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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만한 천재, 혹은 모순의 천재: 비외른 보리의 테니스 레슨 동영상



윔블던 대회 주최측은 인근 여학교들에 공문을 보내야만 했다. 학생들을 좀 자제시켜 달라고. 록스타도 아닌 일개 테니스 선수가 여학생들에게 이처럼 인기를 끈 것은 전무한 일이었고 앞으로도 있을성 싶지 않은 일일 것이다.

오픈 시대 이후 테니스를 대중에게 가장 강력하게 어필 시킨 영웅은 누구보다도 비외른 보리(1956.스웨덴))이다.


그는 1970년대 중반 이후로 테니스 경기의 범위를 넘어서는 하나의 사회적 현상이 되었다. 그의 일거수일투족은 언론의 항상적인 추적을 받아야만 했고, 그의 결혼식은 세계의 주요 사건으로 보도될 정도였으니까. 


보리 이후로 남자 테니스 선수로 대중적인 인기를 끌었던 경우는 보리스 베커나 존 매캔로, 안드레 아가시 정도를 들 수 있지만 이들은 보리의 인기 수준에 비할 바는 전혀 되지 못한다.



그는 인기를 끌기 위해 많은 말을 할 필요가 없었다.


사실 말을 많이 하려고 해도 당시에는 영어가 서툴었던 관계로 쉽지 않았겠지만. 그의 인기를 증명해 주는 것은 당시 그가 스포츠 선수 사상 (당시 모든 스포츠를 통털어서) 최고의 광고 수입 기록을 연일 갱신했다는 사실이다. 


테니스가 원래 점잖고 보수적인 운동이라서 운동복도 하얀 색이어야만 했고 운동복에 광고를 하는 것도 엄격하게 통제되고 있었으나 보리의 옷에 글자 몇개 새겨 넣으려고 업자들은 항상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이유로 그가 이렇게 사람들을 열광시킬 수 있었던 것일까? 


긴 금발 머리. 테니스 선수로서는 그다지 크지 않은 외소해 보일수조차 있는 체격. 미끈하게 잘 빠지기는 했지만 안짱 다리. 수줍고 내성적인 성격. 사람마다 견해가 다를 수는 있지만 내가 보기에는 최소한 그의 외모가 그의 인기의 주된 이유는 아니었다.

그가 남녀를 막론한 인기를 구가했던 이유는, 주관적인 생각이니 장담은 못하지만, 혹 그가 풍기고 다녔던 모순적인 천재의 아우라 혹은 분위기 아니었을까?  


사실 그는 좀 모순적인 구석이 많은 사람이었다. 우선 사람들로부터의 인기가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점점 더 자신 속으로 숨으려 들었다. 


당시 테니스계의 대표적인 선수였으면서도 테니스 관료들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는 1년에  4개월은 반드시 철저히 비밀스러운 휴식을 취하기를 원했고 대부분의 경우는 이를 관철시켰다. 


아마 호주 오픈은 이 휴식 기간에 끼어있었던지 74년 한 번 참가한 것을 제외하고는 은퇴할 때까지 다시는 참가하지 않는다.

테니스 코트에서도 모순은 여지없이 드러난다.


동시에 우승하기 가장 어려운 그랜드 슬램 대회 두개를 꼽으라면 아마 프렌치 오픈과 윔블던일 것이다. 그는 3년 연속으로 프렌치 오픈과 윔블던을 우승했다. (1978-80). 그가 출전한 나머지 한 그랜드 슬램 대회인 US 오픈에서 이 기간동안 받았던 성적은 준우승, 8강, 준우승이다. 


이 뿐이 아니다. 단지 3년 연속 두 대회 동시 우승 기록을 지니고 있을 뿐만이 아니라, 그는 두 대회 모두 역사상 가장 압도적인 챔피언으로 남아있다. 프렌치 오픈 6회 우승(4연속 우승 포함), 윔블던 5연속 우승.    


코트에서의 그의 별명은 미스터 아이스 혹은 아이스 보그이다. 


그는 자신의 불같은 투지와 근성을 굳이 얼굴 표정으로 나타내거나 고함으로 나타내지 않았다. 그와 동시대의 선수이던 코너즈나 매캔로는 사람들의 비난을 받을 정도로 감정 표현이 많았던 반면 보리가 코트에서 보여준 얼굴은 딱 한가지였다. 


무표정.  그의 승부 근성은 속으로는 부글부글 끓어오르고 있었는지 모르지만, 겉으로는 오직 그의 발과 숨소리를 통해서만 확인할 수 있었다. 그는 어떤 공도 포기하지 않는다. 


그는 이기고 있을 때나 지고 있을 때나 한결같이 공 한개에 목숨을 걸기라도 한 사람처럼 공을 쫒았다. 불끓는 승부 근성과  냉혹하게 보이기조차 했던 무표정 또한 충분히 모순적이라 할 만하지 않을까. 



그는 18세 때부터 성인 무대에 본격적으로 뛰기 시작해서 25세 때 실질적인 은퇴를 한다. 8년의 짧은 커리어. 그리고 이 속에서도 매년 4개월의 휴가. 그렇지만 그는 62회 우승 기록을 지니고 있다. 


샘프라스가 14년에 걸쳐 거둔 64회 우승 기록과 횟수로도 그리 차이가 나지 않는다. 


굳이 오늘날의 선수와 비교해 보자면, 보리가 8년 동안 거둔 기록은 페더러가 데뷔후 현재까지 약 7년간 거둔 기록의 딱 두배 정도 되는 기록이다. (잊지 말것! 보리는 매년 4개월 휴가를 즐겼다.). 


이정도면 보리가 얼마나 압도적인 커리어를 보냈는가를 충분히 감 잡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이게 이야기의 끝이 아니다.    

오픈 시대 이후로 무실 세트 우승이 나온  경우는 총 5회인데 이중 3회가 보리의 것이다. 1회전부터 결승전까지 단 한 세트도 내주지 않고 우승하는 것 자체가 수십년간 5번 밖에 없었는데 이 중 3회가 보리가 작성한 기록인 것이다. (76 윔블던, 78, 80 프렌치).

단일 대회 우승 중 가장 높은 게임 승률을 보여준 것도 역시 보리이다. (보리는 이 분야에서 1,2위의 기록을 지니고 있다). 게임 승률이 높다는 말은 상대의 서비스 게임을 많이 잡았다는 말일 것이다. 


보리는 1978년 프렌치 우승 당시 79.9%의 게임 승률을 보였으며, 80년 우승 당시 76.8%의 승률을 보였다. 두 기록은 공히 역대 1,2위 기록이다. 참고로 이 분야에서 아가시의 기록(역대 5위)은 2003 호주 오픈 우승때의 71.6%이며, 페더러의 기록은(역대 38위) 2004 호주 오픈 우승때의 65.2%이며, 샘프라스는 94년 윔블던 우승 때 64.2%를 보였다. 


흔히 아가시를 최고의 리턴이라고 격찬하곤 하는데 보리의 통계를 살펴보면 과연 그런 말이 가능할지 의문이 든다. 아가시의 5위 기록은 탁월한 리턴 기술과 이론 때문이라고 하더라도, 보리의 터무니없는 기록은 그의 발과 근성 그리고 천재성 말고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보리는 심지어 윔블던 대회에서도 멀찌감치 서서 있다가 강서브들을 받아넘기는 다소 불가능해 보이는 전술을 사용하곤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윔블던 우승자 게임 승률 역대 2위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윔블던 게임 승률 역대 1위는 매캔로).    [ 단일 그랜드 슬램 대회 우승 당시 총 게임 승률 79.9%는 정말 터무니 없는 기록이다. 이를 페더러의 최고 기록인 65.2%와 비교해 보면 그 차이를 알 수 있다. 


단순하게 환산해 보면 (오해의 소지가 있기는 하지만) 보리의 기록은 매 세트마다 평균 6: 1.5 의 승리를 기대할 수 있다는 말이며, 페더러의 기록은 평균 약 6:3으로 승리를 기대할 수 있다는 소리다.]   

한 때 마이클 창이 건전지 선전에 나와서 건전지하고 지구력 내기를 하던 장면을 기억할 것이다. 


터프 가이의 원래 뜻이 ‘질긴 놈’인데 테니스 계에서 이 표현을 차지할 수 있을만한 사람을 꼽으라면 코너즈, 보리, 마이클 창이 될 것이고 이 중에서도, 내 생각에는, 보리가 첫 손가락이다. 


한때, 보리의 스태미너가 너무 초인적이어서 스포츠 과학자가 그의 심박수를 검사했더니 40회 언저리가 나왔더라는 풍문이 그럴싸하게 돌기도 했다. 보리야말로 원조 건전지맨이라 할 만하다. 



윔블던 5연패와 프렌치 6회 우승은 단지 발과 근성만으로 이뤄질 수는 없는 대기록이다. 당연히 보리는 최고의 스트로크를 선보였다. 보리가 현대 테니스 기술 측면에서 지니는 의의는 아마 톱스핀의 위력을 사람들에게 깊게 각인시켜 줬다는데 있을 것이다. 


 보리 이전에도 톱스핀을 사용한 선수들이 있었지만 보리만큼 톱스핀을 최강의 무기로 사용한 선수는 없었다.


보리는 헤드 크기가 80인치 내외인 구형 나무 라켓을 사용해서 불가능한 일을 가능하게 만든 천재였던 것이다. 물론 오늘날에는 톱스핀이 스트로크의 교과서가 되었지만.

보리를 묘사할 짧은 단어로 떠오르는 것은, 내 머리속에서는, 뜨거운 얼음, 천재의 오만, 모순이다. 


천재만이 모순을 몸으로 통일시킬수 있다면 보리야말로 진정한 테니스 천재였다. 최소한 내게는 보리야말로 최고의 선수였고 앞으로도 영원히 그럴 것같다. (이 글을 쓰고 나니 비로소 지난번 샘프라스 글을 올리고 나서 보리에게 빚을 진 것 같았던 느낌이 사라질 수 있을 것 같습니다.ㅎㅎ)   


[뵈요른 보리의 테니스 레슨 ]


  

*  아래의 글은 테니스 명예의 전당 홈페이지(tennisfame.com) 글을 번역한 것입니다.


비외른 보리   - by 버드 콜린스


21세가 되기 전에 비외른 보리는 이미 테니스 영웅의 입지를 다지는 업적을 달성했다. 그리고 26살이 되기 이전에 이 금발의 스웨덴인은 은퇴한다. 현대 테니스에서 어떤 남자 선수도 이보다 짧고 빛나는 업적을 보여주지 못했다. 



테니스계에서 이른 나이에 업적을 이루고 챔피언이 된 사례들이 물론 존재한다. 하지만 보리만큼 강렬한 사례는 없다. 18세 생일을 맞기 직전에 보리는 이태리 챔피언십 최연소 우승자가 되었으며, 2주 후에 프렌치 오픈 최연소 우승자가 되었다.


( 프렌치 오픈 최연소 우승 기록은 1982년 매츠 빌란더에 의해 17세로 갱신되며, 1989년에 마이클 창이 보다 어린 17세로 챔피언이 된다.) 18 개월 후 19세의 나이때 그는 스웨덴이 체코를 꺾고 최초로 데이비스컵 챔피언이 되도록 만들면서 데이비스컵 단식 19 연승 기록을 세웠다. 


그가 결국 세운 데이비스컵 33 연승 기록은 그의 은퇴시까지 깨지지 않았으며, 여전히 최고 기록이다.  

1953년 류 호드와 켄 로즈월이 호주 대표로 데이비스 우승을 했을 때 당시의 이들의 나이가 몇 달 더 어리기는 했지만 이들은 결승 라운드에서 공히 패를 기록했다. 하지만 보리는 자신의 단식 두 게임과 복식까지 출전하여 모두 이겼다. 


보리는 1972년 16세의 기록적인 어린 나이로 출전한 데이비스 컵 데뷔전에서 뉴질랜드의 노련한 프로 선수 오니 파룬을 상대로 5세트 경기 끝에 승리를 거두는 파란을 일으켰다. 보리는 또한 가장 오래된 프로 대회인 US pro (US 오픈과는 다른)에서 최연소 우승을 하였다: 


그는 이 대회에서 1974년 18세의 나이로 우승을 하며, 75년과 76년 거푸 우승을 거둔다. 후에 아론 크릭슈타인이 1984년 16세의 나이로 우승하면서 최연소 우승 기록을 갱신한다.


그는 엄청난 강인함과 지구력을 지녔으며, 또한 정통적이지 않은 독특한 스타일과 겉모습을 보였지만, 심지어 안짱다리였다, 엄청나게 빨랐다. 그의 근육질의 어깨와 잘 발달된 몸통 근육은 포핸드와 백핸드로 공히 강한 톱스핀을 사용하여 공을 후려칠 수 있는 힘을 주었다. 


그는 두손 백핸드를 사용했는데 이는 어렸을 때 즐겼던 하키의 슬랩 샷으로부터 가져온 것이다. 그가 13세가 되었을 때  그는 이미 스웨덴의 18세 이하부의 최강자를 꺾었으며, 당시 데이비스 컵 감독이던 레나르트 베르겔린은 사람들이 보리의 거칠어보이는 후려치는 스트로크들을 고치려 들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였다. 이것들은 효과적이었다. 1977년에 이르기까지 그는 자신보다 어린 선수에게는 한 번도 지지 않았다.      

1956년 6월 6일 스웨덴의 소더탈리에에서 태어나고 자란 보리는 자신의 아버지가 탁구 대회에서 상품으로 타온 테니스 라켓에 매력을 느꼈다. 그의 아버지는 라켓을 아들에게 주었고 이것이 시작이었다. 


보리는 끊임없이 그라운드스트로크 공방 속에서 상대방을 넉다운시킬 때까지 받아넘기고 끈질기게 기다리는 베이스라인 전투를 선호했다. 


그는 웨스턴 그립 포핸드와 두손 백핸드를 사용했으므로 발리에 어려움을 지닐 수 밖에 없었고, 그의 서브 또한 처음에는 그다지 탁월할 것이 없었다. 


그는 1976년 까지는 잔디 코트에서 별 성적을 거두지 못했다. 그러나 그 해에 윔블던을 정복하기로 결심하고 견고한 서브/발리 전술을 2주에 걸쳐 연습하고 나서 결국 윔블던 우승을 차지했다. 그는 가장 중요한 대회인 윔블던에서 단 한 세트도 잃지 않으면서 우승을 차지했다. 


결승전에서 우승 후보이던 일리 나스타제를 6-4,6-2,9-7로 제압한 것이다. 20세 1개월의 보리는 당시 현대에 들어와서 가장 어린 나이에 윔블던 챔피언을 차지한 선수가 되었? 후에 보리스 베커가 1985년에 17세로 최연소 기록을 갱신한다.


보리는 1977년에도 윔블던 우승을 반복했다. 이번에는 좀 더 힘든 경기였다. 비타스 게룰라이티스와의 숨막히는 준결승 (6-4,3-6,6-3,3-6,8-6),과 지미 코너즈와의 결승(3-6,6-2,6-1,5-7,6-4)은 윔블던 역사상 최고의 경기들로 꼽힌다. 


이제 보리는 발리에 보다 능숙해 졌고 자신감을 지니고 있었다. 1978년에 보리는 코너즈를 다시 한번 제물로 삼아 우승을 반복했다. 이렇게 해서 그는 프레드 페리(1994-6) 이후 최초의 3년 연속 우승을 달성하게 되었다. 그는 1979년 미국의 로스코 태너를 결승에서 5세트 접전 끝에 제압하고 연속 우승을 4회로 늘렸다. 이는 토니 윌딩(1910-13) 이후 최초의 4년 연속 우승 기록이다.    



그는 결국 1980년 결승에서 매캔로를 꺾고 윔블던 5연속 우승을 달성한다. (1-6,7-5,6-3,6-7(16-18),8-6). 이 결승전은 역사상 가장 멋진 경기로 사람들에게 기억되고 있다. 테니스 역사상 가장 짜릿했던 공방 중의 하나였던 34점을 주고받은 타이브레이커에서 보리는 다섯개의 매치 포인트를 따내지 못했고 여섯개의 세트 포인트들을 세이브했지만 결국 세트를 내주고 말았다.  


하지만 그의 소문난 강단(resolve)은 5세트에서 찬란하게 빛을 발했고 결국 승리를 거두었다.

보리는 이제 윔블던 6연속 우승이라는 오래된 기록을 깨는 것에 도전할 수 있게 되었다. 윌리 렌쇼는 1881-6년에 걸쳐 6연속 우승을 거뒀다고 전해지는데 이는 오늘날처럼 어렵지는 않았다. 


당시의 윔블던 대회 포맷에 따라서 렌쇼는 첫 번째 타이틀을 제외한 뒤의 다섯번의 경우는 오직 한 경기만 이기면 타이틀을 지킬 수 있었다. 즉, 그의 연승 기록은 (6연속 우승을 거뒀음에도 불구하고) 1888년에 윌로우비 해밀턴에게 지기 전까지 거둔 13연승일 뿐이다.

1980년 윔블던 5연패를 달성하면서 보리는 또한 로드 레이버의 윔블던 대회 31연승 기록을 뛰어넘었다. 보리는 결국 1981년 결승에 오르면서 41연승 기록을 세웠다.


(헬렌 윌스 무디가 1927년부터 1938년 사이에 50연승을 거두었다고 전해진다.) 1981년 보리는 결국 윔블던 결승에서 매켄로에게 결승에서 패하면서 연승 기록을 마감한다.  
  
보리가 1981년 프렌치 오픈 6회 우승 기록을 세웠을 때, 그는 동시에 프렌치 오픈 28연승 기록을 만들었다. 당시 보리는 25세였기에 로이 에머슨의 그랜드 슬램 대회 12회 우승 기록을 넘어설 것으로 기대되었다. 보리는 11회 우승을 달성한 상태였으니까. 하지만 그는 레이버의 11회 우승 기록에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었을 뿐 12회 우승을 달성하지는 못했다. (은퇴 때문에 프렌치 오픈 연승 기록과 연속 우승 기록 은 중단되고 만다. 1978-1981년 에 걸쳐 프렌치 오픈 4연속 우승.)



윔블던 대회에 이어 US 오픈 결승에서 매캔로가 거푸 발목을 잡았던 것이다. 매캔로는 US 오픈에서 2년 연속으로 결승에서 보리를 제쳤고 결국 보리는 1979년과 80년에 유지하던 No.1의 자리를 매캔로에게 내주고 말았다. 


1981년 US 오픈 결승에서 매캔로에게 4-6,6-2,6-4,6-3으로 패한것이 사실상 보리의 선수 경력의 끝이었다.(당시 보리 나이 25세). 그는 1982년 몬테 카를로 대회에서 8강에 진출하면서 2승을 더 거뒀을 뿐이다. 보리는 62회 단식 우승의 기록으로 은퇴앴으며 1987년에 명예의 전당에 가입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1991, 1992,1993년에 컴백을 시도했다. 하지만 컴백에 성공하지는 못했다.  

다른 것들은 몰라도 그의 발레하는듯한 풋워크와 탁월한 예측은 35세의 나이에 다시 불러낼 수는 없는 것이었다. 


그는 1992년 8번, 1993년에는 3번 1회전에서 패배했다. 보리가 프로 무대에서 마지막으로 라켓을 잡았던 1993년 모스크바 크렘린 컵 대회의 경기는 거의 잡을뻔 하기도 했다. 결국 , 그는 악렉산드로 볼코프에게 4-6, 6-3, 7-6(9-7)으로 패한다.


이후로 그는 시니어  대회에 출전하면서 코너즈와의 라이벌 관계를 새로운 장에서 이어갔다. 코너즈와의 통산 전적은 10승 7패. 매캔로와의 통산 전적은 7승 7패.
특히 그는 US 오픈에서 불운했다. 그는 10회의 출전에서 결국 우승을 차지하지 못했다. 


결승에 4번 진출했는데 1976년과 1978년에는 코너즈에게, 그리고 1980년과 1981년에는 매캔로에게 패하고 말았던 것이다. 1978년, 1979년, 그리고 1980년 이렇게 3년에 걸쳐 그는 거의 그랜드 슬램의 문턱까지 갔다.


이 3년 동안 내내 그는 윔블던과 프렌치 오픈을 우승했지만 US 오픈에서 미끌어지고 말았던 것이다. (78년에는 결승에서 코너즈에 패, 79년에는8강에서 로스코 태너에게 패, 1980년은 결승에서 매캔로에게 패).
    
 





[서브의 바이오 메카닉스]



 Comment '7'
  •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항상 훌륭한 글을 게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테니스에 막 입문할 적에 보리와 관련해서 들었던 말 중에 '70년대 후반 스웨덴의 대표적인 수출품 세가지는 볼보자동차, 가수 아바, 테니스선수 보리이다'라는 인상적인 말이 생각나네요.
  • 박성식 12.01 09:38
    우와 굉장한 내용이내요
    어떻게 이렇게 내용이 많고 깊이있는 테니스 이야기를 쓰시는지 참으로 놀랍습니다.
    덕분에 테니스 역사를 즐겁게 배웠습니다.
    감솹니다.
  • 바카스정신 12.01 10:43
    freelancing 님의 글을 통해
    새로운 사실들과 재밌는 일화들을
    즐겁게 보고 있습니다........^^

    기냥 생각인데요....
    freelancing 님께서 올리시는 글들을 모아
    책으로 내셔도 될꺼 같은데요... ㅎㅎㅎ~~
  • 아소당 12.02 10:32
    사람이란 느끼늠 감정, 보는 눈은 참 비슷한것 같애요.
    저도 freelancing 님의 글을 보면서 요즘은 아침을 엽니다.
    매일 이 코너에 들어와서 또 새글이 올라왔나 보거든요.
    테니스 기술도 테니스 역사도 뭐든 넘 좋습니다.
  • freelancing 12.02 10:54
    과찬들에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부담을 팍팍 주시는군요. 쥐구멍을 찾아야 하나. . .

    제 글 혹은 번역을 즐겁게 읽어주시는 분이 계시다는 사실만으로도 너무 감사합니다.
  • freelancing 03.31 14:15
    최근 보리가 윔블던 우승 트로피들과 우승 당시 사용했던 라켓들을 런던 경매에 내 놓았다가 철회했다는 기사를 봤습니다. 그 많은 돈들은 다 어디로 사라져 버렸는지. . . 많이 벌면 많이 잃는 것인지. . .
    테니스 코트에서는 비교가 불가능할 정도의 영웅이자 맹수였지만, 세파 속에서는 더욱 힘없고 미욱한 패배자가 될수도 있는것인가. . . 스산한 감회가 느껴집니다.

    사진 몇개 덧붙였습니다. 특히 마지막에서 두번째 사진은 아마 보리 평전 책표지인것 같은데 "winner loses all"이라는 부제가 슬픈 기사를 본 후라 그런지 가슴속에 박히네요.
  • 全炫仲 05.09 1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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