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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맨삼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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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원님 안녕하세요.

내일이면 기다리고 기다리던 전테교 제6차 전국모임이 열리게 되는군요.
일전에 자칭나달이라는 닉네임으로 입문기(배우고 때로 익히면 즐겁지 아니한가)를 올렸던 초보테맨입니다.

그동안 준비에 만전을 기하려는 교장선생님, 초심님, 용철회장님외 많은 운영진의 분주함으로 보고도 알지 못하니 도울수도 없었던 답답함이 이제 하루 남았습니다.
정말 수고 많으시고 더불어 감사드립니다.

이 모든 분들이 제가 닮고 싶은 테니스인의 진정한 모습들이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오늘은 기분좋은 금요일... 좋은 날씨에 이제 4개월을 채워가는 테니스인으로서 테니스를 한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 어떤 기분을 느끼고 갖기 위해서 인가? 또한 테니스인으로서 오랜시간이 흐른 후에는 어떠한 모습으로 남고 싶은가? 등등의 깊어가는 가을의 정취속에 어제는 한줄기 바람에 코트장으로 불어든 낙엽들을 대비자루로 쓸면서 번민의 시간을 가져 보았습니다.
언제나 그렇듯 저의 앎의 시작이자 끝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공자님의 말씀이었습니다.
학창시절 국어시간을 통해 선생님으로부터 들었던 “군자삼락”이었습니다.

처음 보았던 군자삼락이 눈을 감으면 하얀수염을 휘날리며 등장하는 도인의 모습에서 이젠 점차 지상세계로 내려와 가까운 이웃에서도 볼 수 있고 또한 어쩌면 나도...라는 한가닥 희망마져 품으면서 군자삼락을 더욱 세속화시키고 있습니다.

서설이 넘 길었습니다. 군자삼락의 해석을 통해 테맨삼락으로 철저히 세속화 시켜 보려고 우선 공자님의 원문에 충실한 해석과 의미를 먼저 언급하고 나중 테니스인으로 입문한 저의 해석으로 마무리 짓도록 하겠습니다.

논어 '學而'편

子曰 學而時習之 不亦說乎.
有朋 自有朋 自遠方來 不亦樂乎.
人不知而不慍 不亦君子乎.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배워 때로 익히니 또한 기쁘지 아니하냐?
친구가 있어 먼 곳으로부터 찾아오니 또한 즐겁지 아니하겠느냐?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화내지(부끄럽지) 않는다면 또한 군자라 할 수 있지 않겠느냐?

논어의 학이편에 대한 해석은 많은 분들이 다소간 견해 차이를 보이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따라서 본 해석은 학문적 성과를 바탕으로 한 공자님의 본지 즉, 순수한 말씀의도에 수렴해 가기 위한 학문적 접근이 아닌 테니스를 배우기 시작한 한 초보테니스인의 시각에서 또한 테니스를 궁극에서 얻고자 하는 마음의 목표를 세운 것이니 해석에는 너무 연연해 마시고 읽어 주시길...

참고로 본 해석은 많은 분들 중 한 선생님의 해석을 참고로 하였음을 밝혀 드리고 또한 부분적으로는 제 미혹한 사견이 개입되어 있음을 말씀드립니다.

子曰 學而時習之 不亦說乎.

공자가 이르기를 배우고 때로 익히면 또한 즐겁지 아니하냐?
여기서 '學'은 반드시 책을 읽어 배우는 공부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공자가 말하였던 '學'은 책을 읽으며 하는 공부도 있었지만 생활과 마음가짐에서 배우고자 함을 말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는 '세 사람이 길을 가면 그 중 분명 나의 스승이 있다'라고 말하였다. 사실 그에겐 딱히 이를만한 스승이 없었다. 오로지 독서를 통한 지식과 자기 수양 그리고 남의 단점을 보면 스스로 행함을 경계하는 방법을 통한 것이 그의 전부였다.

'習'의 의미를 보겠다. 학교 수업에서는 배운 것을 익히는 것이겠지만 여기서 '習'은 익힌다는 의미보다 실천하라는 의미가 더 강하다. 學과 習의 순서가 문장에서 선후가 있겠지만 그것을 행함에 있어서는 배운 뒤에야 실천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아는 것을 먼저 행하고 그러다 새로운 것을 배우고 하는 식으로 어느 것이 먼저이고 어느 것이 다음이 없다는 것이다. 즉 學과 習은 생활습관을 말하는 것이지 공부하는 방법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시'는 항시, 언제나의 뜻으로 풀고 있는데 "익히지 않는 때가 없다"는 설명이다. '습'이란 배운 것을 자신에게 익숙하게 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곧 "어린 새가 무수히 날기 연습을 하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학습이란 어떤 지식이나 기능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며 인간다운 심성과 인격의 연마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심성과 인격의 연마는 그러나 막연한 상념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대학>에서 '<격물치지>'라고 하여 사물의 치열한 탐구를 강조하였다.

그러므로 이것을 종합하여 보면 첫문장 '學而時習之' 에서 말하는 '배우고 때때로 익히면'의 의미는 '먼저 배운 뒤 익혀라'라는 의미가 아니라 '늘 공부하고 익혀라' 즉 독서를 통한 공부를 포함하여 일상과 남을 통해 깨닫고 반성하여 배우는 것을 스스로 행하라는 의미가 되겠다.

이 문장은 두 가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첫째, 배우는 것(學)과 그것을 실천해 가는 것(習)이 동시에 진행되는 것이라는 것과 둘째로, 배움과 그 배움을 익히고 실천해 나가는 것을 생활처럼 여기고 함께 하라고 말하는 것이다.

不亦說乎의 不亦은 문장이 질문의 형식을 취하도록 하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앞뒤의 내용두고 보면 不亦의 의미는 '그렇지 않느냐?'라는 식으로 동의를 구하기 위한 질문형식의 문장을 만들기 위하여 쓰인 것이다. 하지만 문장 전체의 흐름을 두고 본다면 不亦은 자신의 생각에 동의를 구하는 듯한 형식을 쓰며 자신의 말을 실천하도록 권유하는 의미가 더 큰 듯도 싶다. 즉 '동의'나 의견을 묻는 것보다는 '권유'나 '강요'의 의미가 더 크다는 말이다. 따라서 '不亦'은 그 두자를 기준으로 그 앞의 내용대로 하면 그 뒤의 내용대로 된다, '不亦' 앞의 내용대로 해서 '不亦' 뒤의 내용이 되도록 해야 한다는 구조의 문장을 만들어 내게 되는 것이다.

不亦說乎.에서 굳이 밑의 문장과 같은 '樂'을 피하고 '說'을 쓴 것은 서로 다른 두가지 의미를 지니기 때문이라 볼 수 있다.
'說'과 '樂'은 어찌보면 같은 '즐거움'으로 보이지만 둘의 사이엔 매우 큰 차이가 있다.
'樂'은 어떤 상황의 현상을 통한 즐거움을 말하는 것이다. 즉, 보고, 듣고, 느끼는 것 등의 감각을 통한 즐거움을 말한다. 쉽게 말해 친구와 장난을 칠 때의 즐거움, 연인과 육체적 사랑을 나눌 때의 즐거움, 웃긴 이야기나 장면을 보고 느끼는 즐거움을 말하는 것이다. 이에 반해 '說'은 어떤 상황이 가져오는 마음의 기쁨을 말하는 것이다. 친구와의 즐거웠던 추억을 떠올릴 때의 마음, 연인을 마음으로 그릴 때의 설레임과 같은 경우로 예를 들 수 있다.
구체적인 하나의 상황을 예로 둘의 차이를 설명하자면 오랫 동안 아이가 없던 부부가 임신하게 되었을 경우 그 사실을 알게된 즉시의 마음은 '樂'이고 그 이후 아빠가 된다는, 엄마가 된다는, 아이가 태어날 것이라는 생각에 종일 흐뭇한 기분은 '說'이고, 아기가 태어난 그 순간의 기쁨은 '樂'이고, 태어난 뒤 아기를 바라볼 때마다 느끼는 마음은 '說'이다. 간단히 말해 '樂'은 즉시적이고 짧은, 말 그대로 '즐거움'이고 '悅'은 은근하고, 꾸준한 '기쁨' '흐뭇함'으로 해석하면 되겠다.

결국 不亦說乎의 '어찌 즐겁지 않겠느냐'에서 말하는 즐거움은 '學而時習之'의 '學'과 '習'을 하는 생활으로 통해 느낄 수 있는 흐뭇함을 말하는 것으로 이것은 배우고 익히고자 하는 마음으로 사는 동안(學과 習을 하는 時)에 느끼는 '괜히 좋은 기분', '흐뭇함'을 말하는 것이다.

위 설명을 토대로 해당 구문을 다시 해석해 보면

子曰 學而時習之 不亦說乎.
공자가 말하기를 늘 배우려는 마음가짐과 배운 것을 실천하며 생활한다면 항상 기분 좋지 않겠냐?

有朋 自有朋 自遠方來 不亦樂乎.

有朋은 직역하면 벗이 있음을 뜻한다. 여기서 朋은 그냥 친구가 아닌 학문적 동지나 자신의 뜻을 알아주는 이, 자신의 뜻에 공감하는 이를 의미한다. 여기서 말하는 공자의 뜻을 알아주는 이란 그의 사상에 공감하는 이 뿐 아니라 그의 사상을 이해하지는 못하더라도 그를 존경하거나 따르는 이, 그에게 가르침을 받고자 하는 이를 포함하는 것으로 보인다. 朋의 의미를 이처럼 확대하여 보는 이유는 그 뒤의 '自遠方來'의 의미와 함께 두고 보았을 때의 의미 때문이다.


有朋 自遠方來를 단순히 그 뜻만 해석하였을 때는 '벗이 멀리서 찾아오다'가 된다. 그런데 여기서 벗이 원래 알고 있던 이를 두고 말한다고 보기엔 조금 무리가 있다. 그렇다면 알지 못하는 이가 멀리서 공자를 찾아온다면 분명 찾는데에 목적을 두고 있을 것이다. 바로 그 목적이 '朋'의 조건이 되는 것이다. 쉽게 말해 공자의 사상에 공감하여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서 오는 것이나, 가르침을 받기 위해 오는 것과 같은 목적이 있는 이라면 멀리서 찾아오는 벗이 되는 것이다. 결국 '朋'은 멀리서 찾아오는 이라기 보다는 자기를 알아주는 이, 자신을 인정해 주는 이를 의미하는 것이다. '朋'의 의미를 이렇게 보면 '朋'과 '自'는 인과관계가 된다. 즉, '朋'이 되면 '自'하게 된다는 것이다. 풀어 말하면 공자의 사상에 공감하거나 존경하여 가르침을 받고자 하는 이(朋)가 되면 스스로 찾아오게 된다(自遠方來)는 것이다.

'遠'의 뜻은 '멀다'이다. 그리고 문장에서도 '멀리서 오다(遠方來)'로 풀이된다. 그러나 '朋'의 의미를 두고 '遠'을 해석하자면 반드시 '멀다'라는 거리의 의미로만 볼 수는 없다. '遠'은 공자가 있는 곳으로부터 '朋'이 위치한 거리라기보다는 공자의 사상이 전해진 넓이, 공자의 소문이 퍼져 나간 정도가 되겠다. 즉, 멀리 위치한 '朋'이 있다는 것은 '朋'이 있는 먼 곳까지 공자의 소문, 사상이 퍼져나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朋'이 공자를 찾아오기 위한 '遠'은 거리를 뜻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공자의 사상이 전해진 범위인 '넓이'를 뜻하기도 한다. 이렇게 두고 본다면 '方'이 같은 음인 '訪'이 되어 '訪來'로 쓰이지 않았는지도 이해할 수 있다. '方' 역시 '遠'과 같이 앞서 말한 '넓이'의 의미로 '遠'의 의미를 돕기 위하여 쓰인 것으로 볼 수 있다.


'朋'과 '遠'의 의미를 이렇게 두고 본다면 有朋 自遠方來의 풀이는 '멀리까지 나의 뜻(사상)이 전해져 이에 공감하여 찾아오는 사람이 있으니'정도로 풀어볼 수 있겠다.
앞서 '說'과 '樂'의 의미가 다름은 설명하였다. 이번에 '說'이 아닌 '樂'이 쓰인 것은 다음과 같이 볼 수 있다. 배우고 실천하여 익히는 것은 종일 흐뭇하게(說)하는 기분이고, 有朋이 自遠方來한 것은 찾아온 그 순간이 반가워 기쁜(樂) 것이다.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이 있음을 안다는 것 역시 흐뭇하고 종일 기쁜 것으로 說을 쓰는 것도 괜찮지 않느냐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공자는 누군가 자신을 인정하고 알아주는 것에 대해서 꾸준히 흐뭇해함을 경계하였던 것이 아닌가 싶다. 자신을 인정하고 존경하는 이가 있음에 대해 흐뭇해 한다는 것은 결국 자신을 오만하게 만들 수 있는 것이기에 경계해야할 것으로 보았으리라 생각 된다. 그러므로 꾸준함 흐뭇함으로 느끼는 '說'이 아니라 자신을 인정한 이가 있음을 알아챈 그 순간, 가르침을 얻고자 누군가 찾아온 그 순간이 기쁘고 즐겁다라고 말하기 위하여 '樂'이라 표현한 것이라 본다.

'樂'을 찾아온 순간으로 보는 것은 '來'가 한번에 그치지 않고 꾸준히 있어야만 가능한 것이다. 즉, '樂'은 찾아온 이가 반갑고 기뻐 느끼는 것이 아니라 '朋'이 있도록 자신이 말하고 행동하였음을 알게 된 것이 기쁜 것이다. 이렇게 보면 '來'는 누군가 자신의 사상에 공감하고 자신을 알아주어 찾아올 때마다 공자는 자신이 바른 마음가짐과 생활을 계속 하고 있음을 알려주는 계기가 된다. 그러니까 '來'는 '樂'의 계기이기 이전에 자기를 평가받는 계기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 '來'한 이가 '朋'이므로 기뻐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설명을 종합하여 두번째 문장을 풀어서 설명해보자.
'멀리서도 내가 바르게 생각하고 옳게 행동하는 것을 알고, 그것에 공감하는 이가 나를 찾아온다면 기쁘지 않느냐'



人不知而不慍 不亦君子乎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 하여도 노여워하지 않는다면 어찌 군자가 아니겠느냐.

흔히들 여기서 사용되는 '人'을 그냥 '남', '사람들'이라고만 해석한다.
하지만 문맥의 흐름상 '人'은 '남'이기도 함과 동시에 有朋 自有朋 自遠方來 不亦樂乎의 '有朋'과 대립되는 개념이다. 그 중에서 '有朋'과 대립되는 것이 더 비중이 크다.
有朋은 앞서 설명하였듯 자신의 학문적 동지 또는 자신을 인정해주는 이를 말한다. 이에 반해 人不之의 '人'은 '자신의 뜻에 반하는 이', '자신을 인정하지 않는 이', '자신의 뜻과 학문에 관심이 없는 이'로 해석이 된다.


人不知而不慍 의 뜻을 學而時習之 不亦說乎와 연결해서 보면 '人'을 위와 같이 해석 한 이유를 이해할 수 있다. 學而時習之 不亦說乎와 연결하여 해석한다면 人不知而不慍는 다음과 같이 풀어진다.
'나는 學而時習之 不亦說乎하는데(늘 배우려는 마음과 그것을 실천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기에 즐겁다고 하는데) 나를 폄하하거나 그렇게 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등 자신을 부정하고 비판하는 이가 있다 해도 여기에 괘의치 않는다'
글이 가지는 의미를 바로 풀어서 해석되는 '자신의 능력을 인정하고 알아주지 않는 것에 대해 노여워 하지 않는다'와는 조금 다르게 풀이된다.

앞부분을 이렇게 글의 뜻이 전하는 대로만 해석하지 않고 위와 같이 보는 가장 큰 이유는 不亦君子乎때문이다.


不亦君子乎전체를 해석하기 앞서 이 문장에서 말하는 '君子'가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살펴야 한다. '君子'에 대해서 공자와 맹자가 말하는 君子에 대해 이래저래 말이 많고 설명도 많다. 그러나 누가 뭐라하건 문장 전체를 두고 본다면 不亦君子乎에서 말하는 '君子'는 그 조건과 의미가 분명하다.
이 문장에서 말하는 '君子'는 앞서 學而時習之 不亦說乎하는 이를 말한다. 즉, 늘 배우고 이것을 실천하는 것을 즐거워하는 이가 바로 이 문장에서 말하는 '君子'이다.
君子의 의미를 이와 같이 분명하게 해석할 수 있는 것은 人不知而不慍 不亦君子乎을 글의 뜻만으로 풀어 말할 때 왠지 어색한 해석에서 비롯된다. 물론 人不知而不慍에 대해 앞서 설명한 대로 해석한 뒤 ('늘 배우려는 마음과 그것을 실천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기에 즐겁다고 하는데 나를 폄하하거나 그렇게 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등 자신을 부정하고 비판하는 이가 있다 해도 여기에 괘의치 않는다') 不亦君子乎를 붙여 '그렇다면 군자라 할 수 있지 않냐?'라고 해석을 마친다면 그것도 왠지 껄끄럽다. 겨우 남이 나를 몰라주는 것(자신의 능력을 알아주지 않는 것)으로 화를 내지 않는 다고 군자라 말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은 '나 소심하지 않다'라고 하는 말로 공자의 인격을 두고 본다면 굳이 이말을 할 필요가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이 의문에 대한 해답은 문장의 해석 방식에 있다.
人不知而不慍 不亦君子乎는 앞의 문장들을 해석하는 것과 조금 다른 방식으로 해석해야 한다.
앞의 學而時習之 不亦說乎와 有朋 自遠方來 不亦樂乎는 '~하면 ~하다'와 같은 구조를 가진다. 즉 앞문장이 원인과 행동이고 뒷문장은 그 원인과 행동으로 인한 결과가 된다. 그러나 人不知而不慍 不亦君子乎.는 '~하면 ~하다'로 풀면 안된다. 人不知而不慍不亦君子乎.은 '~하는 것은 ~하기 때문이다'라고 풀어야 한다.

人不知而不慍 不亦君子乎를 이렇게 풀어보면 다음과 같다.

'나는 學而時習之 不亦說乎하는데(늘 배우려는 마음과 그것을 실천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기에 즐겁다고 하는데) 나를 폄하하거나 그렇게 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등 자신을 부정하고 비판하는 이가 있다 해도 여기에 괘의치 않는다. 그럴 수 있는 것은 내 스스로 비추어 군자의 도리를 다하여 떳떳하기 때문이다.

이제 정리해서 문장 전체를 완전히 풀어 보겠다.
문장전체를 완전히 풀 때는 앞에 각각의 해석과 또 조금 달라진다.

그럼 지금까지 해석한 것들을 토대로 위의 내용들을 해석해보겠다.

공자가 말하기를...
늘 배우려는 마음가짐을 가지고 지내고 배운 것을 실천하려 노력하며 생활한다면 내내 즐거운 기분이 든다.

자신의 뜻과 모습에 공감하여 멀리에서 만나고자 찾아오는 이가 있다면, 비로소 내가 바르게 살아가고 있음을 알게 되는 것이니 기쁜 일이다.

혹시 내가 잘못되었다고 말하거나 부정하는 이가 있다고 하여도 스스로 비추어 부끄럽지 않도록 행동하였기에 괘의치 않는다.

이상의 글들을 테니스인의 시각으로 해석하고 지침으로 삼아도 손색이 없겠죠?

“테맨이 말하기를 ...
늘 배우려는 마음가짐을 가지고 지내고 배운것을 실천하려 노력하며 테니스를 친다면 내내 즐거운 기분이 든다.

자신의 테니스에 대한 뜻과 모습에 공감하여 멀리에서 함께 하고자 찾아오는 이가 있다면, 비로소 내가 바르게 테니스를 치고 있음을 알게 되는 것이니 기쁜 일이다.

혹시 내가 테니스에 대하여 잘못되었다고 말하거나 비꼬는 이가 있다고 하여도 스스로 비추어 부끄럽지 않도록 행동하였기에 괘의치 않는다.”

여러분 저의 생각에 공감하시나요.
인간관계를 지속시키고 노력하는 궁극적 가치는 “즐거움”을 얻고 함께 나누고자 함이라고 배웠습니다.

제6차 전테교 전국모임속에서 그 즐거움을 얻고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장황하고 허접한 글... 함께 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