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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자니아의 수도 다르에스살람으로 향하다.






강행군하며 만다라 산장까지 오르고 난 후유증인지 종아리에 알이 박힐 만큼 온 근육이 뒤틀리는 듯 힘들게 한 아침이다.

사실 킬리만자로 등반이후 곧장 숙소로 간 것이 아니다.

모시에서 선교활동을 하는 서울숲 교회 오종성 선교사가 우리 일행들을 저녁식사에 초대를 해 씻지도 않은 채 교회로 향했다.

마음 넉넉해 보이는 선교사 부부는 짭짤한 닭도리탕부터 향긋한 오이나물과 집에서 직접 만들었다는 두부로 만든 된장 찌개 등 여행에 지친 우리들을 위해 정성 가득한
한식 부페를 만들어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두 분의 눈물겨운 선교활동에 대한 사연은 우리의 가슴을 훈훈하게 해 주었다.

순수한 봉사활동을 오지에서 2년 동안 펼치고 있다는 오선교사 부부는 아프리카 생활의 고단한 점과 보람을 느끼는 부분은 다양한 화제로 우리들의 궁금증을 풀어 주었다.

셈이 흐려 두 가지는 한꺼번에 절대로 계산하지 못하는 아프리카 인들의  답답함과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태권도를 잘하는 줄 알고 있어 강도가 한국 교포 집을 습격할 땐 제일 먼저 다리를 공격한다는 소리에 우리들은 실소를 머금을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닌 남을 위해 희생봉사하며 일생을 살기고 마음먹는다는 것은 아무나 하는 일은 아닐 것이다.

평화로워 보이는 두 부부의 삶을 엿보면서 한국국제협력단(KOICA)에서 파견한 해외봉사단원들이 다양한 루트로  많이 파견되어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는 소리를 듣고 깜짝 놀라기도 했다.

아프리카의 현실을 제대로 알고 있는 선교사 부부의 이야기들을 듣다 숙소로 돌아오기 위해 거리로 나섰으나 가로등불 하나도 없는 거리는 두려웠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20분 이상 걸어 무사히 숙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칠흑 같은 어둠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깨달았던 밤. 모시를 방문하는 한국 여행자들에게 언제나 가이드가 되어 줄 수 있다는 오 선교사의 전화번호이다.

메일을 보내 미리 형편을 알아보는 한 가지 방법도 있다.

ppppro1@gmail.com
076-478-2613 오종성 선교사.

휴양도시 잔지바르에서 며칠 유하기 위해 다르에스살람으로 떠나기 위해  차에 올랐다. 35인승 미니버스에 짐을 싣고 나니 한자리의 여유도 남지 않았다.

다르에스살람은  일찍이 동아프리카 연안에서 무역업으로 활약한 아랍계 사람들이
이용하던 항구답게 그 이름도 '평화로운 항구'라는 뜻의 아랍어로 붙여졌다.

지금도 탄자니아의 입법 수도는 내륙 중심에 있는 도도마이지만, 항구도시 다르에스살람이 사실상 탄자니아의 정치와 경제의 중심지 역할을 하고 있다

모시에서 다르에스살람까지는 일곱 시간 이상을 차로 달려야 하는 거리. 종일 차를 타야 할 상황이었으나 전날 산행에 지친 일행들은 곧바로 약속이나 한듯이 잠에 빠져 들었다.

세 시간여 들렸을까? 번듯한 휴게소에서 자유배낭여행을 나온 한국학생 두 명을 만났다.


한 달 동안 고생한 다양한 이야기와 준비 없이 킬리만자로 5700고지까지 올랐다가 만년설에 피부가 껍질이 벗어질 만큼 검게 탔다고 말했다. 아니나 다를까 콧잔등이와 볼 옆에 아직도 얇은 피부막이 벗겨지고 있었다.

휴게소는 현대식 화장실과 식당까지 차려져 있었고 대형 과일점이 곁에 붙어 있어 마음껏 과일을 사 먹도록 산더미처럼 쌓아 놓고 있었다. 망고를 파는 어린 소년이 어찌나 망고를 잘 손질하던지 다루기 힘든 망고 처리법을 확실하게 배울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푸른 껍질을 벗기면 노랗게 익은 망고는 달콤하고 풍부한 과즙이 환상적인 맛으로 빨려들어왔다.

얼마나 달린 것일까? 차장 밖은 다양한 아프리카인들의 생활을 그대로 투영해 주고 있었다. 비가 내리다 햇살이 비추고  어두운 구름이 몰려가 비를 흩뿌리고 있어도
어린아이들이 비를 맞으며 고무줄 하는 풍경은 인종과 상관없이 천진난만 그 자체의 모습으로 비춰졌다.

모시에서 다르에스살람까지 끝없는 사바나 지대를 달리는 버스는 모내기 하는 모습과 알로에가 아닐까 하는 의혹이 들었던 초록의 넓은 농장을 보여 주었다. 그것은 사이잘삼(Sisal)으로 밧줄을 만드는 재료라고 했다.

1960년대 탄자니아 최고의 환금작물 중 하나로 대규모 집단농장에서 재배되어 수출되었고  지금도 탄자니아 곳곳에서 바나나와 커피나무 등과 함께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작물이라고 한다.

어둠이 짙어올 무렵 우리는 숙소, 이코노 롯지에 도착했고 기나긴 하루의 여정을 달래며 잠을 청했다.

글쓴이 송선순      http://www.parangse.kr/






아프리카 여행 - 킬리만자로를 오르다






새벽 네 시. 


모시의 숙소 YMCA는 더웠다.더 자보려고 뒤척이다 잠을 깨 그대로 포기하고 말았다. 드디어 킬리만자로를 가는 날이다.

아프리카 대륙의 최고봉인 킬리만자로는 스와힐리어로  '빛나는 산' 혹은 '위대한 산'이라는 뜻이다.

원래 킬리만자로는 케냐의 땅이었다.  그 당시 케냐는 아프리카 최고봉인 킬리만자로와 두 번째인 케냐 산을 모두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케냐는 영국 여왕이 다스리고 있었고,  탕카니카(지금의 탄자니아)는 그녀의 조카인 독일 황제가 지배를 하고 있었다.

산을 좋아하는 조카는 숙모에게 둘 중 하나만 달라고 졸랐다.  조카를 사랑하는  영국 여왕은 킬리만자로가 탕가니카로 들어가도록 지도에 자를 대고 국경을 그었다.
이로써 아프리카의 왕관 킬리만자로는 조카의 생일선물로 탕카니카에 넘어가 버렸고   케냐와 탄자니아의 국경도 이 일로 결정지어졌다는 책의 내용이 오버랩 되는 아침이었다.

아침 식사를 위해 아래층에 내려오니 환한 아침햇살에 만년설이 품안에 달려들듯 가까이 다가왔다. 좀처럼 킬리만자로의 봉우리를 보기 쉽지 않은데 운이 많다는
웅성거림 들이 있었다. 여기저기서 만년설을 카메라에 담느라고 분주했다.

우리 숙소 YMCA의 아침식사는 빵 두 쪽에 쨈과 버터 그리고 오믈렛이 전부다 뜨거운 우유한잔과 함께.

가볍기 그지없는 식사를 마치고 차에 올라 킬리만자로를 향했다. 모시 시내로부터 40여분 달리니 입구가 나오고 거리엔 차가 멈출 때마다 바나나와 작은 자두를 사라고 차카족들이 달려들었다.

해발 2천고지에서  출발해 2천7백의 만다라 산장에 이르는 산행에 앞서 입산 수속을 밟는 동안 나눠준 점심 도시락을 먹고 각자 우비를 챙겨 천천히 가이드들을 따라 오르기 시작했다.
 

가이드들의 대부분은 차카족(Cagga)인데 그들은 킬리만자로와 모시 부근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로 가이드 없이는 절대 산행을 허락하지 않는다고 한다.

우리는 킬리만자로 입산 비용을 총 100불씩을 냈다. 60불은 입산비 그 외 40불은 일부 가이드비와 점심과 차량대금이라고 한다. 입산비가 우리나라 돈으로 7만원을 훌쩍 넘는다고 생각하니 상당히  비싸다는 느낌이 들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아프리카 대륙 최고봉이며 세계 최대의 휴화산인 킬리만자로는 풍부한 물과 먹이로
수많은 동식물들을 키워온 사바나의 어머니로 아프리카 여행의 빼 놓을 수 없는 진수이기 때문이다.

여행 팀원들 중 일부는 5천8백고지 최정상에 도전하겠다고 미리부터 각오해 4박5일의 일정을 잡고 든든한 포터와 가이드들을 동반하고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신체적인 여건이 허락한 다해서 다 성공하는 것은 아니고 첫째 날씨가 받쳐 주어야 하고 둘째 고산병을 이겨내야만 한다는 설명을 들었다.

최정상에 오르고 나면 성공했다는 증명서를 발급해 준다하니 그만큼 어려운 도전임에 틀림없나 보다.

지나가는 포터,친구가 돈을 주니 너무나 좋아했다.

등반루트는 여러 개가 있지만 우리는 가장 일반적인 마랑구 루트, 즉 코카콜라 루트라고 하는  루트로 오르기로 했다."킬리만자로의 정상 부근에는 말라 얼어붙은 표범의 시체가 하나 있다.
 

그 높은 곳에서 표범은 무엇을 찾고 있었던 것일까…."

헤밍웨이의 소설 <킬리만자로의 눈>에 나오는 구절보다는 조용필이 불러 히트 쳤던 '킬리만자로의 표범'으로 우리에겐 아주 친숙한 산이다.

"짐승의 썩은 고기만을 찾아다니는 산기슭의 하이에나. 나는 하이에나가 아니라 표범이고 싶다. …눈 덮인 킬리만자로의 그 표범이고 싶다. 자고 나면 위대해지고 자고 나면 초라해지는 나는 지금…"

세상살이에 지친 사람들의 방황과 꿈, 희망을 대변하는 듯 한 긴 독백이 이어진
이 곡은 작가 양인자씨가 신춘문예에 낙방하고 자신의 작품이 언젠가 당선되는 날
당선소감으로 미리 쓴 것에 남편인 작곡가 김희갑씨가 곡을 붙여 만든 노래라고 한다.

썩은 고기같은 비교적 쉬운 먹잇감만 찾으려 하는 하이에나처럼 현실의 이익만을 쫓지 많고  삶의 목적과 자신의 꿈을 찾아가야겠다는 이야기로 설사 꿈을 이루지 못한다 해도  정상에서 죽은 표범처럼 끝까지 노력하겠다는 의지를 말한 것이라고 가져와 읽은 책에서는 표현하고 있었다.

이정도의 산행은 식은 죽 먹기라고 큰소리치던 친구의 말대로 편안한 마음으로 오르기 시작했으나 중간 지점부터 쏟아지는 폭우에 당황하여 일행 모두는 우비를 입고 재정비했다.

제일 앞과 제일 뒤에 따라오는 현지인 가이드가 있었으나 많은사연들이 일어나고 있었다.

산개미들이 바지사이로 거침없이 공격하는 바람에  우리들은 갑자기 튀스트를 추듯 온 몸을 틀며 개미 소탕 작전을 하는가하면 습한 기온에 고소증세를 보이기도 했다.

만다라 산장에 오르기까지 중간 중간 완만한 비탈길이 있어여유 있게 등반할 수 있도록 길이 조성되어 있었다.

옆에 자라고 있는 열대 우림의 우거진 나무들의 줄기를 타고 올라가는 이끼들이 치렁치렁 매달려 있어 마치 인디아나 존스 영화 속의 한  장면을 보는듯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최정상을 향하는 등반 자들의 짐을 지고 올라가는 포터들의 무거운 발걸음을 뒤따라올라 가면서 측은한 생각이 들었던지 친구는 만나는 포터들마다 천 실링, 이천실링을 도네이션 하고 있었다.

막을 수 없는 기부다. 쏟아지는 비를 우비가 막고 있었지만 안에서 솟는 땀방울에
옷은 축축하게 젖어 들어가고 반드시 우비는 필수라고 하던  가이드 말을 듣지 않았다면 중간에서 포기하고 내려와야 할 만큼 빗줄기가 거셌다.

가이드들은 서둘러 오르는 우리들을 향해 뽈래뽈래(천천히)를 외치며 인도했다. 가이드들의 대부분은 차카족(Cagga)인데,  그들은 킬리만자로와 모시 부근에서 살며  킬리만자로의 눈이 녹은 물을 이용하여  이곳에서 커피 농사를 지으며 산 사람들이라고 했다.

정글을 벗어나니 비가 멈추고 환하게 전망이 트이면서 만다라 산장(해발 2700m)이 품안으로 들어왔다. 등반을 시작한 지 얼추 3시간 정도 오른 듯하다.
 

푸른 언덕에 A자형 통나무집들이 줄지어 있었고 새로운 건물을 짓느라어수선한 풍경이었다.

먼저 도착한 일행들은 비에 젖은 옷과 우비를 말리느라 여기저기 울긋불긋 빨래들을 널어놓고 있었다.

날이 흐린 탓인지 아침 일찍 숙소에서 보였던 만년설은 보이지 않았다. 킬리만자로의 만년설은 매년 그 크기가 줄어들어. 지난 80년간 82%가 사라졌다고 한다.
 

이산화탄소의 과다배출로 지구 온난화로 인한  기상이변에 인류의 미래가 위협받고 있다는 실증이다.

잠시 높은 산의 정기를 받으며 몸을 정화시키고 다시 하산을 하기 시작했다. 내려올 때 더욱 더 힘들다더니 종종 헛디뎌 미끄러지기 일쑤였으나 큰 사고 없이 2700고지를 다섯 시간 만에 성공적인 산행을 마쳤다는 것은 아주 보람된 일로 적고 싶다.

킬리만자로 커피가 유명해서 하산한 이후 두리번거렸으나 예약된 버스가 기다리는 바람에 커피를 살 수 있는 형편이 되지 않아 섭섭함으로 남는다. 할 수 없이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가서 더 훨씬 비싼 값으로 살 수밖에 없다.

산을 오르는 힘든 여정 속에서 만난 다양한 생태계의 모습들. 높이 오를수록 점점 큰 나무는 사라지고 가느다란 침엽수만이 앙상하게 서서 찬 기운을 견디며 묵묵히 수행하는 자의 표정으로 서 있던 나무들.

머리와 어깨에 무거운 짐을 지고 오르던 포터들의 뒤를 따르며 인생이란 무엇인지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하고 잘 살아야겠다는 절실함이 가슴속 깊은 곳에서 뜨겁게
용솟음치는 것을 깨달았던 산행이었다.

새로운 출발, 새로운 영감이 절실한 사람일수록  좋은 여행의 실루엣이 꼭 필요하다고 하지 않던가. 이번 아프리카 30일 여행이 끝난 뒤 돌아갔을 때 정말 내 인생의 가장 중요한 터닝 포인트가 될 것이라는 확신이 들기도 했다.

킬리만자로에 대한 팁

킬리만자로는 1848년 독일 선교사 레프만(Rebmann)과 크라프(Krapf)에 의해 유럽에 알려졌다. 처음에 유럽 사람들은 적도가 있는 아프리카에 만년설이 있다는 것을 믿지 않았다.

그러나 1889년, 독일 지리학자 한스 마이어(Hans Meyer)와 스트리아 등산가 푸르트쉘러(Purtscheller)가 만년설이 있는 정상까지 등정함으로써 증명이 되었다.
 

마웬지봉은 1912년 독일 지리학자 클루테(Klute)에 의해 처음으로 등정되었다.
킬리만자로로 들어서는 마랑구게이트에는 그들에 대한 기록이 써있는 비석이 있다.

동남쪽으로 길고 넓게 타원형으로 자리 잡은 화산은 서쪽부터 시라봉(Shira, 3962m), 키보봉(Kibo, 5895m), 마웬지봉(Mawenzi, 5149m)의 세봉우리가 있다.
 

그 중 만년설로 덮여 있는 키보봉이 가장 높은데  그 정상을 우후루(Uhuru) 피크라 부른다.

세 개의 봉우리에는 전설이 있다. 옛날에 키보와 마웬지라는 형제가 있었다.  게으른 마웬지는 늘 형인 키보에게 와서 불씨를 빌려달라고 했다.  어느 날 마웬지가 하루에 세 번씩이나 불을 꺼뜨리고 불씨를 빌리러 왔다.
 

화가 난 키보가 마웬지의 머리를 후려쳤다.  그 이유로 지금처럼 마웬지의 정상이 찌그러졌다는 이야기다.

사진=만다라 산장에 있는 찻집

글쓴이 송선순      http://www.parangs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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