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샘프라스의 추억

테니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는 누구일까요?


사실 이런 질문은 답이 나오기 힘든 질문입니다. 척도에 따라 답이 다를 수 있고, 각종 조건의 변화가 비교를 어렵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이런 비교가 재미는 있습니다. ㅎㅎ

하지만 오픈 시대 이후로 가장 뛰어난 "전적"을 보여준 선수는 누구인가로 질문을 바꾸면 대답은 이론의 여지 없이 샘프라스입니다.


단기간에 가장 강력한 임팩트를 발휘했던 선수를 꼽아보면 비외른 보리를 첫 손에 꼽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겠습니다만, 보리는 26세에 조기 은퇴했기에 통산 전적이 샘프라스를 따라갈 수 없습니다.



현재 선수들 중에서는 로저 페더러가 유일하게 샘프라스의 기록을 따라잡을 가능성을 지닌 선수인 것 같습니다. 


물론 페더러의 프로 데뷔 후 현재까지 7년간의 성적도 샘프라스의 데뷔후 7년의 성적과 비교해 볼 때 약간 미흡한 감이 있기는 합니다만. (동기간 승률에서도 페더러가 약간 떨어지고, 동기간 메이저 타이틀 획득수도 약간 떨어집니다.) 


앞으로 약 7년간 페더러가 기복 없이 현재의 압도적인 페이스를 유지할 수 있다면 샘프라스의 기록에 근접하게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나마 페더러니까 이게 가능한거지 이외의 선수들은 샘프라스에 근접할 가능성 조차 희박할 것 같습니다.  


불과 10년의 간격을 두고 테니스계의 불세출이 될 가능성이 높은  두 선수가 연속해서 출현한 셈이니 구경꾼으로서는 행운이라고 해야하겠지요.  

저는 샘프라스 테니스를 보는 것을 즐겨하지는 않았습니다. 맨날 너무 쉽게 이기니까요. 설사 샘프라스 경기를 보게 되더라도 은근히 샘프라스의 상대를 응원하곤 했던 것 같습니다. '누가 쟤 좀 말려봐!' 하는 심정이었을까요. . .

아무튼지간에, 샘프라스가 약간은 속이 빈 짧은 곱슬머리로 어슬렁거리며 코트에 나타나면 상대 선수들은 도망가고 싶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답이 없는 문제를 푸는 것만큼 부질없는 그리고 힘빠지는 일은 없을테니까요. 


당시의 마이클 창은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피트가 최상의 플레이를 할때는 그의 발리를 뚫고 패싱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네트를 넘어가서 그의 라켓 줄을 끊어놓기라도 해야 하나?” “아, 피트의 약점을 하나 알고 있다. 그는 요리를 할 줄 모른다!”

그렇다면 피트 샘프라스가 통산 전적에서 밀렸던 선수는 한 명도 없었을까요?


5전 이상 붙어본 선수 중에서 피트에게 우위를 보인 선수는 딱 세명입니다. 이중 두 명은 샘프라스의 은퇴기에 집중적으로 붙어서 각각 4승 3패와 5승 4패를 거둔 휴이트와 사핀입니다. 영웅의 은퇴길에 소금을 뿌린 어린 친구들이라고나 할까요? ㅎㅎ 아무튼 이들은 샘프라스의 전성기를 피해서 대결한 것이기에 샘프라스에 진정으로 우위를 보였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그럼 나머지 한명은 누구일까요?

놀랍게도 크라이첵입니다. (물론 크라이첵도 훌륭한 선수였습니다만. . .) 크라이첵은 샘프라스에게 통산 전적에서 우위를 보인 사실상 유일한 선수입니다. 샘프라스는 통산 전적에서 4승 6패로 크라이첵에 밀렸습니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크라이첵만은 샘프라스 앞에서 꼬리를 말아 넣지 않고 할 말 다하곤 했던 것 같습니다.

  크라이첵과의 일화: 1998년 윔블던 오픈 중에 크라이첵이 피트가 넘버 원이 아닌 10위 선수처럼 경기하고 있다고 논평하자 피트는 다음과 같이 말하며 슬쩍 피합니다: “언젠가는 할 수 있겠지. Well, I will make it one day.” 당시까지 피트와 크라이첵의 상대 전적은 2승 5패로 크라이첵이 앞서고 있었으며, 결국 통산 전적도 4승 6패로 크라이첵이 앞섰다.


한편 되지도 않는데 공연히 피트에게 엉겼다가 피본 사람도 있습니다. 그렉 루세드스키입니다. 그렉과 피트의 관계에 관련된 일화는 두 개가 전해집니다.

Episode 1: 피트와 그렉이 90년대 후반에 플로리다에서 연습을 하고 있을때의 일이랍니다. 당시 샘프라스는 세계 1위 자리에서 잠시 밀려난 상태였나봅니다. 그렉이 "2등 선수가 된 기분이 어떠냐?"고 놀리자 샘프라스는 더 독한 말로 반격합니다.


"너네 나라에서 2등 선수로 지네는 너의 기분은 어떠냐?" 그렉 루세드스키는 캐나다 출신인데 영국으로 귀화했습니다. 영국 No.1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팀 헨만입니다. 그렉은 그때부터 지금까지 단 한번도 변함 없이 계속 영국 No.2입니다. 샘프라스의 저주일까요ㅎㅎ



Episode2: 이 때 감정이 쌓였을까요.

아니면 샘프라스가 은퇴할 때쯤 되니까 엉겨볼만 하다고 생각했을까요. 2002 US 오픈에서 그렉은 열심히 해 보지만 결국 풀 세트 접전 끝에 샘프라스에게 결국 지고 맙니다. 곱게 지면 좋았을 것을 경기 후 인터뷰에서 샘프라스 심사를 한 번 긁어 놓습니다: “샘프라스는 네트로 뛰어나가는데 한걸음 반정도 느려 졌다. 

그는 더이상 과거의 샘프라스가 아니다. 그가 다음 경기를 이긴다면 놀라운 일일 것이다.” 이 말을 전해 들은 샘프라스는 발끈 해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의 이의 제기에 이의가 있다." 


그렉의 발언에 자극 받았는지 분발한 샘프라스는 결국 그 대회(2002 US 오픈)에서 우승을 거머쥐면서 보기좋게 그렉의 판단이 틀렸음을 입증합니다.

재미있는 것은 샘프라스와 그렉의 상대 전적이 9승 1패라는 점입니다. 경기 때마다 쥐잡듯이 몰렸으니 그렉이 감정이 쌓였을 법도 합니다.

피트도 남자였다는 것을 알려주는 인터뷰도 있습니다 ㅎㅎ: "여자 테니스에서 가장 좋아하는 선수는 누구냐?" "흐흐흐. 그라프다. 그녀는 가장 멋진 다리를 가졌다." (아가시가 그라프를 사귀기 전에 이뤄진 인터뷰겠지요 아마.)

재미있는 이야기는 한도 끝도 없는데 너무 길게 갈수는 없으니 제 이야기는 이만 접어야 할 것 같습니다. 


끝으로 한마디: 샘프라스는 가뜩이나 원래 무거운 프로스탭 오리지날(85in) 라켓을 400 g 정도까지 무게를 늘려서 사용했는데도 누구보다 빠른 스윙 스피드를 보여주었습니다. 텐션은 80-85 lbs.  이게 사람 맞습니까?


(아래 글의 출처는 tennisserver.com이고 원저자는 빈스 바 입니다. 몇 년 전에 써진 글이라는 것을 감안하고 읽어주시기 바랍니다.다른 곳으로 퍼가시는 것은 좀 자제해 주셨으면 합니다. 부탁드립니다.)



피트샘프라스: 역사상 최고의 선수?

이런 식으로 끝나야만 했다는 것을 당신도 알 것이다. 피트 샘프라스가 자신의 숙적 안드레 아가시를 2002 US 오픈 남자 단식 결승에서 6-3, 6-4, 5-7, 6-4로 꺾었을 때 이는 남자 프로 테니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가 마지막으로 우리에게 보여준 아름다운 끝맺음이었다. 


이는 또한, 여러가지 측면에서, 한바퀴를 꽉 채우고 출발점으로 되돌아가서 끝맺음하는 그의 경력을 표상해주는 것이기도 했다. 1990년 19세 청년 샘프라스는 아가시를 꺾고 생애 첫 메이저 대회 우승을 거뒀다. 12년의 세월이 흐른 후에 그의 마지막 우승이 동일한 대회, 동일한 선수를 상대로 이뤄졌다는 것은 너무나도 안성맞춤으로 보인다.    

아무도 샘프라스가 위대한 선수라는데 대해서는 토를 달 수 없을 것이다. 설혹 몇몇은 샘프라스의 허전한 부분에 대해 딴지를 걸려고 해 볼수는 있겠지만. 피트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피트가 아가시와는 달리 프렌치 오픈을 차지해 본 적이 없기에 커리어 그랜드 슬램을 달성하지 못했다고 지적할 것이다. 


물론, 그 사람들에게는 아마도 안드레의 업적이 가장 위대한 성취로 보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양자의 상대 전적을 따져본다면 안드레가 피트보다 나은 선수라고 주장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피트와 안드레의 상대 전적은 통산 대결에서 20-14, 메이저 대회 결승에서 4-1, 결승 대결에서 9-7이다. 동일한 시대에 뛴 두 선수를 비교할 때 바로 이러한 상대 전적이 가장 우선적인 비교의 척도가 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두번째로, 피트는 안드레보다 안정적으로 전성기 수준을 꾸준히 유지해왔다. 안드레는 한 때 테니스가 최우선이 아니었던 시절도 있었으며 1997년의 한 시점에는 이것이 결과로도 나타났다. 이 때 그는 랭킹이 141위로까지 떨어졌으며, 심지어 챌린저 대회에 나가야만 하기도 했다.


  이를 샘프라스의 흠잡을데 없는 기록과 비교해보기 바란다: 286주간 랭킹 1위. 이는 역사상 최고이며 영원히 최고 기록으로 남게 되었다. 왜냐하면 ATP가 2000년부터 챔피언스 레이스 랭킹을 강조하기 위해 주간 랭킹 시스템을 폐기했기 때문이다. 피트는 또한 넘버 원으로 한 해를 끝낸 최다 기록을 가지고 있다: 그는 경이롭게도1993-8에 걸쳐 6년 연속 No.1으로 시즌을 끝냈다.      

서로다른 시대의 선수들을 비교하는 것은 아무리 잘 이뤄지더라도 불확실성을 함축할 수 밖에 없고, 최악의 경우에는 타당성조차 떨어질 수 있다. 게임 자체의 변화, 장비의 변화, 경쟁 조건의 변화, 상대선수 수준의 차이 등등으로 인해 서로다른 시기의 두 선수를 비교하는 것은 의미있는 비교가 되기 어렵다. 


혹자는 로드 레이버가 최고였다고 말할 것이다: 그는, 결론적으로, 그랜드 슬램(한 해에 4대 메이저 대회를 모두 우승하는 것)을 한번도 아니고 두번씩이나 이뤄냈으니까. 이들은 로드 레이버가 자신의 최전성기이던 1960년대의 일정 기간동안 ‘프로’와 ‘아마추어’의 지위 갈등으로 인해 (당시는 ‘오픈’ 시대가 아니었슴) 대회에 참가할 수 없었다는 점을 또한 제시할 것이다.   



하지만, 피트와 마찬가지로, 로드도 “역사상 최고”의 칭호를 겸손하게 거절한다. 레이버는 자신이 출전했던 대부분의 대회들은, 오늘날과는 달리 1960년대와 197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훌륭한 선수의 층이 두텁지 않았으므로, 8강 진출이 아주 쉬웠다고 여러번 말했다. 진정한 인터네셔널 게임이 이뤄지는 오늘날에는 오직 클레이에서만 플레이하고 다른 코트 표면들은 마스터하려고 시도조차 하지 않는 뚜렷한 선수층이 유럽에 존재한다. 


이 선수들이 (즉, 클레이 전문 선수들) 존재하기 때문에, 오늘날 풀 스케쥴을 소화하려고 진지하게 노력하는 선수들이 프렌치 오픈에서 우승하는 것은 더욱 어렵게 되었다. 기왕 코트 표면 이야기가 나왔으니 오늘날과 레이버가 플레이하던 시대의 코트 차이를 말해보자면: 레이버 시대에는 슬램 대회중 3개가 잔디에서 열렸으나 샘프라스는 4 가지의 서로 다른 코트 표면에서 싸워야만 했다. 물론 그랜드 슬램을 두번 달성한 레이버는 충분히 존경받을만 한다. 하지만 피트가 매년 3 개의 슬램 대회를 잔디에서 할 수 있었다면 얼마나 많은 우승을 더 할 수 있었을 것인가를 생각해보라.  



피트가 남긴 가장 위대한 업적은 7 번의 윔블던 우승일 것이다: 아무도 이에 근접조차 하지 못한다. 기술적으로는, 물론, 19세기에 영국인 윌리엄 렌쇼가 또한 윔블던 타이틀을 7번 제패했다고 한다. 하지만 렌쇼가 우승했던 당시의 상황은 현대의 상황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그 당시에는 전년도 챔피언은 다른 선수들이 예선을 거쳐 ‘챔피언 결정전’ 진출자를 결정할 때까지 기다려서 그와 한 판 승부를 통해 챔피언을 가리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다시 말해서, 위블던은 전년도 우승자에게 도전할 수 있는 권리를 따내기 위해 전년도 챔피언을 제외한 선수들이 경쟁하는 체제였던 것이다. 타이틀을 지키기 위해 한 경기만 하면 되는 것이 일곱 경기를 해야만 하는 것만큼 어려울 수는 결코 없다. 경쟁의 질적 차이는 일단 논외로 하더라도 말이다. 


1993년 대회부터 2001년 8강전에서 로저 페더러에게 5세트까지 가는 접전 끝에 질때까지에 이르도록 피트는 윔블던 56승 1패라는 경이로운 기록을 작성했으며, 윔블던 통산 전적 63승 7패를 기록했다.  



[주: 윔블던에서의 피트의 업적이 비교 불가능하도록 뛰어나다는 것은 미국인 저자의 입장에서 본 과장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윔블던만 놓고 볼 때 가장 압도적이었던 선수는 비외른 보리라고 말하는 것이 좀 더 적절하지 않나 싶습니다. 비외른 보리는 76년부터 80년까지 5연속 우승을 거둡니다. 물론 7번 보다 우승 횟수는 적지만 5연속 우승이 7번 우승보다 쉬워보이지는 않습니다. 


또한 비외른 보리의 윔블던 통산 전적도 51승 4패로서 샘프라스의 63승 7패보다 못하지는 않아보입니다. 비외른 보리의 윔블던 5연속 우승이나 윔블던 41연승 기록이 앞으로 깨질 가능성은 거의 없지 않을까 싶습니다. 윔블던 대회 홈페이지를 둘러보면 윔블던의 영웅들을 나열하면서 보리를 첫 머리에 올리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피트는 코트에서의 처신 때문에 비판받았다. 


그는 감정을 충분히 노출하지 않았으며, 언제나 침울해보였고, 결코 스스로 즐거워하지 않는것처럼 보였다는 것이다. 그러더니, 막상 그가 주체할 수 없는 강한 감정을 분출하는 드문 경우가 발생하자 아무도 그의 감정 분출을 진심이라고 믿지 않았다. 1995년 호주 오픈 8강전에서 벌어진 짐 쿠리어와의 전설적인 대결을 잊을 수 있는 사람은 드물것이다. 


그는 경기 직전 자신의 코치인 팀 걸릭슨이 뇌종양으로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관중석에서 누군가가 피트에게 “코치를 위해 이겨라!”고 소리치자 피트는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쿠리어마저도 감정이 격해져서 샘프라스에게 다음날 경기하자고 말할 정도였다. 놀랍게도 피트는 눈물을 극복했고 2 세트를 뒤진 상황에서 경기를 역전시켰고, 결국 결승에서 아가시에게 패하게된다. 


1996년으로 건너가보자: US 오픈 4회전에서 스페인의 알렉스 코레차와의 대결에서 피트는 몸이 좋지 않았고 결국 경기중에 탈수증세를 일으켰다. 그는 결국 코트 바닥에 드??鍍퓸解? 결국 그에게 돌아온 것은 관중들의 응원을 끌어내기 위해 쇼를 했다는 비난이었다. 언제 그가 관중들의 응원을 필요로 했던 적이라도 있었던가? 


그는 결국 5세트의 난전 끝에 승리했고 결승에 올라 마이클창을 꺾고 우승을 쟁취했다. 샘프라스는 좀처럼 관중의 응원을 받기가 힘들었다. 그는 대부분의 경우 너무나 압도적이었기에 사람들은 단지 다른 사람이 우승 트로피를 움켜쥐는 것을 보기 위해서라도 피트의 상대방을 응원하곤 했다. 


1998년 윔블던 결승에서 고란 이바니세비치를 꺾을때도 이런 상황이 발생했다; 대다수의 관중들이 고란을 응원하고 피트를 야유했다. 그 결승전은 그가 출전했던 메이저 대회 결승 중에서 가장 어려웠던 경기중의 하나였다.          



혹자는 테니스를 미국 대중에게 알리는데 그가 충분히 기여하지 않았다고 말할 것이다. 그는 테니스 라켓이 충분히 팔리도록 해주지 않았으며, 개인적인 모습을 대중에게 충분히 드러내지 않았고, 제품들을 추천하는 따위의 일들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물론, 그는  “따분한 사람”이라는 지긋지긋한 비난을 결코 잠재울 수 없었다. 


누군가가 이런 코멘트를 했다는 사실 자체가 우선 낯뜨거운 일이다. 언제부터 프로 선수의 사적인 생활 부분까지 공적 영역에 포함되게 되었단말인가? 이반 렌들은 샘프라스를 옹호하면서 코트에서의 피트의 행동에 대해 비난하는 것은 터무니없는 것이라고 말한다: “겸손하고, 예의바르고, 점잖고, 충분히 영리하며, 복장도 모범적인 선수가 바로 자신의 이러한 방식에 대해 사과해야한다는 것은 정말 역겨운 일입니다.”  

[주: 로드 레이버는 피트를 따분하다고 비난하는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따끔한 일침을 가합니다.: “사람들이 그의 서브를 받아넘기지 못하는 것이 따분할 수는 있겠다. 하지만 피트보고 따분하다고 말하지는 마라!”]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의 S.L. Price는 피트가 너무 훌륭한 선수였기에, 그리고 피트가 보여준 탁월한 수준의 꾸준한 유지가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아무도 진정으로 이해하지 못했기에, 피트의 위대함을 사람들이 충분히 깨닫지 못한 것이다고 말했다. “그의 위대함을 논박하려는 것은 언제나 실패할 수 밖에 없었다. 


테니스 순수주의자들은 당연히 그의 기술을 사랑했다. 이들은 지체없이 샘프라스의 세컨드 서브, 러닝 포핸드, 그리고 점프 스매시를 박물관의 보호유리 안에 넣어 보존해야할 테니스의 보물들로 선포할 것이다. 하지만 테니스를 잘 알지 못하는 대중들은 오직 라켓을 집어던지거나, 불끈 쥔 주먹으로 하늘을 찌르거나 혹은 패션의 새로운 장이 열렸을 때만 비로소 테니스가 카리스마틱하다고 생각한다.” (23쪽,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 2003년 1월9일)  



나는 운좋게도 피트의 정성기때의 경기를 볼 수 있었다. 




그가 (4대 메이저 대회 이외에) 가장 좋아하던 대회 중의 하나는 신시네티에서 열리는 마스터즈 대회였다. 그는 이 대회에서 세번의 타이틀을 차지했고 (1992,1997,1999) 총 38승 11패를 기록했다. 피트는 연습할 때 몹시 설렁설렁하곤 했다-정작 중요한 시합들을 위해 베스트를 아껴놓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1997년의 어느날, 그는 118번의 서브 게임중 단 두 게임만을 내주는 압도적인 서비스로 윔블던 경기장을 달군뒤 신시네티로 와서 안드레이 메드베제프와 연습을 하고 있었다. 두사람은 마치 피를 건 내기를 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진지하게 뭔가를 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나는 아마 네트에서 약 5 m 정도 떨어져서 구경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피트가 안드레이에게 정면으로 볼을 대주자 안드레이는 대부분의 선수들이 받아낼 수 없을 엄청난 크로스코트 스매시를 꽂았다. 하지만, 피트는 볼을 쫒아 달려가더니 러닝 포핸드를 사용해서 앨리 부근으로 리턴을 날렸다. 이 볼은 코너쪽, 정확하게 복식 사이드라인과 베이스라인의 교차점에 떨어졌다. 정황으로 미루어보건대, 피트는 동전 하나가 들어감직한 바로 그 지점을 겨냥했던 것으로 보였다. 


안드레이는 볼 마크를 체크하기 위해 걸어가서 재차 확인을 했다. 그리고는 샘프라스를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머리를 설래설래 흔들고는 터벅걸음으로 사라졌다. 피트는 함박 웃음을 참으면서 라켓을 들고 네트 앞으로 나왔다. 터져나오는 폭소를 참기위해 엄청나게 노력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피트 자신도 자신이 진정 얼마나 잘하는지를 몰랐던 모양이다.   

 

[주 - 이 때 피트의 위대함에 질려버렸던지 나중에 안드레이 메드베제프는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피트는 지구상에서 테니스 라켓을 잡았던 선수들 중에서 가장 위대한 선수다.”]



팬들과 언론은 때때로 피트에게 실례를 범하곤 했지만, 피트는 동료 선수들로부터는 커다란 존경을 받았다. ATP 투어는 창립 25주년을 기념하여 지난 25년간 최고의 선수는 누구인가를 뽑는 투표를 했다. 투표인단은 과거의 선수들, 대회 운영자들 그리고 프로 테니스에 긴밀하게 관여하고 있던 사람들로 이루어졌다. 이 투표에서 샘프라스는 26개의 1위표를 확보해서 “지난 25년간 최고의 선수”의 영예를 차지했다. 비외른 보리는 17개의 1위표로 2위, 매캔로는 13표로 3위를 차지했다.


1998년 피트는 지미 코너즈의 연말 1위 연속 기록을 추격하고 있었다. 피트는 당시 칠레의 마르셀로 리오스와 1위 자리를 놓고 치열한 포인트 경합을 벌이고 있었다. 새로운 기록을 달성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피트는 유럽의 가을 인도어 경기 시즌에 참여하기로 결정했다-그는 평소에는 이 시즌에 참여하지 않았었다. 


그는 비엔나에서 열리는 테니스 대회에 참여하려고 했지만 그가 뛸 수 있는 와일드카드가 남아있지 않았다. 그런데 보리스 베커는 출전권을 확보한 상태였다.  당시 보리스 베커는 커리어의 황혼기로서 간헐적으로만 대회에 참가하고 있었다. 


피트는 보리스에게 전화를 걸어서 자신이 달성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바를 말했다. 베커는 너그럽게도 본선 대진표에 있던 자신의 자리를 양보했고, 피트는 결국 출전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피트는  우승과 함께 358점의 소중한 포인트를 획득함으로써 그 기회를 제대로 활용했다.  
  

피트가 아닌 다른 선수였더라면 베커(혹은 다른 어떤 선수라도)는 결코 본선 대진의 자신의 자리를 양보하지 않았을 것이다. 베커는 자신이 싸워본 선수들 중에서 피트가 최고의 선수라고 여러번 말한 적이 있다. 


베커는 2003년 US 오픈에서 열린 샘프라스의 은퇴기념식에 샘프라스에게 직접 인사하려고 찾아온 세명의 은퇴 선수들 중의 하나이다. 베커는 단지 피트의 은퇴식에 참여하기 위해 독일 뮌헨에서 뉴욕으로 날아왔다. 이는 위대한 선수가 보여준 피트에 대한 존경의 표시라고 볼 수 있다.  

[주 - 보리스 베커 또한 위대한 선수중의 하나입니다. 베커는 여러 번에 걸쳐 난처한 상황에 놓인 샘프라스를 옹호하고 지원하는 발언을 합니다. 샘프라스의 실력과 더불어, 경기에 대한 진지한 접근, 겸손하고 온화한 품성 등이 베커로 하여금 샘프라스의 절대적인 지지자가 되도록 만들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베커가 샘프라스를 존중하고 후원한 가장 큰 이유는 무엇보다도 샘프라스의 실력에 대한 인정이 아니었겠나 생각합니다. 베커는 1997년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와의 인터뷰에서 샘프라스를 가장 완벽한 선수로 꼽습니다: “나에게 있어서는, 그(피트 샘프라스)는 언제나 가장 완벽한 선수였습니다. 그는 파워, 스피드, 그리고 감각을 지녔습니다. 그는 지금까지의 테니스 선수중 최고입니다.”] 



내가 개인적으로 직접 목격할 수 있었던 피트 샘프라스 모멘트들 중에서 첫 손가락으로 꼽는 것은 1997년 9월 호주와의 데이비스컵 준결승이다. 이 대결은 호각지세의 접전이 될것으로 점쳐졌고, 호주팀 캡틴인 존 뉴컴의 전략은 피트와의 단식 두 경기는 포기하고 마이클 창과의 두 경기를 잡고, 우드브리지 형제가 출전하는 복식을 잡아서 이기는 것이었다. 


하지만 마이클 창은 첫 경기에서 마크 필리포시스를 깼고 다음으로 피트가 패트릭 라프터와 상대하게 되었다. 나는 당시 데이비스컵 미국팀 캡틴이었던 톰 걸릭슨에게 당시의 대결에 대해 말을 붙여보았다. 걸릭슨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내가 참여했던 데이비스컵 대회들 중에서 가장 멋진 대결중의 하나였습니다.


1997년 데이비스컵 준결승에서 우리는 오스트레일리아를 4-1로 이겼습니다; 당시 라프터는 막 US 오픈을 우승한 직후였습니다. 라프터와의 대결에서 보여준 마지막 세 세트는 내가 본 샘프라스의 경기중 최고였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알다시피 첫 세트부터 손에 땀을 쥐게하는 엄청난 테니스였습니다. 피트는 타이브레이크에서 졌지요. 두 선수 모두 훌륭했습니다. 라프터는 다이빙 발리와  오버헤드를 구사하면서 네트를 온통 휘저었습니다. 


피트는 몇 번의 브레이크 포인트와 두 번의 세트 포인트 기회가 있었지요. 첫 세트가 끝나고 나는 피트에게 말했습니다. ‘피트, 첫 세트는 정말 운이 없었어. 플레이 레벨을 여기서 한 단계 더 끌어 올릴 수 있겠나? 그의 서브 게임때마다 거의 브레이크를 시킬 수 있을 정도까지 따라붙고 있거든. 아주 조금만 수준을 끌어올릴 수 있다면  저 친구를 무너뜨릴 수 있을 것 같아.’ 그리고 그는 이야기 나눴던 것을 그대로 해냈습니다; 그는 완전무결한 테니스를 펼치면서 다음 두 세트를 6-1, 6-2로 따냈습니다. 


그의 위너 대 에러 비율은 아마 위너 네 개당 에러 한 개 정도 됐을겁니다. 이건 내가 직접 목격한 테니스 중에서 가장 최고급의 테니스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네번째 세트를 6-4로 따내면서 경기를 마무리지었습니다. 정말 멋진 경기였습니다.” 



2000년 윔블던을 우승하면서 로이 에머슨의 그랜드 슬램 단식 우승 12회 기록을 깨고나자 피트는 테니스에서 더 이룰 것이 남지 않게 되었다. 그의 입장에서 보자면, 그는 프렌치 오픈 우승에 집착하지는 않았다. 


그는 프렌치 오픈에서 최선을 다했고, 결국 그 대회에서 한번도 우승을 하지 못하더라도 자신의 모든 노력을 쏟아부었으니 만족스럽게 은퇴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다른 프로 선수들은 그렇게 쉽게 만족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다. 


비외른 보리가 25살의 이른 나이에 은퇴한 것은 부분적으로는  US 오픈을 우승할 수 있는 길을 찾아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반 렌들은 그의 경력의 황혼기에, 윔블던 우승을 한 번 해보려고, 거의 잔디코트 경기만을 뛰었다. 피트가 참가하는 모든 대회에서 우승하고 싶어했다는 것에 대해서는 의심할 바가 없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참가하기로 되어있는 다른 대회들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을 포기하면서까지, 특별히 한 대회에만 애착을 보이거나 집착하지는 않았다. 설사 그 대회가 남자 테니스 역사에서 그의 입지를 공고하게 해 줄 수 있는 대회였다 할지라도.   



2000년 9월 피트는 US 오픈 결승전에서 러시아의 마라트 사핀에게 3 세트를 내리 내주며 졌다. 이는 과거 메이저 대회 결승전에서 그에게 결코 일어날 수 없었던 일이었다. 이것이 아마도 그의 경력에서 가장 힘든 시기의 시작이었을 것이다. 


그는 이 패배 이후 몇 주 후에 배우 브리지트 윌슨과 결혼했다. 그리고는 포르투갈 리스본에서 열린 그해 마지막 대회에 출전하기 전까지는 아무 대회에도 참가하지 않았다. 리스본 대회에서 그는 준결승까지 진출에서 구스타보 쿠에르텐에게 패했다. 구스타보 쿠에르텐은 세계 넘버 원으로 그 해를 마감했다.  



샘프라스의 높은 기준에서 보자면 2001년은 좋지 않았다. 그는 인디언 웰즈 대회에서 결승에 진출해서 아가시에게 졌다. 그리고는 윔블던에서 페더러에게 졌다. 갑자기 그가 은퇴하려 한다는 둥, 그가 한 걸음 느려졌다는 둥 하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그는 결국 US 오픈 결승전에서 (다시 내리 3 세트를 내주면서) 레이튼 휴이트에게 패했다. 그 패배로 인해 1993년부터 2000년까지 그가 이어오고 있던 매년 최소한 한 개 이상의 메이저 대회에서 우승하던 연속 기록이 깨지고 말았다. US 오픈 이후 연말까지 그는 한 대회에만 더 출전했다. 은퇴하지 않는다는 피트의 각오는 단호했다. 그는 그가 얼마 안가 곧 은퇴할 것이다는 추정을 터무니없는 것으로 여겼다.   



피트를 가장 화나게 했던 것은 끝없이 나돌던 그의 은퇴설이나 그의 경기력이 떨어지고 있다는 주장이 아니었다. 피트를 진정으로 화나게 했던 것은 자신의 결혼에 대한 존 매캔로의 근거없는 비판이었다. 이는 그를 불같이 화나게 했다. 매캔로는 피트의 형편없는 경기(피트의 높은 기대치에 비춰보자면)의 원인을 브리지트에게 돌렸다. 


피트는 만약 누군가가 자신의 경기 결과들에 대해 문제삼고 싶다면 피트 자신만을 걸고 넘어지라고, 특히 자신의 코트에서의 경기를 걸고 넘어지라고 말하면서 자신의 부인을 옹호했다. 이는 브리짓트는 절대 건드리지 말라는 말이었다. 브리지트와의 결합은 테니스 안과 밖을 통털어서 그에게 일어난 최고의 일이었다. 


실제로,  결국 2002년 US 오픈 우승을 거머쥐었을때  그는 자신의 프로 선수 경력에서 가장 암울했던 시기를 뚫고 나오는데 도움을 준 그녀에게 공로를 돌렸다. 그녀의 격려, 후원 그리고 사랑이 없었더라면 그는 2000년 윔블던과 2002 US 오픈 사이에 한번도 우승하지 못한 것에 씁쓸해 하면서 은퇴해야 했을지도 모른다.  

  

10여년의 프로 테니스 경력중에 최초로 피트는 테니스 코트 바깥에서의 삶을 진행시키고 있었다. 2002 US 오픈이 열리기에 앞서 피트는 CBS 해설자 딕 엔버그와의 인터뷰에서 세계 1위는 충분할 만큼 해봤다고 말했다. 과거와는 달리 이제 테니스는 더이상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부어야할 유일한 대상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아직 한 번 더 그랜드 슬램 대회 우승을 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는 이를 성취하기 전까지는 은퇴하지 않겠다는 단호한 의지를 표명했다. 대다수 사람들은 그가 윔블던을 한 번 더 제패하리라고 생각했다. 피트 자신 외에는 아무도 그가 플러싱 메도우(US 오픈)에서 다시 한번 우승하리라고 기대하지 않았다.   

 

샘프라스는 진정 보기 드문 경기인(athlete)이다. 우리들 중의 매우 소수만이 프로 선수가 되기를 꿈이나마 꿔볼 수 있다: 대부분은 자신이 좋아하는 운동을 하기 위해 돈을 내야만 하는 신세이다. 프로 선수 중에서도 또 소수만이 위대한 업적을 이룰 수 있다. 


하지만 자신의 운동 분야에서 정상에 올라설 수 있고, 성공, 실패, 상금 그리고 대중의 환호에 약해지지 않는 사람이라면 진정 보기드문 탁월한 경기인이라고 불리울 수 있을 것이다. 일정 시점에 도달하면 많은 운동선수들이 자신의 경기력을 인정받는것에 전적으로 매달리게 된다; 이는 타인에 의해 인정받는 문제, 자존심의 문제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수많은 선수들이 흔쾌히 은퇴하지 못하고 보통은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문밖으로 강제로 떠밀려 나가는 것이다.팀 스포츠의 경우에는 이들보다 잘하는 누군가가 결국 로스터에서 이들의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피트는 자신의 측근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그가 다시 한번 그랜드 슬램 대회 우승을 차지할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지 않았을때 스스로를 믿었다. 메이저 대회 우승을 거두면서 은퇴함으로써 피트는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은퇴하는 진귀한 소수에 들게 되었다. 아마 피트의 가장 훌륭한 그리고 가장 저평가된 장점은 겸손함일 것이다. 


겸손함은 우리가 흔히 프로 선수들과 연결시키지 않는 단어이다. 그는 사람들에게 그가 얼마나 위대한가를 말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그는 단지 라켓이 말하도록 만들었다. 테니스를 취재하는 기자들은 그가 자신의 입으로 자신이 가장 위대한 선수다는 말을 하도록 만들려고 숱하게 시도했다. 그러나 그 때마다 그는 그런 주장을 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리고 여러 측면에서 그의 생각은 옳다. 프로 테니스에서 너무 많은 것들이 변해왔으며, 서로다른 시대의 비교는 기껏해야 추정에 머물뿐이고, 최악의 경우는 전적으로 부정확할  수 밖에 없는 법이다.    

  

선수가 자신의 시대에 얼마나 지배적이었는가를 평가할 수 있는 최선의 척도는 그가 맞서 싸웠던 상대들과의 맞상대 통계를 살펴보는 것이다. 


그의 (예정된) 명예의 전당 커리어를 통털어, 샘프라스는 297명의 서로다른 사람들과 싸웠으며 이들중 245명에게 우위를 기록했다. (82.5%의 승률). 이 중에서 단 한 번만 맞상대했던 경우를 제외한다면 (승패에 관계없이 제외하는 것이 공정하다. 


단 한경기라면 운으로 이기고 질 수도 있으니까.) 그의 승률은 91.6%으로 올라가고, 154명의 다른 상대들 중 141명에게 우위를 점한다.  어떤 잣대를 들이대더라도 이는 충분히 지배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특히 이 통계에 그가 약점을 보였던 클레이 코트 기록도 포함되어있기 때문이다.


10위 이내의 선수들을 상대로 그는 114승 60패로 평균 65.5%의 승률을 기록했다. 11위부터 100위 사이의 선수들을 상대로는 571 경기에서 77.1%의 승률을 기록했다. 100위 이하의 선수들은 샘프라스를 상대로 이길 가능성이 거의 없었다고 말할 수 있다. 


샘프라스는 이들에 대해 132승 9패의 기록을을 보였다. 한번 생각해보자. 100위 이하 선수들에게 이기는 것이 당연한 일로 되는 것이 과연 쉬운 일이었을까? 15년 커리어동안 이 선수들에게 9번 밖에 지지 않았다는 것은 주목받기에 부족함이 없다. 이 통계는 명백히 모든 경기에 집중력을 발휘하고 대회나 코트 표면에 상관없이 최선을 다했던 그의  초인적인 능력을 증명해준다. 


1992년부터 2000년 사이에 피트는 100위 이하 선수에게 단  두 번만 패했으며, 7년 동안 단 한번도 패하지 않았다. 커리어를 통털어 피트 샘프라스는 762승 222패를 기록했으며, $43,200,000  이상의 상금을 획득했으며, 14회의 그랜드 슬램 우승을 포함하여 총 64회의 우승을 기록했다. 이는 테니스 역사상 최고이다.  



2008년에 피트는 아마도 1순위로 국제 테니스 명예의 전당 회원으로 뽑히게 될 것이다. 은퇴후 5년이 지나야 입회 자격이 주어지는 명예의 전당 규칙을 감안해 볼 때 그가 테니스의 전설들과 한 자리에 헌액될 수 있는 가장 빠른 시기가 바로 그 때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그가 플레이하는 모습을 보던 것을 그리워하게 될 것이다. 


나는 아직 그가 플레이하고 있었을 때 다른 사람들이 그를 좀 더 평가해주었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진정한 챔피언이 인정받고 칭송받기 까지, 때로는, 시간이 좀 걸리는 법이다. 그의 은퇴 행사는 몹시 감동적이었다. 그가 자신의 아들 크리스티안을 팔에 안고 플러싱 메도우의 센터 코트를 마지막으로 한바퀴 도는 것을 보는 것은 정말 멋진 일이었다.


이제 피트의 가장 큰 열망은 자신의 아들에게 최고의 아빠이자 역할 모델이 되는 것이다. 그의 미래의 모든 일들이 가장 좋게 풀려나가기를 기원한다.      





[서브의 바이오 메카닉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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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mment '6'
  • 바카스정신 11.26 13:56
    꽤나 장문이군요..ㅎㅎ~~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여러가지 일화들이 참 재밌네요..^^
    누가 뭐래도 황제라는 말을 들을만한
    테니스 선수는 당연 샘프라스죠...ㅎㅎㅎ~~
  • 박상현(魔神) 11.26 15:23
    아~ 정말 재미있게 잘 보고 있습니다^^
  • 페더러를꿈꾸며 11.28 10:08
    아~ 피터~

    그의 플레이를 볼수 있었던것 조차 행운이였습니다..
  • 아소당 11.28 15:22
    전 그 당시에 테니스에 입문하기 전이었지만
    남편이 테니스 경기를 봤기에 옆에서 봤지요.
    잘생긴 외모와 변화와 동요를 느낄수 없었던 피트의 표정이 인상적이었답니다.
    테니스가 멋진 운동이었다는것은 아마 그때 이미 느끼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 全 炫 仲 02.25 21:09
    너무 재미있게 잘 읽엇습니다..예전에 읽었던 글 같은데 영 기억이 새롭네요..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스타들의 에피소드는 재미있군요...ㅎㅎ..크레이첵과 루세드키라...
  • 심재명 02.25 22:15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샘프라스는 제가 제일 좋아하고, 저 역시 가장 위대하다고 (앞으로 또 어떤 선수가 나올지 모르지만) 생각하는 선수입니다. 가끔, 그를 깎아내리는 글을 보는 데에는 저도 모르게 화가 납니다. 서브에만 의지했다든가.. 백핸드가 취약했다든가, 등등. 하지만 그런 글을 볼때는 그 사람들이 샘프라스의 경기를 제대로 기억하고나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가령 그의 백핸드를 얘기하는 사람들에게 저는, 아마 좋은 예로서, 샘프라스와 애거시와의 경기를 보라고 얘기하고 싶습니다. 베이스라인프레이어로서 더이상 말이 필요 없는 애거시와 샘프라스간의 백핸드 vs. 백핸드 스트로크가 어떻게 진행되는지를 말입니다...

    위의 그렉 루세드스키와의 일화에 하나 보충을 하자면, 루세드스키가 샘프라스가 네트에 전진하는 속도가 전보다 반스텝이 느려졌다는 말에, 샘프라스는 루세드스키를 이기는데 반스텝 느려도 충분하다고 응수했다고 합니다. 한동안 회자되었던 말이죠..

    참, 그리고 저는 샘프라스가 윔블던을 여섯번 우승한 걸로 기억하고 있었는데, 확인을 한번 해봐야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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