국물에 적셔서 건더기와 함께 먹는다.

우갈리와 라이스중 주로 치킨과 피쉬 그리고 비프 등을 곁들이는 것을 시켜 먹었지만 혹시나가 역시나였다. 입맛을 조절할 수가 없었다. 생선 사이에 든 뼈까지 모두 다 발라먹었다. 유일하게 맛있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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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자니아 국경을 기차 안에서 넘었다.
 

환전상들이 열차 안을 돌며 흥정을 하는 모습을 빈번하게 볼 수있다. 종착역인 뉴 카피리 음포시에는 환전소가 없기 때문에 환전은 주로 기차 안에서 이루어지는데 이 열차 안의 환율이 가장 유리하다고 알려져 있고, 사실 그랬다. 
 

사실 환율을 따져볼 여유가 없다. 일단 국경을 넘으면 더 이상 탄자니아 돈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 

조금 전까지 탄자니아 실링으로 마셨던 킬리만자로 맥주도 살 수 없다. 국경을 넘는 순간 탄자니아 실링으로는 그 어느 것도 살 수 없다는 것이 문제다. 달러당 1300실링이던 것이 잠비아는 달러당 4000콰차로 엄청난 화폐 인플레이 현상을 느꼈다

맥주 값도 갑자기 턱없이 비싸졌고 과일과 밥값도 똑같은 기차인데도 국경을 넘어서자 3인분에 9천 실링 하던 것이  5만 콰차를 내었으니 3천원에서 5천원으로 오른 셈이다.

잠비아 크와차(Zambian kwacha /ZMK). 

 

크와차 계산법은 0을 하나 빼고 3을 곱하면 된다. 1000K는 우리 돈으로 300원에 가격이다

기차 안에서 비자 비를 50달러씩을 준비하라더니 비자신청을 받던  관리인들이 영수증이 떨어졌다며 내리는 바람에 일부는 그냥 건너야 했다. 열차 안은 늘 분주했고 환전하라는 사람들이 수시로 들락거렸다.

이 열차에서 맞는 아침은 정말 상쾌하다. 유독 열차에서 보는 해돋이가 더 아름답게 느껴지는  특별한 이유를 설명 할 수 없지만 초록의 들판에 선명하게 떠오르는 아침 해를 잊을 수가 없다. 희망을 잉태한 원시의 모습 그대로 비쳤다.

아프리카 여행 중 이 타자라 열차는 한번쯤 꼭 타 보라고 권하고 싶다. 다양한 아프리카의 풍경을 한꺼번에 볼 수 있을 뿐만이 아니라  삼등칸에 탄 현지인들의  치열한 삶의 현장을 볼 수 있는 기회다 

나는 하룻밤 내내 생수 한통을 다 먹은 침대에서 잔 덕분으로 여행을 마칠 때까지 심하게 콜록거리며 다녀야 했다. 그러나 색다른 묘미를 느끼게 했던 잊지 못할 기차 사파리 여행이다. 틈틈이 읽었던 '처음 읽는 아프리카의 역사'와 아이팟에 담아간 영화 '만델라'를 보면서 머물고 있는 아프리카의 모습이 서서히 안개가 걷히는 듯 했다.

삶,
여행의 참맛
진정한 여유
그 녹지대
국립공원같은곳을 지나면서의 생각들
초가부터 슬래트 지붕
음베야의 도심들

타자라는 다르에스살람을 출발해 말라위와 국경지역인 음베야(Mbeya) 등  147개의 역을 경유하여 잠비아의 뉴 카피리 음포시(New Kapiri Mposhi)에  이르는 1860km에 달하는 거리를 연결한다. 

 

책에는 30시간 걸린다고 했지만 보통 40시간 정도 걸린다고 한다.  우리는 43시간 걸렸다.  사실 우리의 KTX로 달린다면 11시간이면 도착할 거리다. 버스로 가면 24시간 정도면 된다고 한다. 

하지만 기차노선은 도중에 국립공원을 지나는 덕분에 창밖으로  기차 사파리를 즐길 수 있다고   타자라를 타기로 했다.  실제로 거의 꼬박 이틀을 기차 안에서 먹고 자고 뒹굴게 된다.

*
독서도 했지만 고스톱도 쳤다. 나이드신 언니들이랑 고스톱 치는 맛이 삼삼했다.놀러온 정사장님은 그날밤 완전히 주머니를 털어야 했다. 초은언니가 실력을 제대로 발휘했다.


여행기간중 우리는 총 세번에 걸쳐 고스톱을 쳤는데 나는 늘 중간이었다.


잃은사람은  딱, 한사람이다. 누군지는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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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 여행 - 마사이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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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바 야영장으로 가기 전  평균 신장 180cm 이상으로 군살하나 없는 몸짱 부족 마사이족 마을로 갔다.


일인당 20불이라는 입장료를 내고 그들의 생활을 구경하기 위해 차에서 내렸으나 역한 냄새가 먼저 코를 막게 했다.


마을은 큰 마당을 중심으로 둥근 형태로 집들이 옹기종이 들어서 있는데 잡목과 가시덤불로 울타리를 했다. 

책에서 읽은 그대로 지붕은 소똥을 발라 놓고 있었다. 바짝 마른 소똥은 습기를 막아주고 보온을 해 준다고 했다.

맨손으로 사자도 때려잡아 용맹하기로 소문난 마사이족들은  우리를 보자마자 환영의식을 치르며 하늘높이 치솟는 춤을 추기 시작했고 여자들은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20여만 원의 고가로 히트치고 있는  마사이 신발이 생각나 그들의 발을 쳐다보니 하나같이 타이어를 잘라서 만든 슬리퍼 모양의 신발을 신고 있었다.


건강하려면 '마시이족처럼 걸으라'는 책에 의하면 마사이족들은 발바닥 전체가 지면에 닿는 중심부 보행을 해 발바닥 전체로 땅을 짚어 혈액순환을 촉진시킨다고 한다. 또한, 마사이족처럼 평소보다 보폭을 크게 해서 시속 5~8㎞의 속도로 빠르게 걸으면  체지방을 연소시키고 운동 효과를 극대화시킬 수 있다고 한다.

일종의 성왕당 같은 신성시하는 나무둘레를 쳐 놓은  울타리에는 마사이족 부인들이 직접 만든 구슬 목걸이부터 귀걸 이등 다양한 소품들이 전시되어있어 한 개라도 더 팔려는 의욕이 왕성해 졸졸  따라 다녔다.


구슬목걸이를 팔려고 흥정하는 모습은 맨손으로 사자도 때려잡았다고 하는 그 용맹성과는 상당히 다른 인상으로 다가왔다. 

 

움막의 내부를 설명해 주려는 가이드를 따라 안으로 들어서니 방 두 칸에 가운데 불씨가 살아 있는 작은 화로가 있고 어두컴컴해서 잘 보이지 않는 실내에는 천정이 낮아 키가 큰 마사이족들이 어떻게 생활하는지 궁금증이 일게 했다.

땅바닥에 주저앉아 구슬을 꿰고 있는 아녀자들을 뒤로하고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가 보았다.

얼기설기 나무로 만들어진 작은 움막이 학교인지 작은 칠판에 스와힐리어와 영어를 칠판에 써 놓고 숫자를 또박또박 읽어가며 공부하고 있는 한 무리의 어린아이들을 만났다.

눈빛만 푸르게 빛나는 어린아이들의 천진난만한 모습은 험한 입성과는 상반된 깨끗한 영혼처럼 맑아 보였다. 그 교육의 현장이 바로 마사이의 미래를 설계하는 것이리라.

마사이족은 어디를 가나 눈에 뜨였다. 화려한 장신구에 박달나무 지팡이를 언제나 짚고 다니는데다 키가 유독이 크고 의상도 칼라플한 탓이다.

마사이족은 결혼을 할 때 남자가 여자의 집에 신부대금으로 소를 5~10마리를 주나 신부가 예쁘면 예쁠수록  더 많은 소를 주고 데려 온다. 일부다처제인 마사이족은 부인의 숫자가 능력에 비례해  딸을 가진 부모의 입장에선 딸 시집보내는 것이  재산 증식의 한 수단이 되기도 한다.

뉴욕의 패션계에서 세계적인 모델로 활약하는 와리스 디리의  실화를 쓴'사막의 꽃'이라는 책을 보면 와리스 디리가 60먹은 남자에게  낙타 다섯 마리와 바꿔져 시집가기 직전에 도망쳐 나온 스토리가 나온다. 
 

일부다처제와 할례를 전통으로 이어오고 있는 마사이족을 실제로 둘러보고 난 이후의 소감은 한마디로 너무나 애잔했다.  많은 아녀자들이 어린아이들을 업고 있었는데 정말 음핵을 제거한 수술'할레'를 했을까하는 의구심에 한 번 더 쳐다보게 되었다.

아무리 피부가 검어도 밝게 웃는 모습은 한없이 아름다웠다. 어느 마자이족 모자의 미소가 아름다워 여러 컷의 사진을 찍고  제일 늦게 차에 올라 한동안 친구한테 지청구를 들어야했다.

단체 행동에서 다른 사람들에 대한 배려가 부족했노라고. 일행들은 일찍 와서 기다리는데 나 혼자만 사진 더 찍겠다고  욕심을 부린 것이 화근이 되어 하필이면 그 시간 교행 안 되는 다리에서 커다란 트럭이 고장이 나 오랫동안 기다려 건너다보니 심바 캠프장 도착 시간이 더욱 더 늦어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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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사이족에 대한 팁

전설에 의하면 마사이족은 그들의 신인 응가이 신과 하늘나라에 살고 있었다. 어느 날 지상을 내려다본 그들은 지상으로 내려가 살고 싶었다.  신에게 허락을 받았지만 조건이 있었다. 함께 내려가는 소와 염소,  양을 기르고 그 젖을 먹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신과의 약속을 어기고 그만 사슴을 잡아먹어 버렸다.  화가 난 신은 그들이 다시 하늘로 올라오지 못하도록 타고 내려간  밧줄을 끊어버렸다. 신에게 용서를 빌었지만 소용이 없었다.  신이 주신 마지막 기회는 함께 내려간 가축들의 수가 신이 만족할 만큼  그 숫자가 불어났을 때 밧줄을 다시 내려주겠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마사이족은 신이 부르실 그 날을 기다리며 살고 있다. 그리고 지금 다른 부족들이 가지고 있는 가축들도 그들이 마사이족의 재산을 잠시 보관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므로 언제든 필요할 때면 도로 가져올 수 있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마사이족의 용맹스러움은 그들이 가축을 지키기 위해 사자에 맞서고 다른 부족과의 분쟁 과정에서 길러진 것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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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레에 대한 팁

뉴욕의 패션계에서 세계적인 모델로 활약하는 와리스 디리는 1965년,  소말리아 사막을 떠도는 유목민 가족의 생존한 열두 아이 중 하나로 태어났다.  ‘사막의 꽃’이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그녀 역시 이 지역의 ‘관습’에 따라 다섯 살 적 어느 밤중, 어머니 손에 이끌려 마을의 주술사 노파 집에 도착해 녹슨 칼끝에 여린 몸을 내어놓아야 했다.


살점을 도려낸 상처는 몇 달 넘게 핏자국과 고름이 범벅된 채 찢어지게 아팠고, 어린 소녀는 밤에도 신음 소리를 내며 한 달 넘도록 자리에 누워 지냈다. 친언니 하나와 사촌언니 둘은 이 비위생적인 음핵 제거 후유증으로 세상을 떴다. 

아프리카 북부에서 널리 행해지는 이 해괴망측한 ‘전통’에 대해, 이슬람 경전인 코란에는 명시된 바가 없다고 한다. 그건 종교 전통이 아니라, 여성의 쾌락을 용납할 수 없는 근엄한 남자들의 성적 판타지에 근거한 것이라는 말이다.

순결한 처녀로 자라기 위해 먼저 할머니들이 칼질을 하고, 정숙한 아내로 살기 위해 다시 남편의 칼이 그곳을 갈라낸다는 엽기적 상상력! 이는 숨통을 조이는 가부장 사회에서 분노와 일탈을 꿈꾸는 대신 굴종과 순응의 생존법을 터득하고 알아서 기는 앞잡이 여성, ‘가부장제 지킴이’ 노릇을 하는 음산하고 비굴한 늙은 여성들에 의해 더욱 야비하고 끈끈하게 보존되었을 게다. 

그래서 이집트와 케냐의 경우, 이 끔찍한 관습을 금하는 법률까지 공표되었지만  수백 년 넘은 악습은 좀체 사라지지 않고 있다. 

열네 살이 된 와리스 디리는 낙타 다섯 마리와 바꿔져 육십 먹은 영감의 신부로 팔려가기 직전, 여러 날 모래바람을 맞으며 사막을 가로질러 수도인 모가디슈 언니 집으로 도망쳤다 아버지 손길로부터 좀 더 안전한 런던, 영국대사였던 친척 집에서 4년 동안 식모살이를 하며 홀로 글을 익힌다. 

친척이 귀국한 뒤에도 그녀는 런던에 남아 맥도널드에서 청소부로 일하다 한 사진작가의 눈에 띄어 패션잡지 표지모델이 되고, 파리와 밀라노의 패션쇼 출연에 이어 레블론과 로레알의 화장품 모델로도 얼굴이 알려지게 됐다. 

망설임 끝에 그녀는 1997년 자신의 아픈 과거를 고백하고, 음핵 절제로 고통을 겪지만 제 소리를 낼 수 없는 수백만의 자매들을 대표하는 유엔 명예대사로 임명돼, 전 세계를 돌며 아프리카 여성의 인권을 호소하고 있다. 

“아직도 아프리카에선 매년 200만 명의 소녀가 야만적인 할례 의식 때문에 죽어갑니다. 저도 한 여성으로서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입었습니다.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갖은 학대에 시달리는 아프리카 여성을 도웁시다.” 

어느덧 세계적인 슈퍼모델의 열반에 오른 와리스 디리는 ‘사막의 꽃’이 겪은 파란만장한 삶의 여정에 대해 역시 유목민다운 결론을 내린다. 
 

“난 어디서도 내 삶을 즐거운 것으로 바꾸는 법을 배웠고, 언제라도 거길 떠날 수 있다. 
삶은 움직이는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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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사진=송선순 

http://www.parangse.kr/

 






처음읽는 아프리카역사

굶주림·내전·에이즈·학살에 신음하고 있는 아프리카는 정말 버림받은 땅일까?

세계 여러 나라의 음악을 듣기 시작하면서 가장 인상적이고, 다시 그 의미를 되새길 수밖에 없는 곳이 아프리카다. 블루스와 재즈의 뿌리가 아프리카 리듬이고 알앤드비·솔·록·힙합 역시 아프리카 리듬에 큰 빚을 지고 있다. 인류의 요람이자 세계 음악의 자궁인 아프리카 대륙의 상처가 왜 이토록 깊고 고통스러운 것일까.

<처음 읽는 아프리카의 역사>(웅진 지식하우스)에는 그 답이 담겨 있다. 오랜 세월 서로를 인정하며 살아온 1만여개 부족을 50여개 국가로 만든 유럽의 무식함에서 비롯됐다. 비극의 장본인인 서양은 한 술 더 떠 ‘아프리카 사람들은 왜 평화롭게 살지 못하는가’라는 적반하장식의 태도를 보이고 있다.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은 아프리카에 대한 따스한 시선과 형평성 있는 내용이다. 저자 루츠 판다이크는 독일인이지만 유럽적 편견을 완전히 벗어던지고 설득력 있는 글을 썼다. 아프리카의 기원에서 현재까지, 물 흐르듯 이어지는 책을 읽고 있으면 쉽게 읽히는 ‘재미’와 스쳐 지날 수 없는 ‘의미’를 동시에 섭취할 수 있다. 아프리카 화가가 직접 그린 풍성한 삽 화도 다정스럽다.

*
2005년에 초판이 출간되었는데 제목에 많은 뜻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아프리카의 지도를 보며 '국경선에 참 직선이 많다'라는 의문을 얼핏 가졌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우연하게도 미국의 지도와 매우 흡사하죠.  전반적인 대륙의 모양도 그렇고 대략적인 경계선의 숫자(국가와 주)도 비슷합니다. 50여개 남짓... 그래서 아프리카의 일부 지도자가 아프리카 합중국을 꿈꿨는지도 모릅니다

아반투(Abantu) 인간의 땅 아프리카!

"인간은 우리의 첫번째 조건이다. 인간이 우리의 척도를 결정한다....
아프리카의 여자와 남자는 제대로 시작도 못 해보고 벌써 끝장나지는 않는다.
그들이 말하게 해보라. 무엇보다도 그들이 행동하게 해보라.
효모가 작용하는 것처럼, 그들이 자신들의 메시지를 갖고서 우주의 문명을 만드는 것에 동참하게 해보라" - 세네갈 초대 대통령 레오폴드 세다르 셍고르

우리는 애써 외면하지는 않았지만 아프리카에 대해 관심이 적었을 뿐만 아니라 거의 아는 것이 없습니다. 그나마 서방세계를 통해 간접적으로 듣기 때문에 많은 부분  왜곡되었던 것 같습니다.  

검은대륙, 기아와 질병과 에이즈, 오랜 전쟁과 내란, 못 사는 나라, 미국에 노예로 팔려간 흑인들,  다이아몬드, 남아프리카, 넬슨 말델라, 다음 월드컵 개최대륙... 이집트가 아프리카인가?

단편적이고 부정적이며 많은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던 듯 합니다. 작가는 유럽과 열강의 시각으로 말하려 하지 말고 들으라고 주문합니다. 현실에 대한 냉정한 시각도 그렇다고 아프리카 원시 삶이 마치 인간 본연의 모습인 것처럼 찬양도 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리고 인간이고 인간이기를 소망하는 그들의 이야기를 인내를 가지고 들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아주 깊이 인간적인 것으로 서술되어야 할 아프리카의 역사

작가의 관점에 대한 아프리카 지식인의 평가는 작가 암마 다르코의 에필로그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아주 깊이 인간적인 시작에서 아프리카의 역사를 이해해야 단절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 그리고 그들의 미래를 정당하게 이해할 수 있을 듯 합니다.

"내 소원은 아프리카의 역사가 이 책처럼 우리의 어려움과 기대가 현실적으로 서술되고 우리의 강점도 강조하는 것이다. 하지만 아프리카에 관한 많은 책들이 이렇게 하지 않는다...

우리의 역사는 많은 고통과 슬픔을 지녔다. 그런데도 우리가 언제나 미소를 지을 수 있는 것, 삶의 기쁨으로 가득 넘쳐서 서로 웃을 수 있다는 것은 어떤 내적인 강인함을 말해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면서도 아프리카 사람들의 진기한 특성으로 서술되지 않고 아주 깊이 인간적인 어떤 것, 우리가 이 지구상에 있는 모든 사람과 함께 나눌 수 있는 어떤 것으로 서술되어 있다" - 본문 중 작가 암마 다르코

저자-루츠 판 다이크(Luz van Dijk)
네델란드계 독일인으로 1955년 베를린에서 출생. 남아프리카의 흑백분리정책 반대활동으로 1990년까지 입국이 금지. 2001년 출간한 <유대인의 역사>는 독일 청소년 문학상에 노미네이트 되었음. 2001년부터 케이프타운에 정착해 에이즈 피해를 입은 어린이를 보살피는 호키사 재단의 공동설립자로 활동하고 있음(www.hokisa.co.za) - 저자 소개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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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의 다채로운 역사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휴머니즘이 살아 있는 역사 교양서
다채로운 일러스트와 유럽인의 시각을 벗고 편견 없이 만나는 아프리카의 참모습
80년대 초반 〈부시맨〉이라는 영화가 크게 히트한 적이 있다. 하늘에서 떨어진 콜라병을 신의 선물이라 여기며 기뻐하고 다투는 부시맨들의 모습과, 마을에서 벌어지는 갖가지 사건들에 배꼽을 잡은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문명의 이기를 비판하고자 만들어진 영화라지만, 정작 우리의 머릿속에는 순박하지만 미개하고, 우스꽝스러운 행동이 부시맨의 이미지로 굳어져 남아 있을 뿐이고, 지금까지도 촌스럽거나 못생긴 사람을 일컫는 대명사처럼 쓰이고 있다.
그렇다면 현재 부시맨의 생활은 어떨까. 최근 보츠와나 정부는 칼라하리 사막에서 2만년 이상 거주해온 부시맨을 강제이주시키려 하고 있다. 공식적인 이유는 부시맨이 키우는 염소에게서 인간에게 치명적일 수 있는 옴이 발견되었다는 것이지만, 실제로는 부시맨 거주지역에서 다이아몬드 광산이 발견되었기 때문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1990년대 중반부터 보츠와나 정부는 개발정책과 동물보호정책 등을 이유로 들어 부시맨의 거주지를 축소시켜왔고, 이에 반발해 부시맨들이 소송을 제기해 영구거주를 법으로 보장받기에 이르렀지만 여전히 권력의 이해에 따라 한 집단의 운명이 좌지우지되고 있는 것이다.
모두가 알고 있지만 사실 누구도 제대로 알고 있지 않은 것, 이는 비단 부시맨에 한정된 이야기가 아니다. 바로 부시맨이 살고 있는 아프리카 대륙 전체에 관한 이야기이다.

다채로운 아프리카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한 첫 번째 방법
지구촌 시대라고 하지만 여전히 서구 중심의 세계관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우리에게 여전히 건재하고 있는 대륙이 있음을 새삼 일깨워주는 책이 출간되었다. 바로 《처음 읽는 아프리카의 역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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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히 짧은 시간 만에 유럽과 아프리카와 아랍 상인들로구성된 마피아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인간을 멸시하는 태도를 취하며 완전히 새로운 노예 개념을 도입하였다. 이제 노예는 지위가 낮은, 또는 권리가 줄어들거나 없는 '인간'이 아니라 이윤을 얻기 위해 붙잡아서 수송하고 팔 수 있는 '상품'으로 취급되었다. 포르투갈 사람들의 독점 사업이 다른 유럽 사람들의 공격을 받았고, 이제 서부 아프리카 앞바다에서는 해적선들 말고도 스페인,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그리고 한도안은 스웨덴, 덴마크, 독일 국적의 함대들이 서로 이 사업을 두고 다툼을 벌이게 되었다. - 본문 116~117쪽에서 -

알라딘P.158 : 식민 지배자와 거짓 선교사를 쫓아내는 것이 곧 자유롭게 된다는 뜻이 아니라는 것은 정말 힘든 교훈이다.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아프리카의 다양성이야말로 가치 있는 것임을 깨닫는 것, 독립과 자유를 통합하는 것이 여자와 남자에게 아주 의미가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일이 아직도 과제로 남아있다. -

아마 아타 아이두 - chikaP.158-159 : 우리는 서로를 배부르게 먹이고도 남을 만큼 충분히 먹을 것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세계의 구호단체들이 너무 조금 너무 늦게 내놓는 것을 양철 그릇에 받으려고 '끝도 없이 길게 줄서서 지나가는 바'싹 야윈 인간들의 모습을 매일 본다. 우리는 언제나 배우게 될까. 이 지구상의인간들은 언제쯤이나 일어나 외치게 될까, 이제 충분하다고.
...... 인간이 신의 형상에 따라 만들어졌기 때문에 무한한 가치가 있는 존재라는 것을 우리는 언제나 배우게 될까, 그리고 인간을 그보다 못한 것으로 취급하는 것은 신을 모독하는 일이며, 이런 모독이 그렇게 행동하는 사람 자신에게로 되돌아온다는 것을 언제나 배우게 될까?

다른 사람을 비인간적으로 대하는 사람은 스스로 인간성을 잃어버린다. 억압은 억압받는 사람보다 더 많지는 않더라도 그와 똑같이, 억압하는 사람의 인간성도 없애고 만다. 양쪽이 다 정말로 자유로워지기 위해 서로를 필요로 한다. - 남아프리카 성공회 데스먼드 음필로 토토 주교. - chi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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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맹 가리의 소설을 읽다가 ‘루뭄바’라는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군인들이 루뭄바의 머리채를 붙잡고 강제로 무릎을 꿇리고 있는 그 유명한 사진이 그곳에 있다는 걸 그제야 비로소 알아보았다….” 이야기 전개에서 중요한 사실도 아니고 그저 화자의 심리를 묘사하는 짧은 문단이었다. 역자는 루뭄바가 ‘아프리카 민족주의 지도자, 콩고 민주공화국의 초대 수상’이라는 간단한 각주를 달아놓았다.
파트리스 루뭄바. 1950년대 아프리카 콩고에서 노동운동을 하다 민족해방·통합 운동에 뛰어든 젊은이 루뭄바는 1960년 해방된 콩고의 초대 총리가 되어 식민지배자였던 벨기에 국왕이 참석한 독립 기념식에서 일갈한다. “우리는 흑인들이 자유로워지면 어떤 일을 이룰 수 있는지 온 세상에 보여줄 것이다.” 그러나 불안한 정정 속에서 그의 비서 출신으로 군 지휘권을 쥐고 있던 조제프 모부투가 미국과 손잡고 쿠데타를 일으켰다. 가택 연금됐다 탈출했으나 다시 붙잡힌 루뭄바는 군인들에게 머리를 쥐어뜯기는 등 굴욕적인 폭행을 당했다. 이 장면이 외신을 타고 전세계에 알려진 ‘그 유명한 사진’이다. 그 뒤 루뭄바는 또 다른 정적의 손에 넘겨져 처형됐고 이후 주검도 발견되지 않았다.

그 유명한 사진, 아니 그의 이름조차 내겐 왜 생소할까. 물론 40년도 더 지난 일이어서도 그렇겠지만, 로맹 가리가 프랑스 작가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아프리카를 식민지배한 경험이 있던 유럽과 우리 사이에 존재하는, 아프리카에 대한 관심과 지식의 차이에도 원인이 있을 것 같다. 하기야 우리가 아프리카의 역사에 바친 호기심이란 게 과연 얼마나 되겠는가.

유럽과 신대륙의 역사, 즉 백인의 역사를 무대 중앙에 올려놓은 우리의 교육과정과 미디어에 둘러싸여 있다 보면, 흑인의 역사에서는 노예사냥과 식민지배, 독재와 쿠데타, 인종청소 따위의 음울한 이미지컷 몇 장밖에 건질 게 없다. 노예로 팔려가던 조상들이 고개 숙이고 지나던 해안가 요새의 굴다리 밑에서 구멍난 메리야스 차림으로 하릴없이 뒹굴며 낯선 외국인들에게 불만의 눈길을 보내고 있던, 서부 아프리카 시에라리온의 빈민들이 주던 느낌 말이다.

그러나 아프리카인은 이 행성 최초의 인간이며, 역경을 딛고 모든 대륙으로 뻗어가 현생 인류의 씨를 뿌린 종족이다. 기원전 800~500년 콩고 분지에서 아프리카 전역으로 퍼져나간 종족의 이름 ‘반투’(Bantu)는 ‘인간’을 뜻한다고 한다. “얼마나 매혹적인 생각인가! 자신의 정체성을 표현하기 위해 맨 먼저 자기가 인간이라고 말하는 것이다.”(<처음 읽는 아프리카의 역사>)

그들의 역사는 기록되고 전달되지 않았을 뿐, 다른 인종의 역사와 다를 바 없을 것이다. 식민지배와 전쟁, 개발의 근현대사에서 그들에게도 김구와 이승만이 있었고 박정희와 김영삼·김대중이 있었으리라. 내전으로 폐허가 된 시에라리온에서 만난, 역사의 상처와 현재의 빈곤을 어떻게든 넘어서 새로운 세상을 앞당겨오리란 열정에 불타던 흑인 시민운동가들의 피부는 열대의 태양처럼 빛났다. 인류의 전진은 피부색과 무관하게 지구 어디에서나 한 걸음씩 이뤄지고 있다는 믿음으로 인류는 살아간다.

버락 오바마의 미 대통령 당선도 그런 발걸음의 하나다. 그래서 미국 대선 결과에 주목하는 이유가 단지 그가 흑인이기 때문이어선 안 된다. 미국의 뿌리 깊은 인종차별에 커다란 파열구를 냈다는 점은 물론 뜻깊지만, 그런 소수집단 출신으로서 인류 전체의 역사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가치와 열정과 힘이 그에게 체화돼 있을 것이란 기대가 더 큰 열광의 이유일 것이다. 평화롭고 공평하고 아름다운 미국, 나아가 그런 지구촌의 미래가 그에게 진실로 절실한 꿈인지가 앞으로 오바마 미 대통령에 대한 미국인 그리고 세계인의 지지 기준이다. 물론 그건 좀더 두고 봐야 할 일인지도 모른다.

미국의 ‘좌파 언론인’인 매튜 라이스의 ‘삐딱한’ 할렘 르포를 표지이야기로 삼은 것은 그런 이유다. 오바마를 보는 다양한 시선 가운데 어느 것이 흑인의 역사와 인류의 전진에 관한 진실에 가까운지, 우리는 앞으로 4년 동안 담대함과 희망을 품고 지켜볼 일이다./한겨례 편집장
 






아프리카를 꿈꾸다 - 사막의 꽃 와리스디리



뉴욕의 패션계에서 세계적인 모델로 활약하는 와리스 디리는 1965년, 소말리아 사막을 떠도는 유목민 가족의 생존한 열두 아이 중 하나로 태어났다.
 

‘사막의 꽃’이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그녀 역시 이 지역의 ‘관습’에 따라 다섯살적 어느 밤중, 어머니 손에 이끌려 마을의 주술사 노파 집에 도착해 녹슨 칼끝에 여린 몸을 내어놓아야 했다.

열네살이 된 와리스 디리는 낙타 다섯 마리와 바꿔져 육십 먹은 영감의 신부로 팔려가기 직전, 여러 날 모래바람을 맞으며 사막을 가로질러 수도인 모가디슈 언니 집으로 도망쳤다
 

아버지 손길로부터 좀더 안전한 런던, 영국대사였던 친척 집에서 4년 동안 식모살이를 하며 홀로 글을 익힌다.

친척이 귀국한 뒤에도 그녀는 런던에 남아 맥도널드에서 청소부로 일하다 한 사진작가의 눈에 띄어 패션잡지 표지모델이 되고, 파리와 밀라노의 패션쇼 출연에 이어 레블론과 로레알의 화장품 모델로도 얼굴이 알려지게 됐다.

“아직도 아프리카에선 매년 200만명의 소녀가 야만적인 할례 의식 때문에 죽어갑니다. 저도 한 여성으로서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입었습니다.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갖은 학대에 시달리는 아프리카 여성을 도웁시다.”

어느덧 세계적인 슈퍼모델의 열반에 오른 와리스 디리는 ‘사막의 꽃’이 겪은 파란만장한 삶의 여정에 대해 역시 유목민다운 결론을 내린다.

 

“난 어디서도 내 삶을 즐거운 것으로 바꾸는 법을 배웠고, 언제라도 거길 떠날 수 있다. 삶은 움직이는 거니까.”

FGM라고 아는가?

 

들어본적이 있다면 아마아마 당신은 이 책을 읽고 새삼 놀라지 않을 것이다. 나 역시 풍문에 그런 것이 존재한다고 들었던 기억이 있다. 하지만 믿지 않았다. 아니 믿지 않았다기 보다 나와는 관계 없기에 외면했다고 하는 것이 더 적절하리라.

FGM은 Female Genital Mutilation의 약어다. 더 널리 쓰이는 말로는 FGCFGC 즉, Female genital cutting 이 있다. 


끔찍하지 않은가?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도대체 우리가 알지 못하는 세상에는 어떤 종류의 악행이 도사리고 있는 것인지 일개 촌부에 지나지 않는 나같은 인간의 상상력으론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세상이 바로 우리 옆동네에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특정 종교를 이야기하지 않겠지만 어느 종교이든지간에 그 종교적 광신이 차별을 재생산하고 있는 것은 익히 알고 있는 바이다.

 

그것이 힘없는 약자에게 집중되고 있는 점이 이러한 악행이 관습화되어 지금도 많은 여성들이 두려움과 공포속에서 떨고 있는 것이다.

이른 바 여성할례의 피해자이기도한 수퍼모델 출신인 와리스 디리는 자신의 화려한 성공을 자축하기에 앞서 자신과 같은 피해자가 더이상 나오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 책을 쓴 것이다.

 

아프리카 최 빈국중에 하나인 소말리아의 양치기 소녀에서 뉴욕을 주름 잡을 수 있는 모델이 되기까지 결국 그녀는 운이 좋았다고 밖에는 말할수 없는 것이다.
 

그녀의 과거가 고스란히 녹아 있는 그녀의 첫 자서전은 그러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지금도 여성을 남성의 재산이나 소유로 인정하는 관습은 정신적인 관념으로 뿌리깊게 그 명맥을 이어오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때문에, 암묵적으로 침묵을 강요하는 사람들과 강제적 침묵을 묵묵히 받아들이고 살아가는 사람들, 즉 우리 모두는 FGM 따위에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다.

글로발 시대. 이른 바 '세계가 하나'라는 것은 지네 나라에선 얼굴 팔리고 더이상 캘 건덕지가 없는 돈 좀 있는 것들이 다른 모든 나라의 무역 장벽을 허무는 것에 그 목적이 있다.

 

강한 나라의 자본가들이 약한 나라의 자본가들과 결탁해 서민들의 등가죽을 벗겨먹는 돈지랄적 파상공세가 바로 우리가 그토록 목표로 삼아 뛰고 있는 진정한 의미의 세계화가 아닌가.

 

오늘날 때깔 좋은 세계화가 가난한 많은 나라의 서민들에게 점수를 따지 못하는 것은 바로 진정으로 세계가 관심을 보여할 문제에선 정작 철저하다고 해도 좋을 만큼 침묵을 지키고 있기 때문이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싶다.)

살아가기 바쁜 우리는 소말리아라는 큰 집단은 좀 몰라도 된다. 하지만 FGM으로FGM으로 고통받는 여성들이 전 세계적으로 (누적 피해자수로 어림잡아) 1억하고도 수천만명이 존재한다는 사실은사실은 결코 외면하지 않아야 한다.


군 위안부 피해가 수십년이 지났다고 해서 은근슬쩍 강제가 아니었다고 우기는 인간들만 나쁜 것이 아니다.

 

그것을 정치 쟁점화 하는 무리들에겐 그것이 통할지 몰라도, 직접적으로 피해를 당한 여성들과 그 여성들이 속한 집단에선 결코 통하지 않는 이야기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나라 여성들의 고통을 타자화 하지 않고 같이 동질화시켜 역사를 후퇴시키려는 세력을 무력화해 나가야 하는 이유는 몹시 타당하고, 다른 나라 여성의 고통은 내 알바 아니라는 인식은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

역사가 증명하는 남성에 의한 여성의 역사적 수탈은 현존하는 모든 남성의 자각에서 출발해야 한다.

 

자각은 어려운 게 아니다. 외면을 관심으로 돌리려는 차분한 마음 가짐이 바로 그 출발인 것이다.

 

글쓴이 송선순   http://www.parangse.kr/






아프리카를 꿈꾸다 - 넬슨만델라



에이즈 퇴치기금을 위해 런던에서 열린 콘서트의 이름은 46664콘서트이다. 이것은 만델라의 죄수번호이다. 이 죄수번호가 이제는 자유와 인간구원의 표상이 되었다.

 

성공적으로 대통령직을 역임한 후에도 영향력 있는 지도자로서 자유와 평화를 위해 헌신하고 있는 만델라를 만난다.

만델라는 두 개의 이름을 가지고 있다. 영국식 이름인 넬슨과 아버지가 지어준 아프리카 이름인 롤리흘라흘라이다. 우리는 보통 넬슨 만델라라고 부르지만, 그의 롤리흘라흘라라는 이름도 같이 불러야 한다. 이걸 부르지 않는다면 인종주의자 냄새가 날 것 같다. 만델라의 어머니는 어린 만델라에게 종종 아프리카 민담을 들려주었다. 늙고 병든 여인이 여행자에게 도움을 청했다.

 

여행자는 눈곱이 덕지덕지 낀 늙은 여인의 눈길을 피해 버렸다. 그러자 그 여인은 다른 여행자에게 자신의 눈곱을 닦아 달라고 부탁했다. 그 여행자는 내키지는 않았지만, 늙은 여인의 눈곱을 닦아주었다. 그 순간 여인은 젊고 아름답게 변신했고, 여행자는 그녀와 결혼해서 부자가 되어 잘 살았다는 이야기다. 어머니의 이 이야기는 어린 만델라의 가슴에 오래 동안 남았다.

 

바로 미덕과 너그러움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방식으로 보답해준다는 교훈이다. 그는 남아공 백인들의 더러운 눈곱을 손수 지극정성으로 닦아 준 지도자였다.

만델라는 자유를 위해 투쟁하는 용사이면서 용서와 화해의 정치인이다. 그는 언제부터 정치적인 투쟁에 관심을 갖게 되었을까?

 

그는 말한다. “내가 언제부터 정치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또 언제부터 자유를 위한 투쟁에 일생을 바치겠다고 결심했는지 정확히 기억할 수는 없다. 남아프리카에서 흑인으로 산다는 것은 그들이 태어나는 순간부터 그들의 인식 여부에 상관없이 정치화될 수밖에 없음을 의미한다.” 남아프리카에서 태어난 흑인에게 자유를 위한 투쟁은 태어나는 순간부터라고 해야 한다. 거대한 정권과 투쟁하기 위해서는 조직이 필요하다.

 

만델라는 나중에 자신이 의장이 된 아프리카 민족회의(ANC)의 조직원으로 평생 활동했다.

만델라가 1912년에 조직된 아프리카 민족회의(ANC)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은 1942년 말 학사 학위를 취득하고 변호사의 꿈을 품고 있을 무렵이었다. 친구로 지내던 가우어가 그에게 말했다. ”아프리카 민족회의만이 아프리카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이 말에 집회에 참가했던 만델라는 이후 백인 사회 속의 별종인 흑인 변호사로 활동하면서 점차 백인 정부에 대항하는 투사로 성장한다.

 

남아프리카 정부는 일개 변호사가 바꾸어 놓을 수 있을 정도의 존재가 아니었다. 그는 근본적인 사회제도의 변혁을 꿈꾸었다. 그가 몸담은 아프리카 민족회의는 철저하게 무폭력 원칙을 고수하고자 했다. 만델라 역시 초기에는 간디의 무저항주의를 받아들이고 아프리카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손에 손잡는 민주주의를 표방했다. 하지만 저항의 정도는 압제의 정도에 따라 달라진다.

 

1948년 전 네덜란드 개혁교회의 목사이자 신문사 편집장인 다니엘 말란 박사가 이끄는 국민당은 스뫼츠 장군이 이끄는 통일당과의 선거에서 승리했다. 말란의 기본 강령은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 인종격리정책)’이다. 만델라는 아파르트헤이트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아파르트헤이트는 새로운 용어였지만 새로운 생각은 아니었다. 아파르트헤이트는 글자 그대로 분리를 뜻하며, 수세기에 걸쳐서 남아프리카 흑인들을 열등한 위치에 놓이게 한 모든 억압적 법규와 제도의 상징이었다. 그것은 지난 300년에 걸쳐 형성된 인종차별의 관습이 사회제도로 굳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악마적인 제도는 국민당이 나치를 지지하는 당에서도 잘 나타난다. 국민당은 더욱더 잔혹하게 인종차별을 하기 시작했다. 만델라는 국민적 저항이 더욱 거세어지는 정국 속에서 충격적인 장면을 목격한다. 평화적으로 시위하던 시위대에 경찰이 무차별 총격을 가해 수많은 부상자와 18명의 목숨이 희생되었다.

 

그러나 이 사건은 앞으로 만델라가 겪게 될 엄청난 일들의 전주곡에 불과했다. 그는 이로 인해 무장투쟁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기 시작했다. 만델라는 투쟁을 하면서 공산주의를 비롯한 다른 사상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소수 지배로부터 행방과 자결권을 위한 아프리카 민족투쟁을 최우선으로 두고 있는 만델라에게 마르크스주의는 상당히 매력적인 사상이었다. 하지만 만델라는 공산주의자가 될 수는 없었다.

 

그는 아프리카 공산주의와 대화하기 위해 공산주의를 공부한다. 만델라가 투쟁을 하고 있는 모습은 일제 강점기 우리나라의 상황과 비슷함을 느낄 수 있다. 민족주의, 공산주의, 사회주의, 비폭력, 폭력, 조직 내에서의 내분과 분쟁 등 남아프리카에서 자유를 얻기 위해 투쟁하는 모습은 우리나라의 독립운동 모습처럼 보인다.

만델라는 어느 순간 비폭력으로는 자유를 쟁취할 수 없다는 판단을 내리고, 폭력 투쟁으로 노선을 돌리고 조직을 만들게 된다. 이제는 변호사가 아니라 지명수배를 받은 투사로서 지하에 숨어 지내는 민족운동가가 되었다. 국민당과 싸우기 위한 군대를 만드는 일에 책임자로 활동을 하게 된 만델라는 이 조직의 이름을 ‘움콘토 웨이즈웨’ 즉, ‘민족의 창’이라고 했다.

 

줄인 이름은 ‘MK’. 아프리카 민족회의에는 백인이 참가할 수 없었지만, MK는 백인을 비롯한 공산주의자까지 모두 받아들였다.

이 시기에 그는 피델 카스트로, 마오쩌둥, 체 게바라의 저서들을 읽고 무장투쟁에 대한 전략을 세운다. 이제는 책상에 앉아있는 시간보다 사격 연습하는 시간이 더 늘어났다. 그런데 만델라는 무장 투쟁을 준비하면서 자신이 ‘미묘한 충격’이라고 표현한 일을 겪게 된다.

 

올랜도의 한 농장에서 사격연습을 하기 위해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종달새를 표적으로 삼았다. 주위 사람들은 만델라가 종달새를 절대로 맞히지 못할 거라고 했지만,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날아오르던 종달새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만델라는 의기양양해서 한 마디를 하려고 할 때, 농장에 살던 한 아이가 말했다. “왜 저 새를 죽였죠? 저 새 엄마가 슬퍼할 거에요.”

MK는 네 가지의 폭력 행위를 고려했다. 사보타주, 게릴라전, 테러, 공개적 혁명 등이었다. 군대를 운용할 자금을 모으기 위해 만델라는 아프리카 전 지역을 돌아다녔다.

 

그리고 영국 런던을 다녀오고, 본격적인 군사훈련도 받았지만 집요한 당국의 추적에 결국 체포되고 만다. 그리고 정치범으로 동료들과 함께 종신형을 선고 받는다. 사형을 기다리고 있던 만델라는 종신형을 다행스럽게 생각하고 있었다.

 

종신형은 적어도 그의 투쟁을 멈추게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는 로벤 섬의 감옥에서 18년간 수감생활을 했는데, 466/64라는 수번을 부여 받았다(대통령이 된 후 이 감옥을 다시 찾은 그는 이 수번이 적힌 카드를 다시 보게 된다). 1964년에 로벤 섬에 수감된 466번째 죄수라는 뜻이다. 만델라는 46살에 종신형을 선고 받은 정치범으로 살게 되었다. 이제부터 진짜 만델라가 단련되는 순간이 온 것이다.

만델라의 자서전을 읽으면서 필자는 개인적으로 어서 감옥 이야기가 나오기만을 바라고 있었다. 대체 어떻게 27년 6개월을 견디고 한 인간이 그토록 위대한 업적을 남길 수 있단 말인가?

 

우선 그는 낙관론자였다. 그 자신이 그것이 타고난 것인지 교육받은 것인지 알 수 없다고 했지만 그는 항상 머리를 태양을 향해 똑바로 치켜들고 발을 내딛는다고 했다. 그것이 낙관론이라는 것이다. 그는 말한다. "인간성에 대한 나의 신념이 혹독한 시련을 겪는 어두운 순간도 많았다.

 

그러나 나는 절망에 굴복하지 않으려 했고 굴복할 수도 없었다. 그것은 곧 패배와 죽음의 길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종신형으로 감옥에서 죽는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하지 않았다. 준비만 잘 한다면 언젠가는 자유인으로 아프리카 대지를 두 발로 걸을 것이라는 낙관적인 사고를 했다.

 

처음엔 열악했던 감옥 생활이 여러 번에 걸친 감옥 투쟁으로 점점 개선되고, 교도관과도 친하게 지내게 되면서 로벤 섬은 마치 정치범들의 대학과 같은 느낌으로 읽히는 순간도 있었다. 만델라가 감옥 생활을 잘하고 오히려 투쟁의 노하우가 더 좋아지는 것을 우려해서인지, 정부에서 교묘한 술책을 부리기도 했다. 수 차례에 걸쳐 만델라에게 탈옥 제의를 하는 인물을 보낸 것이다. 만델라는 유혹을 느끼긴 했지만 거절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탈옥을 시킨 후 사살할 계획이었다.

만델라는 감옥에서 채소밭을 만들었다. 묘목을 구해 나무도 심었다. 어디서 많이 보던 풍경이 아닌가. 황대권 선생의 야생초 편지가 떠올랐다. 그는 밭을 가꾸면서 자신의 인생을 보았다.

 

지도자로서 역시 돌보아야 할 정원이 있는 것이다. 씨를 뿌리고 수확을 하고 거두는지 그는 감옥의 채소밭에서 배운다. 한번은 실수로 묘목이 죽었을 때 그는 그 묘목을 캐내어 물로 씻어 정원 한 구석에 묻어 주었다.

 

그리고 만델라는 생애에서 반드시 해야 할 것이 운동이라고 했다. 젊은 시절 그는 선수 수준의 복서였다. 감옥에서 그는 이전에 했던 일상적인 권투 연습과 유산소, 무산소 운동을 했다.

 

감방 안에서 제자리 달리기를 45분, 손가락 짚고 팔굽혀펴기 200회, 윗몸 일으키기 100회, 허리 굽히기 50회 이상. 감옥 생활은 사람을 무기력하고 나태하게 만든다. 다른 젊은 수감자들은 늙은이 만델라가 운동을 하는 모습을 보고 저 늙은이도 하는데 내가 못 하랴는 심경으로 운동을 하기 시작했다.  

만델라는 자신이 있는 곳을 ‘변화’시키는 인물이었다. 결국 이러한 그의 행동들이 남아프리카에 인종차별정책의 철폐로 이어진다. 작은 변화가 큰 변화를 몰고 오는 법이다. 감옥에서 그는 젊음을 바쳐 노인이 되었다. 노인 만델라는 이제 큰 그릇이 되었다.

 

인간성을 죽이기 위해 가두어 놓은 감옥에서 그는 더욱 성숙한 인간이 되어 1990년 2월 11일 여름이 끝나가는 날 오후 4시가 되기 직전에 ‘개인적인’ 자유를 되찾았다. 이것은 남아프리카인들이 ‘자유’를 되찾는 것을 의미한다. 만델라는 그간 감옥에서의 소회를 이런 문장으로 남긴다. “비록 일흔 한 살이지만 나는 내 인생이 이제 막 새롭게 시작되는 것을 느꼈다. 나의 만 일 동안의 교도소 생활은 이제 끝이 났다.”

만델라는 1993년 드 클레르크 당시 남아공 대통령과 함께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남아프리카인으로 만델라는 2차 세계대전 후에 세 번째 노벨평화상 수상자이다. 만델라 이전에도 남아공의 자유를 위해 투쟁한 엘버트 루툴리 추장이 1960년에, 데스먼트 투투 주교가 1984년에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만델라는 무장투쟁을 한 경험이 있기 때문에 노벨평화상을 전혀 기대하기 않았다고 했다. 이후 그는 남아공의 대통령이 되었고 흑인들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투표를 하고 인종차별주의는 철폐되었다. 우리는 당연히 '흑인들이 핍박에 대한 보복을 생각하지 않았을까?'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만델라와 아프리카 민족회의는 달랐다. 진실과 화해 위원회를 구성해서 과거의 인권침해 범죄에 대한 진실을 밝히고 그들은 사면했다.

 

이러한 문장이 그들의 심장에서 튀어나왔다. “용서한다. 하지만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만약에 “용서 못한다. 너희들도 한번 죽어봐라” 가 되었더라면 남아공은 내전이 일어났을지도 모른다. 만델라는 진정한 자유를 원했고, 자신이 맡은 바 소임을 다했다.

 

과거의 인권유린에 대한 사면을 받은 백인들 역시 죄책감에 시달렸다. 사면을 받은 한 백인은 “흑인들이 나를 천만번 용서하고, 하나님이, 모든 사람들이 천만번 나를 용서한다 해도 나는 이 지옥을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문제는 나의 머리 속에 나의 양심에 있기 때문이다”라고 절규했다.

 

그는 자신의 머리를 폭파시켜 달라고 애원했다. ‘머릿속에 기억 속에 지옥이 있기 때문’이라고 말할 정도면 남아공의 아파르트헤이트가 얼마나 잔혹했는지 더 이상 설명할 필요가 있을까?

<만델라 자서전>(넬슨 만델라 저, 김대중 옮김, 두레)

이 책은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김대중 전 대통령이 번역을 한 책이다. 당연히 자유를 위한 투사로서 만델라와 어떤 연대감을 느꼈을 것이다. ‘자유를 향한 머나먼 여정’이라는 부제는 언어가 얼마나 무기력한가를 잘 보여준다. 만델라를 읽으면 서로 다른 언어를 넘어선 인간의 진정한 모습이 그려진다.

 

역자는 이 책을 번역하면서 ‘인동초’라고 불렸던 자신의 생애를 되돌아보았다. 20세기는 만델라, 김대중과 같은 정치지도자들이 민주주의를 위해 투쟁한 세기이다.

서로 다른 풍토에서 독재와 악법에 맞서 싸우고 쟁취한 자유. 그 소중한 인간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의 뒷모습은 아름다웠다. 이 책은 내가 읽은 어떤 소설보다도 더 드라마틱하고 감동적이었다. 그리고 자기개발서와 같은 역할도 할 것이다. 복수는 증오감에 불타 결국 자신을 망치는 일이다. 용서와 화해로서 미소 짓는 인간 공부를 이 책을 통해 할 수 있다.

<넬슨 만델라 평전>(자크 랑 저, 윤은주 옮김, 실천문학사)


저자 자크 랑은 2007년 프랑스의 문화 대통령이라고 불린 정치인이다. 주로 문화부와 교육부에서 일했는데, 미테랑 대통령 시절에 성공적인 문화정책을 운영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세계를 무대로 한 연극배우로 만델라를 출연시켰다. 저자는 말한다. “나는 5막으로 짜인 남아프리카의 비극을 설정하고, 각 막에서 만델라에게 주인공 무대의상을 입혀서 묘사하기로 마음먹었다. 제 1막에서 그는 안티고네의 아프리카인 형제이다.

 

제 2막에서 그는 스파르타쿠스가 된다. 제 3막에서 그는 인간에게 해방의 불을 가져다 준 죄로 바위에 사슬로 묶인 프로메테우스이다. (중략) 그리고 제 5막에서 그의 배역은 넬슨 왕이다. 어떤 역할이 이보다 더 적합하겠는가?” 이 두 권의 책과 더불어 청소년과 아이들을 위한 만델라의 책들도 꽤 많은 분량으로 출판되어 있다. 청소년들에게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의 소중함을 알려주기에 만델라보다 더 좋은 모델을 찾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글쓴이 송선순  http://www.parangs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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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를 꿈꾸다 - 치안과 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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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치 않은 교통, 불안한 치안 '주의'

아프리카 여행이 쉽지 않은 건 비용 때문이다. 아프리카 여행의 허브인 남아프리카공화국 요하네스버그까지 가는 할인 항공권 가격(남아프리카항공 기준)은 왕복 77만5,000원으로 유럽 미주 등과 비교해 비싸지 않다.

하지만 요하네스버그공항을 벗어나 여행지로 이동하기 위해선 가이드가 동반된 전용 차량을 타야 한다.

대중교통이 잘 갖춰지지 않았고 치안이 불안하기 때문이다. 남아공 주민들이 이용하는 미니버스 합승택시 등이 있지만 관광객이 이용하기에는 부담스럽다. 정거장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고 배차시간도 지켜지지 않는다.

목적지가 쓰여 있지 않아 운전자와 수신호를 통해 버스의 노선을 짐작해야 한다. 숙박 시설도 적정 수준의 호텔이어야 안심이 된다.

혼자서 길거리를 돌아다니면 위험할 수 있어 항상 가이드와 동행을 해야 한다. 호텔 숙박비에 차량, 식사비를 포함하면 하루 체류비가 최소 300달러 이상 들어야 한다.

남아프리카의 허브는 요하네스버그다. 이곳을 통해 아프리카 전역으로 항공편이 연결된다.

한국에서 갈 경우 홍콩을 경유해 남아프리카항공을 타고 요하네스버그로 가는 것이 일반적이다. 에미레이트항공을 이용해 두바이를 경유하거나 이집트항공으로 카이로를 경유해 요하네스버그로 갈 수도 있다.

남아프리카 내에선 남아프리카항공이 전역을 연결한다. 이 항공사는 세계 26개국과 아프리카 34개 도시를 연결하고 있다. 스타얼라이언스 회원사로 이용 시 아시아나항공의 마일리지로 적립할 수 있다.

 

남아프리카항공 서울사무소 (02)775_4697, 8

월드컵 시즌인 내년 6월 5일부터는 항공료 호텔 숙박비 등이 3배까지 오를 것으로 보인다.

케냐와 탄자니아를 갈 경우엔 반드시 황열병 예방주사를 맞았다는 접종증명서가 필요하다. 케냐에서 남아공으로 들어올 때도 접종증명서를 검사한다.

 

국립의료원(02_2260_7092) 등에서 접종증명서를 발급받을 수 있다.

남아공 내 한국 식당은 요하네스버그에 3군데, 케이프타운에 2군데가 있다.

아프리카 전문 여행사인 인터아프리카(02_775_7756)와 국제축구연맹(FIFA) 공식 에이전트 KNT코리아는 월드컵 경기 참관, 빅토리아폭포, 보츠와나 사파리 투어를 연계한 월드컵 아프리카 상품을 1월 4일부터 판매할 예정이다.

 

ww.interafrica.co.kr, www.2010worldcup.co.kr

 

글쓴이 송선순  http://www.parangs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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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를 꿈꾸다 - 오리엔테이션

30일에 출발하는 여행 참가자들 이 길잡이님과 함께 아프리카여행에 대한 오리엔테이션 시간을 갖았다.


1)모임날짜 : 2009년 12월 21일(월) 오후 6시


2)모임장소 : 인도로 가는 길 사무실.


서울시 종로구 낙원동 58-1 종로오피스텔 1412호. 지하철 종로3가역 5번 출구에서 2분거리.

바쁜 마음으로 정확히 6시에 맞춰 좁은 여행사 사무실을 도착해 그곳을  가득 메운 사람들을 보았을때  첫 느낌은 그야말로 와~깜짝 놀랐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다들 엄청 고령이었고 여자 남자 할것 없이 대학생들 몇몇을 제외하고선 60대이거나 50후반 정도로 보였으니 내가 최고령일것이라는 생각을 한것 부터가 빗나가기 시작했다.

우리를 이끌 K3, 김찬유선생의 사회로 각자 자기 소개를 하기 시작했는데 지방에서 올라온 부부팀을 비롯해 친구와 단짝이 되어 여러곳을 여행한 베테랑급 여성들, ..

 

70가까이 된듯한 남성분인데 벌써부터 일정을 조절해서 5800고지 킬리만자로 정상에 오를것이니 그에 따른 비용추가와 스케쥴 조정을 요청하고 있었으니 나야 고작 배낭여행 4년차로 완전 초짜중의 초짜였다.

아프리카를 가고 싶어 참여하게 되었노라고 말하던 여대생은 아무래도 아르바이트해서 돈을 모아  값진 여행의 기회를 얻게 되었는지 발그레 상기된 볼이 아름답게 보였다.

여행일정을 소개하는 과정을 보니 50시간 기차를 타야하는 코스도 있고 22시간 버스를 타야하는 코스도 있어 그야말로 완전 고생문이 훤했지만 그곳에 모인 여행팀원들은 눈하나 까딱하지 않고 당당하게 도전할 용기가 밖으로까지 튀쳐 나올듯 자신 만만해 보였다.

인생이란 스스로 지도를 그려가는것이라고 했다.

삶은 주어진 것이지만 인생은 만들어가는 것으로 이미 주어진 조건들을 잘 연출하여 좋은 쪽으로, 밝은 쪽으로 엮어가는 것이라 했다.

여행또한 항상 즐거울 수는 없는 것을것이 뻔하지만 그 고생을 통해 새로운 자아를 깨닫게 되고 편안한 집을 그리워 하면서 안락한 삶을 영위했던 우리네들의 평범한 일상이 얼마나 축복이었는가를
새롭게 깨닫는 계기가 되는것이다

인도에서 그리 쌩 고생을 죽도록 하면서도 살아 돌아왔고 목소리가 안나와 성대에 거미줄 쳐진듯 전화조차 받지 못할 만큼 피폐해진 상태로 귀국했지만 여전히 나는 또다른 여행을 꿈꾸고 마치 고쳐지지 않을 고질병을 앓은 여자처럼 겨울만 되면 어딘가로 가고 싶어 안달복달하는 사람으로 변했으니 참으로 여행이란 떠나서 고생 해 본 자만이 삶의 참 맛을 알게 되는거라고 생각한다.

삶을 연출하는 자는 나 스스로다.

 

내가 주인공이고 감독이 되어 즐겁게 연출하여 살다보면 내 인생 통채가 즐거운 삶이었노라고 어느날인가  반추할수 있을것이라고 본다.

에니웨이..우리들은 한시간넘게 일정과 궁금증을 토해냈고 느리면서도 꼼꼼하게 설명을 해 가는 우리 가이드님, 뭔가 조금은 절제하는듯 아니면 2%정도 비밀스럽게 감추어 놓은듯 배낭여행 가이드 10년 케리어 봇다리를 조심스럽게 열어놓았다.

아무튼 우린 떠난다


359만원 숙박과 교통비를 미리 냈고 나머지 식사비와 그외 여행에 따른 요금들, 예를 들자면 사파리나 국립공원 들어가는데 필요한 입장료등 사용할 1600~2500불을 현금으로 준비하라하고 주로 환전에 용이한것은 몫돈 100불짜리를 85% 나머지 50불과 10불등 잔돈으로 준비하라 한다.

만만치 않은 비용이나 유선생이나 나는 아무래도 비용이 더욱 절감되리라 본다. 예를 들자면 빅토리아 폭포에서 헬리콥터를 타고 번지점프를 한다던가 아니면 그냥 번지점프를 한다던가 이런 다이나믹한 일은 절대로 하지 못할것이 뻔하므로..

바이킹 한번 탔다가 2박3일 토하고 어지러워서 걷지도 못한 지독한 경험을 한 나는 아예 번지점프장 옆에서 오금이 저려서 못 서 있을것이 뻔.뻔.

식사는 매끼 각자가 알아서 매식을 해야 할 상황이라 했는데 우리둘이 배낭여행 다녔던 호주나 인도,베트남에서 처럼 쌀과 전열기구를 가지고 다니면서 해먹는것은 전혀 어떤 걱정거리도 되지 않는다.

처음으로 30명이라는 단체와 떠나보는 30일동안의 여행에 대한 막연한 걱정과 우려는 20년 배낭 여행 구력을 가진 유선생이 카바해 줄것이라는 확실한 믿음으로 어제부터 생긴 편두통은 치유될것이라 본다.

아프리카 육로종단의 결정판답게 기차로 차로 비행기로 날이면 날마다 반이상은 덜덜거리는 차안에서 지내야 할 판이니 책 일곱권 사 놓은것 통째로 매고 가서 자전거 정도밖에 속도가 나지 않는다는 기차속에 50시간 누워 독서삼매경에 빠질일도 생겼다.

가자.. 빳빳한 5만원권 지폐 한다발과 신권냄세 팍팍 풍기던 100달러 지폐의 위력을 한번 느껴보자.

 

살아야 하는 근사한 이유중에 이렇게 훌훌 여행을 떠나 죽을것을 뻔히 알면서도  태양을 향해  날라가던 이카루스처럼 너에 대한 풋풋한 사랑, 열정,희망,기쁨등을 담아 올거다.

 

글쓴이 송선순 http://www.parangs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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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 여행 - 여행경비와 경로





From Narobi to Capetown!!
 

전세계 배낭족들에게 동경의 대상이었던 아프리칸 드림루트. ..이를 쉽게 풀어 보여줄 수 있는 여행.
  
*여행경비

선입금-359만원!(왕복항공권+호텔+교통비+전문인솔자 포함!)


후지불-1700달러(5개국비자비, 30일간의 식사와 사파리및 각종 투어비용)


총 600만원정도

여행 경비에 포함된 내용보기 - 선입금

인천-나이로비 구간 항공권
케이프타운-인천 구간 항공권
전 일정 숙박(호텔-2인1실/호스텔-4인1실)

일정표상에 나와있는 지역과 지역간의 모든 교통(버스/기차/페리)..(단,택시등을 이용한 단거리 이동은 제외)..최대 1억원 보상 AIG 여행자 보험(30일)


아프리카 7개국 배낭여행 자료집...인천공항세,현지공항세,유류할증료, 관광진흥개발기금..전 일정 전문 길잡이..인솔자 팁

여행 경비에 포함되지 않은 후지불  내역

4개국 비자비 (국경에서 발급/약130$)
나미비아 비자비$120 (사전 접수를 위해 선입금)
30일간 개인경비 일체(약1300~1500$정도 예상) → 식사,사파리 및 각종 투어비

*경로

나이로비->아루샤->세렝게티->킬리만자로->잔지바르->다르에스살람->루사카->빅토리아폭포->쵸베국립공원->마운->오카방고 델타->간지->빈툭->나우클루프->스와콥문트->케이프타운

더 자세한 내용은
http://india.co.kr/africa/tour/09_africa_30_winter.html

*준비물에 대한 공지 옮겨본다.

우리가 여행할 아프리카국가들은 적도근처에서 부터 남반구에 위치해 있기때문에 계절상 여름입니다.   (단 사파리를 하게될 세렝게티는 고지대라 밤엔 좀 추워요)

기온은  25~35도,  남반구로 내려갈수록 조금씩 더워집니다.  여행준비할때 감안하시고, 준비물은 일반적인 배낭여행과 큰 차이는 없습니다.

간단한 취사도구 정도 가져 가서도 되고,  짐은 가능하면 배낭으로 꾸리세요.캐리어 가져 가서도 되지만 크고 무거울 수록 여행이 불편해집니다.

환전 : 1600~2000$ 정도 필요...  80%는 50~100불짜리로  20%는 5,10,20불짜리로 바꾸세요.
 
필수품

 

 여권,비자,항공권,달러현금,신용카드,여행자수표,예비용사진 3장,여권비자항공권복사본, 복대, 시계, 황열병예방접종 증명서, 가이드북(세계를 간다"아프리카"편, "Africa on a shoestring", Loney Planet East Africa"  "Southern Africa" )

세면도구

 

 비누,샴푸,칫솔,치약,수건,물티슈

의류 

 

셔츠 또는 티종류, 양말,속옷, 긴바지/반바지 각2벌정도, 자켓, 스포츠샌달 또는 운동화, 모자, 선글라스, 배낭, 침낭(봄,가을용),,수영복(잔지바르엔 아름다운 해변이 많아요. 스노클링 가능)

약품

 

지사제,물파스,밴드류,연고,소독약,배멀미약,모기약,감기약,소화제, 생리대(여성)-현지에서도 구입가능

일용품

 

 자물쇠, 카메라, 손전등, 썬크림, 다용도칼, 등산용컵, 계산기, 멀티플러그(아프리카는 전기 플러그가 달라요 ,직사각형 3구)

기타

 

 빨래줄, 모기장, 손톱깍이, 귀이개, 손수건, 간단한 화장품, 비옷이나 우산, 사전이나 회화집, 책(읽을거리), 수저나 젓가락, 음식(고추장, 김, 라면, 가벼운 밑반찬 등)

 

글쓴이 송선순 http://www.parangse.kr/
 






아프리카를 꿈꾸다 - 황열병 예방접종





이른 아침 서둘러서 인천공항으로 향했다.
 

황열병 예방접종을 아침 아홉시반으로 예약했기 때문이다. 요즘 방학을 맞아 아프리카로 떠나는 사람들이 대거 몰려 국립의료원은 예약자가 밀려 1월이나 되어야 우리 차례가 된다하여 할수없이
인천공항으로 택할수 밖에 없었다.

아프리카를 여행하려면 적어도 10일 이전에 황열병 예방 접종을 하고 증명서를 발급 받아야 한다.

 

전염병에 대한 가장 효과적인 인공면역을 획득하기 위한 방법으로 아프리카를 방문하는 사람은
해당증명서 없이는 출입국 자체가 허용이 안되는 상황이기 때문에 친구는 학교 출근시간도 늦추고 먼저 공항으로 향했다.

인천대교의 개통으로  공항까지는 우리집에서 40분이면 넉넉하게 달릴수 있었다. 오히려 김포공항보다 더 가깝게 느껴질정도 시원스럽게 뚫린길이 환상이었다.

 

신기할만큼 긴 인천대교는 마치 신데렐라에 나오는 호박이 마차로 변한것처럼 눈깜짝할사이 만들어진 듯 하지만  우리가 모르는 사이 누군가는 수년간 애썼을것이다.

총길이 18.38 km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고 긴 다리를 지나는 기분을 더 만끽하기 위해 창문을 여니 우악.....바람에 자동차가 통채로 날라갈것같아 어지럼증을 동반하여 얼른 문을 닫고 달렸다.

2층 검역소에서 절차를 거치고 한번 맞으면 10년 유효하다는 증명서를 받아들고  공항서 부르조아틱하게 아침을 해결하고 친구는 학교로 나는 집으로 와 어질거리는것이 아무래도 벌써 그 황열병

 

접종의 효과가 나타나나..??..배도 아프고..

예방주사비와 인지세 16000원(1인당)


예약안하면 절대 안되고 한곳에서 하루 70여명 이상 접종을 한다니 그많은 사람들이 왜 무엇하러 아프리카에 가는것인지...참 궁금하게  했다.

 

주로 단체로 교회에서 선교활동하러 가는 사람들이 많다고도 했는데.. 아무튼 아프리카는 우리가 생각하는 만큼 오지는 아닌것은 분명하다. 찾는 사람이 그리도 많은데...

3일은 사우나 금지 운동금지..일주일은 몸살감기 증세와 구토까지 고약한 증세가 나타나게 될 것이라는 주의가 새삼 약속 줄줄이 잡힌 연말 모임은 완전 꽝될것이 뻔하다는 사실을  떠오르게 했다.

사진= 황열병 예방 접종 증명서(견본)  

접종 검역소

국립의료원 - 서울시 중구 을지로243 (02-2260-7092)
인천공항검역소 - 인천광역시 중구 운서동 2850 205호 (032-740-2700)
부산검역소 - 부산광역시 중구 중앙동 4가 17-3 (051-442-5330)
인천검역소 - 인천 광역시 중구 항동 7가 1-17 (032-883-7502)
군산검역소 - 전북 군산시 장미동 45 (063-445-4239)
마산검역소 - 경남 마산시 합포구 월포동 2-144 (055-246-2443)
김해검역소 - 부산 강서구 대저2동 2350 (051-973-6526)
통영검역소 - 경남 통영시 도천동 110-44 (055-645-3579)
포항검역소 - 경북 포항시 북구 항구동 17 (054-246-8545)
동해검역소 - 강원도 동해시 천곡동 838 (033-535-6022)
제주검역소 - 제주시 이도1동 1549-6 (064-722-3857)
목포검역소 - 목포시 항동 6-15 (061-244-0941)
여수검역소 - 전남 여수시 수정동 348 (061-665-2367)
울산검역소 - 울산광역시 남구 매암동 139-15 (052-261-7092)

예방접종 후 주의사항

- 접종 당일과 다음날은 과격한 운동을 삼가 하셔야 합니다.
- 접종 당일은 심한 사우나나 또는 목욕을 하지 않는게 좋습니다.
- 접종부위는 청결하게 유지 하십시오.
- 접종후 고열 ,경련이 있을때에는 곧 의사의 진찰을 받도록 하십시오.

접종대상

9개월 이상 어린이와 성인은 접종이 가능합니다.

접종시기 및 방법

위험지역 여행지에 도착하기 적어도 10일전에 맞아야 합니다.
해당 검역소에 미리 예약을 하셔야 합니다.
기본접종 0.5㎖ 주사

주의사항

- 연령 6개월 미만의 영아는 황열예방접종을 받지 않습니다.
- 임신중인 분은 주의하셔야 합니다.
- 다른백신과 동시 투여
- 홍역,BCG, B형간염백신과는 함께투여해도 항체형성에 방해를 받지 않습니다.
  그러나 콜레라 백신과는 적어도 3주이상의 간격을 두고 맞는 것이 좋습니다.

구비서류

여권, 국제공인 예방접종 신청서
수수료 - 신 규 : 21,000원

 

글쓴이 송선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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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를 꿈꾸다.






고민을 했다.


친구가 겨울방학을 맞으면 어디론가 떠나고 싶었고 의미있고 값진 여행을 하고 싶었다. 마치 치유불가능한 병을 앓는 여자처럼 떠나지 않으면 안된다는 어떤 강박관념을 가지고 사는것은 아닌지 스스로 뒤돌아 보지만 답변은 역시 떠나는것만이 최선이라는것.

다양한 삶과 다양한 문화를 접하고 사는것이 가장 지금 내가 처한 상황에서는 값진일이라는것을 깨닫는데는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가 않다.

꼭 무엇을 얻어오겠다는 확실한 목표가 있어서가 아니다. 주어진 시간이 많지 않을것 같다는 이상한 예감이 들어서도 아니다. 때를 놓치고 싶지 않아서다. 휙휙 잘 걷고 잘 먹고 잘 싸돌아 다닐 열정과 에너지가 있을때 조금 더 다양한 세상을 가슴에 담아보고 싶은 생각에서다.

여행의 종류도 다양하니 이다음 여건이 호전되면 더 훨씬 부르조아틱한 여행도 할 수 있을것이라는 생각을 가진다는 것 조차도 내겐 엄청난 사치다. 그런일은 로또에 일등으로 당첨이 되어 돈벼락을 맞는 일이 생기기 이전엔 상상도 할수없는 일..

죽을듯 고생을 할지라도 지금 건강할 때 배낭여행을 갈거다. 남미든 유럽이든 닥치는대로 굶주린 사자처럼 정신없이 떠돌아다니고 싶다. 빛깔있는 욕망을 잠 재울수가 없다.

맨처음 남아프리카와 이집트를 한달 계획했다가 수포로 돌릴수 밖에 없었다. 여자둘이서 배낭을 메고 남아프리카  수도 요하네스버그에 내리는 순간부터 봇짐과 목숨을 반이상 흑인들에게 내 놓은거나 마찬가지라는 엄포성 발언때문. 치안의 문제는 노력하고 조심한다고 해결 될 문제가 아니니 고민하지 않을수가 없었다.

과연 안전의 문제를 도외시하면서 강행할 수 있을지  도저히 자신이 서지 않았다.

no를 거꾸로 쓰면 전진을 의미하는 on이 된다

 

모든 문제에는 반드시 문제를 푸는 열쇠가 있다 끊임없이 생각하고 찾아내어라. 노먼빈센트필의 말대로 no를 거듭거듭 써가다보니 풀수있는 해결의 실마리를 찾았다.

원시의 아프리카 7개국을 다 돌면서 안전하게 여행할수있는 방법. 역시 여행을 많이 한 친구가 여기저기를 수소문해서 알아왔다. 10~20여명이 함께 떠나는 배낭여행을 겸한 호텔팩.

일단 일정을 직접 짜지 않아도 된다는것에서 머리가 가벼워졌다. 단체로 움직이면 아무래도 강도들의 접근도 용이하지 않고 영어도 좀체로 통하지 않는곳이라서 가이드 한사람이 함께 상주한다니 그것또한 금상첨화다.

인류의 기원, 끝없이 펼쳐진 야생의 대 서사시 사바나에 펼쳐진 푸른 초원에서부터 킬리만자로를 넘어 아프카 최남단 희망봉까지 이르는 대 장정! 아프리카 오버랜드 여행의 결정판이라고 하는 아프리카 7개국 핵심 일주 30일.

그야말로  가슴이 두근거려 애인 만나러 가는 심정과 똑 같다. 하지만 아직도 처리해야 할 숙제들이 많이 있다. 그 숙제는 차근차근 아프리카를 공부하면서 생각해 보기로 한다.

일단..떠나는것으로 결론은 내려졌고 이제 서서히 준비하는 과정과 풀어야 할 숙제만 남은 상태다.
마음은 이미 푸른 초원을 달리고 있다.

케냐
탄자니아
잠비아
짐바브웨
보츠와나
나미비아
남아공

시간을 낼 때는  가장 순도 높은 시간을 자신에게 줄 수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자신이야말로 가장 소중한 존재이기 때문에 먼저 자신에게 가장 좋은 시간을 투자할  수 있어야 한다.

 

자신의 라이프 사이클에 가장 잘 맞는 시간대에  자신을 훈련하라. “춤쟁이는 매일 춤 춰야하고, 환쟁이는 매일 그려야 하고, 글쟁이는 매일 써야 한다. 검객이 매일 수련하지 않으면 목숨이 위태롭듯 매일 수련해야 한다.”

나는 그 중 어디에 해당하는가?

 

글쓴이 송선순 http://www.parangs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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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기비치에서의 이틀





글쓴이 송선순     http://www.parangse.kr/

잔지바르의 첫 밤.저녁내내 폭우가 쏟아졌다.
양철로 지붕을 만든 탓인지 맨 꼭대기기층인 우리 침실은
가슴으로 우박이 떨어지는 듯 했다.
습한 기온과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몹시 힘든 밤을 보내다
호텔서 제공하는 아침식사를 마치고 바닷가로 이동했다.

이 아프리카의 아침 식사는 아주 간단하다.
빵 두 쪽에 주스한잔 그리고 계란하나에 파인에플 한 조각이면
끝이니 저절로 다이어트 될 판이다.

스톤타운옆을 지나오다 과일시장에 나오는
두리안의 고소한 냄새의 유혹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토마토와 오이등 우리나라 과일들과 비슷하지만
열대과일들이 산처럼 쌓여진 시장에서 이것저것 고르는 재미가 쏠쏠했다.

가장 잘 익은 두리안을 사서 나눠먹을 생각을 하니
미리부터 입안에 침이 고였다.

잔지바르의 해변은 동, 서, 남, 북으로 나뉘는데 대표적인 비치는
북부에 있는  능기(Nungwi Beach)로 유럽인들의 한가로운
해변휴양지 같은 느낌을 주며  
동부에 있는 파제(Paje Beach)비치는 한적하고 일출을 볼 수 있어 좋다

우리 일행은 두 대의 봉고차에 나눠 타고 한 시간여 달려 썬셋 크루즈로 유명한
능기비치의 사피나 호텔에 숙소를 잡았다. 이곳에서 이틀을 보내게 될 예정이다.
전통적인 가옥으로 만든 단층짜리 숙소가 열대나무들과 어우러져
휴양지다운 맛을 풍기며 몹시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잔지바르보다는 목욕물도 잘 나오고 시설이 좋아 들뜬 것도 잠시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밤 일곱 시까지는 기다려야만
자가 발전기를 돌려 전원을 켤 수 있다는 말에
모두들 그 시간이 오기만을 기다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짐을 숙소에 던져 놓고 우르르 달려간 능기비치는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답고 고운 밀가루처럼 하얀 모래사장이 이어져 있었다.





먼저 도착한 유럽인들이 진을 치고 있는 해변 곳곳에는
현지인들이 만든 목걸이와 그림들을 전시해서 팔고
가끔 마사이족 복장으로 춤을 추는 공연도 벌어지고 있었다.

물속으로 깊이 들어간 일행이 성게에 찔려 피가 나자 현지인의 급 처방은
휘발유를 상처부위에 먼저 뿌린 다음 파파야 즙을 짜서 그곳에
발라 주었고 거짓말처럼 씻은 듯이 통증이 사라지는 효과를 보게 되었다.

일몰이 유명한 만큼 오후 네 시에 출발한다는 썬셋크루즈를 기다리다
갑자기 엄청 심한 바람과 함께 쏟아 붓는 스콜성 비로
모든 일정은 취소 될 수밖에 없었다.

아프리카에서 내리는 비는 언제나 강하게 그러나 매번 짧게 내린다.
비가 그 친후의 바다는 더욱 더 고요하게 밤을 맞고 있었다.

해변에 지어진 고급스런 호텔들이 즐비하지만
우리처럼 평범한 배낭 여행객들이 머물기엔 너무나 고액이다.
하룻밤 2천이나 3천 실링정도 하고
우리들이 머문 사피나 호텔은 방 한 칸에 우리 돈 7만 원 정도 하는 값이었다.

밤 일곱 시에 전기가 들어와 열두시면 호텔 전체가 전원이 꺼지기 때문에
새벽에 일어나 책을 보거나 하는 일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아무래도 전력난이 심각해 자체 발전기를 가동시키고
또한 전력낭비를 막기 위해 최선의 방책이라 해도  몹시 불편한 것은 사실이었다.

21세기를 살면서  손전등에 의지해야 한다는 사실이 서글펐으나
우리 숙소 옆의 고급 호텔은 밤 내내 휘황한 불빛이 비치고 있었다.
노트북 충전을 위해 호텔입구의 경비원에게 여러 번 헬프미 플리이즈를
했지만 번번이 거절당해 더욱 더 애타게 만들었던 곳이다.

이곳 잔지바르는 인도의 영향을 받아 호텔마다 인도식 헤나를 많이 권하고
마사지도 권하지만 질적으로 너무나 형편없다는 사실은 받아본 사람들이 모두 다 고개를 저었다.

밤이면 현지인이 운영하는 술집에 가서 보면 젊은이들은 주로
당구를 즐기고 작은 티브이 앞에 모여 축구경기를 보면서 열광하는 모습이
대단한 축구광들인 듯하다.

능기비치 옆 현지인 마을은 수영복을 입은 사람은 출입금지라는 표시가 있어
상당히 보수적인 부분도 있고 사진을 찍기 위해 카메라를 대면
여전히 심한 거부반응을 보낸다.

능기비치에서 만난 유럽 사람들은 에메랄드빛 바다에 떠 있는
다우’(dhow·바람의 힘으로만 움직이는 배)와 해풍에 몸을 맡기며
인생의 여유를 즐기는 사람들이었다.

아무리 전기불이 들어오지 않아 불편하다 해도
22세기에 다시 찾고 싶을 만큼
평화롭고 하얀 밀가루처럼 고운 모래의 감촉을 잊을 수가 없는  낭만적인 곳이다.









8일째 인도양의 흑진주 잔지바르를 향하다.





글쓴이 송선순      http://www.parangse.kr/

집 떠나온지 벌써 일주일이 지났다.

고온 다습한 다르에스살람. 다르에스 살람은 탄자니아의 수도로
까마귀 떼들이 떼 지어 노래하는 통에 새벽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해변, 인도양에 근접해 있음을 알리는 첫 신호였다.

아프리카에 도착하는 순간부터 여직 해발 2천고지 이상의
고지대에 머물다 처음으로 평지에 머문 탓인지 몹시 덥고 습한 기온이다

잔지바르로 떠나기 전 아침 일찍 다르에스살람의 시내를 돌아보기로 하고 길을 나섰다.
페리 선착장을 거쳐 피쉬마켓까지 가는 길은
도심의 번화가답게, 탄자니아의 수도답게 잘 정돈된 길과 정장을 입은 신사숙녀들이 많이 오갔다.

처음으로 본 인도양은 생각보다 맑았다.
해변 가까운 곳에서도 비취빛이 보이는 것이 아직도 오염이 되지 않은
청정해변임을 나타내는듯하여 경이로웠다. 해변엔 많은 사람들이 인도양의 바닷바람에
휴식을 취하고 있었고 가판에서 신문을 사서 읽는 사람들이 많았다
탄자니아는 아프리카의 다른 나라와는 달리 스와힐리어를 공용어로 사용한 탓에
신문을 많이 읽는다던 그 말을 실감하게 했다.

피시마켓은 바닷가에서 막 잡은 생선들을 잡아 올리는 바닷가 현장에 있었고
많은 사람들이 싼 경매를 하기 위해 한꺼번에 몰려들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생동감이 넘치는 그 자리엔 음식을 만드는 여자들은
하나같이 머리에 하얀 모자를 쓰고 있어 위생적인 모습을 보였지만
선뜻 음식을 사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음주주'라고 부르는 바나나 숯불구이나 튀김등도 우갈리와 함께 요리하고 있었다.

산통은 그때 터졌다. 거리에서 팔고 있는 거대한 문어를 삶아 슬라이스 된 조각 문어를
사기위해 우리일행은 그 문어 맛에 집중하고 있었고 그 틈을 타 쥐도 새도 모르게
어떤 언니의 카메라를 강탈당해 굉장히 우울하게 만들었다.

호텔로 다시 걸어가겠다는 생각을 접고 택시를 잡아타고 돌아와 짐을 꾸려
잔지바르행 시버스(페리호)를 타기 위해 항구로 출발했다.

페리호를 기다리며 줄을 선 긴 행렬에는 다양한 국적을 가진 사람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서양의 노란머리부터 인도인들, 이슬람들, 흑인 백인 황인종 할 것 없이
인종 백화점이라고 하면 맞을까?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모여  휴양 도시인 잔지바르행을 기다렸다.
우리는 그곳에서 4박5일을 머물 예정이다. 배 삯은 미국달러로 25달러였다.


약 세 시간을 달렸을까? 드디어 도착한 잔지바르는
강렬한 태양에 온 몸이 타들어 갈 듯 한 뜨거운 날씨에 포터들이
서로 짐을 들어주겠다고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고
인도양의 바다에는 예전 페르시아 상인들이 탔다던 다우선이 지나가고 있었다.

에메랄드빛 바다 속의 치어들이 페리호 근처로 달려드는 모습이 환하게 보일만큼 투명하게 맑았다.



검은 해안, 잔지바르

잔지바르는 인도양의 흑진주로 불리는 아름다운 산호섬이다.  향신료의 고장인 이곳은
1천년 이상 아프리카인과 아랍인,인도인들이 함께 살아온, 다문화가 공존하는 섬이다.

잔지바르(Zanzibar)라는 이름은
페르시아어로 잔지(Zanzi:흑인)와 바르(Bar:사주해안)의 복합어로 '검은 해안'을 의미한다.
이 이름이 붙여진 것은 계절풍을 따라 교역을 하러 온 페르시아 상인들에 의해서이다.
그들은 다우라 불리는 범선을 타고 12월쯤 잔지바르로 왔다가 6월쯤 역풍을 이용해 돌아가곤 했다.
이 섬에 처음 도착한 그들은  백옥같이 하얀 백사장에 흑인들이 살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잔지바르’란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선착장에는 출입국 관리소가 있어 많은 사람들이 붐볐다.
잔지바르에 가려면 탄자니아의 비자가 있어도 다시 입국심사를 받아야 한다.
여권까지 준비하여. 국경에서 심사받듯 다시 한 번 입국수속이 필요한 까닭은
잔지바르가 오랫동안 탄자니아의 섬이 아닌 독립국으로 지냈던 역사 때문이다.
비록 1964년 본토의 탕가니카와 잔지바르가 합쳐서
탄자니아 되었지만 오늘 날까지 잔지바르의 독립 요구는 계속 되고 있다한다.

한참을 출입국 심사를 받느라 지체하고 있는 동안
뜨거운 열기에 온 몸에서는 비가 쏟아지듯 땀이 흘러 내렸다.
그 많은 사람들이 통행하는 페리호의 선착장 입구가 좁아서
사람과 자동차, 리어카들이 섞여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우리 일행들은 개조된 리어카 두 대를 불러 짐을 싣고 숙소로 긴 행렬을 시작.
드디어 스톤타운의 카리브 인이라는 예약된 숙소를 찾기 시작했다.

스톤타운은 아랍인들의 석조 가옥 촌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문과 발코니가 있는
고층의 집들이 빽빽하게 미로를 이루고 있어 자칫하면 길을 잃기 쉬운 곳이라고 한다.  

잔지바르의 특성은 각 집안의 대문이 부의 상징이라더니 걸어 보면서 보니
문마다 화려한 조각을 하거나 스파이크를 박아 장식했고
조각 또한 다양했다.
꽃이나 나뭇잎을 조각한 것은 부에 대한 소망을, 물고기는 다산을  나타낸 것이라고 했다.
또한 문의 크기와 사용하는 나무 재질로 사회적, 경제적 지위를 나타내고
문에 붙어 있는 놋쇠로 된 스파이크는 인도 건축양식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인도에서는 코끼리가 집에 와서 부딪히는 경우가 있어 그것을 방지하기 위해
문에 놋쇠로 뾰족하게 생긴 스파이크를 박아 비록 잔지바르에 코끼리는 없지만 그 영향을 받아 만들어진 것이다.

잔지바르에 사는 사람의 대부분은 이슬람교도로 거리의 공원에도 모스크 가 있었다.  
공원에서 한가로이 휴식을 취하는 사람들이 자연의 일부처럼 보였고
이처럼 평화로운 곳이 잔혹하기 그지없는 노예시장의 거점이었다니
씁쓸한 역사의 흔적들을 어떻게 지울 수가 있을까?

인도양의 바람은 아픈 역사를  상쇄시키기라도 하듯 상큼하게 불어댔다.

카리브 인으로 숙소를 정했으나 불행하게도 전기불이 들어오지 않았다.
오후 일곱 시를 넘어야 자체 발전기를 가동하여 불을 켤 수가 있다는 통보다.

어두컴컴한 노예감옥을 연상하게 하는 그 숙소는
관광지의 특수를 노리는 바가지 값인지 일인당 2만원.
다닥다닥 번호가 붙은 방 한 칸에 4만 원 정도를 주고 자야하다니
우리나라의 새로 지어진 고급 모텔들의 가격들과 맞먹는 고가였지만
가격대비 시설은 천양지차였다.

천장에 달린 커다란 선풍기와 누렇게 퇴색된 모기장은 그 자체의
냄세 만으로도 역겨워 여행이란 누군가가 머물다 간 낡은 벽지 앞에서
옷을 벗는다던 표현이 절로 생각나게 만들었다. 나도 한때
그 낡은 모기장을 쓰다 떠나는 여행객의 한 사람일뿐이다.

배낭여행이란 조건을 탓 할 여유가 주어지지 않는 것이다.
주어진 여건에 최선을 다해 적응하는 것만이 최후까지 가장 잘
즐길 수 있는 방법임을 이미 터득한지 오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그 방에 머물 이유가 없는 우리들은 그대로
밖으로 뛰쳐나와 해변을 걸었다.

한없이 드넓은 바다는 세상의 모든 시름을 다 잊게 해 주었다.
고운 모래사장을 걷다보니 여행의 피로, 수개월째 나를 붙잡고 있는 생각의 울타리조차도
어쩔 수 없는 운명적인 일로 받아들여졌다.

기분 좋은 바람이 불고 있는 해변에는 다국적 사람들이 모여 석양을 즐기고 있었다.
각자 자기의 분수에 맞는 장소에서.

우리 일행은 모래사장을 걷다 전망 좋은 곳을 선택해 자리를 잡았다.
분위기가 부르조아틱 한 만큼 가격이 만만치 않았지만 모처럼 서울에서  삼겹살 먹는 값을
지불 할 생각으로 스파게티와 킬리만자로 맥주를 시켜 잔지바르의 첫 밤을 맞았다.

모래사장에서 뛰놀고 있는 수많은 아프리카인들의 활달한 모습을 볼 때마다
아직도 이질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내가
오랫동안  잘못된 편견에 길들여져 있음을 다시 한 번 깨달았던 순간이다.

잔지바르에 대한 팁

스톤타운의 복잡한 골목 못지않게 잔지바르의 역사는 복잡하고
그 사연도 절절하다.
1499년 바스코 다 가마의 발길이 닿은 후 포르투갈의 지배를 받았고,
1832년부터 150년 동안은 아랍 해상왕국 오만의 술탄이 통치했다.
술탄의 궁전이었던 경탄의 집을 비롯한 이슬람 유적지는 대부분  이 시대의 것이다.

아랍의 술탄은 이 곳 잔지바르 노예시장으로 동아프리카에서
생포한 아프리카인들을 데려와서 유럽 상인들에게 팔았다.
잔지바르는 향료와 노예를 노린 유럽 상인들의
아프리카 전초기지가 되었고, 술탄은 막대한 부를 축적하였다.


잔지바르의 볼거리

영국대성당
입장료-3500실링

영국 대성당은 1873년 폐쇄된 과거 노예시장 자리 위에 세워졌다.  
성당의 방향은 죽은 노예들이 실려 나갔던 방향대로 지은 것이다.

노예를 감금하던 대성당의 지하를 직접 들어가 보니 두 칸의 쪽방이 보존되어 있었다.
이 어둡고 좁은 방에 노예들을 쇠사슬로 묶은 채 감금해 두었다고 한다.
아직도  쇠사슬이 있었으며 천장이 낮아 일어서지도 못하는 곳에
수십 명의 노예가 쇠사슬에 매달려
팔리기를 기다리는 상품으로 있었다니 오싹하기 그지없었다.

오래전에 지어 방치한 탓인지 몹시 낡은 그 성당은
기독교식 성당과 고딕 건축, 아랍풍이 조화되어 잔지바르 특유의 조각이 있고
탐험가 리빙스턴은 노예무역을 유럽에 알려 이를 금지시키는데 노력을 했다.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후 농사일과 사금 채취 등 많은 노동력이 필요했던
유럽인들은 튼튼한 신체의 노예들이 필요했다. 그러나 원주민인 인디오들은 유럽인들이 갖고
온 질병이나 열악한 대우로 숨졌고, 장시간의 힘든 노동에는 적합하지 못했다.
결국 악조건을 버텨내고 긴 항해에서 살아남은 튼튼한 신체조건의 흑인들이 가장 인기가 좋았다.

그 흑인 노예들은 주로 부족간의 전쟁에서 진 사람들을 흑인들이 직접 잡아
백인들에게 팔아 넘겼다는 소리를 들으니 더욱 더 비감이 들었다.

"커피와 설탕이 유럽인의 행복을 위해 꼭 필요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이 두 식물이 두 대륙을 불행에 빠뜨렸음은 확실하다. 그들은 이것을 심을 땅을 얻기 위해
아메리카를 공략했고, 이것을 키울 사람을 얻기 위해 아프리카를 약탈했다."
어디선가 읽은 한 대목의 글이다.

향신료 투어
투어비-5천 실링

잔지바르는 각종 향신료가 유명하다.
아프리카의 순수한 블랙과 이슬람이 만나 뿜어 내는 조화로운 향기라고 한다.
농장을 직접 방문하면 현지인이 직접 설명을 해 주는데
천연색조화장품에 들어가는 식물부터 커피향이 나는 나무
바닐라 향을 만드는 나무
우리나라 생강과 똑 같은 향을 내는 식물
쵸코를 만드는 향신료의 재료가 되는 열매 등 다양하고 신기한 나무와
열매를 직접 보고 냄새를 맡게 해 준다.
어느 열매를 문질러 직접 입술에 바르자마자
금방 진한 오렌지색 립스틱이 되어 신기하기 그지없는 순간이었다.
투어에 참여한 여행자들을 위해 현지인들이 직접 야자수로 만든 모자와 가방을
선물하기도 하고 각종 과일들을 깎아 대접한다.
아프리카의 열대 과일나무들도 함께 구경할 수 있는 좋은 기회다.

포장마차촌
포로하니 공원에 열린 장터에는 구운 문어, 오징어, 소고기나 간 꼬치,
염소고기 등 음식과 수산물을 팔고 있다. 불에 직접 구어 주는 오징어와 삶은 문어는
일반 육지의 것과는 다른 싱싱한 맛으로 인기를 끌고 있다.
저녁 6시가 넘으면 수많은 사람들이 몰린다.

*머큐리의 고향 잔지바르

또한 이곳 잔지바르는
'그룹 퀸, 프레디 머큐리의 고향, 잔지바르'에서는 프레디 머큐리의 고향이다.

퀸의 리드 보컬 프레디 머큐리(Freddie Mercury)는 에이즈로 사망했다.
아프리카 잔지바르(현 탄자니아) 태생인 머큐리, 4옥타브를 넘나드는 목소리로
온 세상을 사로잡았던 그도 에이즈를 피해가지 못했다.

양성애자였던 머큐리는 에이즈에 감염 사실을 부인하며 말년에 은둔생활을 했다.
결국 1991년 11월 24일 에이즈 감염을 공개한 직후 세상을 떴다.

타망고의 이야기  

뮤지컬로도 공연되는 프로스페리 메리제가 쓴 <타망고>는 흑인매매가 성행하던 시대에 흔히 일어났던 노예들의 반란에 대한 이야기다.

프랑스 국적의 희망호는 르두 선장이 이끄는 튼튼한 노예선이었다. 르두 선장이 아프리카의 노예 해안에 왔을 때 이름난 전사이자 노예상인인 타망고를 만났다. 타망고는 30명 가량의 노예를 팔아넘겼다.

거래의 성사를 축하하는 파티에서 타망고는 술에 취한 나머지 그의 아내 중에 가장 아끼던 에이세를 르두 선장에게 팔아넘겨 버렸다. 다음날 술이 깬 타망고가 이 사실을 알았을 때 노예선은 이미 출항하고 난 후였다.

그는 서둘러 작은 배로 쫓아가 선장을 설득했다. 그러나 선장의 눈에 힘세고 건장한 타망고는 비싼 값을 받을 수 있는 노예일 뿐이었다. 선장은 타망고를 다른 노예들과 함께 배 밑바닥에 실었다.

다음날 아침, 타망고는 갑판위에 에이세를 발견한다. 가슴이 찢어질 듯 아프지만 그녀를 구해줄 수 없었다. 타망고는 반란을 결심했다. 에이세는 그의 부탁에 따라 쇠사슬을 자를 수 있는 도구를 빵 속에 숨겨 건넸다. 타망고는 자신과 동료들의 몸을 묶고 있는 쇠사슬을 조금씩 자르며 계획을 세웠다.

어느 날 모든 쇠사슬이 끊기고 타망고의 외침에 따라 무리를 이룬 흑인들이 갑판 위로 쏟아져 나왔다. 긴 시간 전투가 이어지고 마침내 타망고는 승리의 외침을 했다. 르두 선장을 비롯한 백인들은 남김없이 바다에 던져졌다.

그러나 타망고는 배를 다루는 법을 몰랐다. 실수로 돛대가 부러지고, 구명정에 옮겨 탄 사람들은 배가 뒤집혀 죽음을 맞이했다. 남은 이들은 심한 바다에 흔들리며, 때로는 타는 듯한 햇빛을 받으며 먹을 것을 위해 서로 싸웠다. 과자 한 조각에 싸움이 일어났고, 그 때마다 약자는 죽는 것이다.

얼마의 시일이 지났을까 인근을 지나던 영국 선박이 정처 없이 떠도는 선박을 발견했다. 그곳에는 죽은 흑인 여자와 겨우 사람이란 것을 분간할 수 있을 정도로 앙상한 흑인 남자가 있었다. 부서진 돛대의 발치에 앉아있는 그는 말하지도 움직이지도 못한다. 그가 바로 타망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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