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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 여행 - 카피리음포시에서 루사카까지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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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시간만에 카피리음포시역에 도착했다. 신선한 바람이 제일먼저 인사했다. 기차에서 미쳐 비자를 발급받지 못한 분들은 줄을 서서 먼저 비자신청이 먼저였다.

비자신청비 50불,화장실을 가려고 찾으니 없다.


자물쇠로 굳게 닫혀진 화장실을 찾아 들어가보니 엄청 깔끔하기는 한데 제사를 지내는 제단처럼
높은곳에 설치해 놓고 계단을 올라가야만 볼일을 보게  만들어놓 았다.

가는곳마다 아무튼 화장실이 다채롭기 그지없었다.

아프리카의 교통수단은 대체적으로 미니봉고다. 두대의 봉고로 나눠타고 루사카로 출발했으나 두어 시간이면 도착한다는 루사카는 가도가도 끝이 없었다.

중간에 교통순경에게 걸려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 했다. 봉고에 짐을 너무 많이 실었다는것,일행중 누군가 자신들의 사진을 찍었다는것. 코에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다.

일행들은 모두 봉고에서 내려 폴리스 오피스에 가서 여권을 보여주며 일일히 검문당하고 한분은 직접 왜 사진을 찍었는가 진술서까지 쓰고나서야 해방될 수가 있었다.

정작 사진을 찍은 사람은 따로 있었는데 마침 그 장본인은 천만다행으로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으나 엉뚱한 사람이 봉변을 당했다.

이런 저런 이유로 2박3일 지친 심신은 더욱 더 지치고 세명이 앉아야 할 의자를 네명이 앉도록 개조한 봉고의자가 너무나 불편해서 숨이 막힐 지경이고 온 몸이 뒤틀릴 지경...

그렇게 힘든 상황에도 티없이 맑고 푸른 하늘에 하얀 솜을 뜯어 붙인듯한 흰구름과 지평선 너머까지 푸르른 들판의  나무와 끝없이 펼쳐진 옥수수나무, 하얗게 꽃이 핀 감자꽃등 밖의 풍경이 아름다우니 그나마 위로가 되는 상황.

잠시 화장실을 가기위해 정차를 해서 보니 내 키보다 더 큰 옥수수 밭 사이에 만들어진 미니 화장실 옆에는 옹기종기 어린아이들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우리들의 일거수 일투족을 쫒았다.

오래된 펌프를 그곳에서 보았다.  우리가 품어대면 물이 안솟던 그 펌프에서 현지인이 손대자마자
물이 폭포처럼 쏟아져 내려왔다. 거리엔 나무와 나무사이 빨래줄같은것을 만들어 놓고 고기를 걸어놓고 팔고 있었다.

어디를 가나 옥수수찐것이나 과일등을 파는 아녀자들이 달려들어 금방 우리 주변에는  현지인들이 가득했고 잘 사면 마켓보다 더 훨씬 물건이 싸고 싱싱한것들도 많이 있었다.

일행중 모 사장님은 내릴때마다 아프리카 여인들의 인기를 독점했다. 왜냐면 무엇이든 사다가 일행들을 나눠주느라고 펑펑 돈을 썼으니 인기만점일 수밖에...

영원히 도착하지 않을 것 같은  루사카 숙소 '차차차'에 도착했다. 루사카는 마을의 추장이름에서 유래되었고 유럽에서 온  이주자에 의해서 루사카라는 지명이 붙게 되었다고한다.

게스트하우스 차차차는 상당히 세련된 도외지 풍이었다.

 

가운데 수영장까지 갖춰져 있었고 입구엔 술과 음식을 파는 레스토랑이  있었지만 가격이 비싸서 우리같은 배낭 여행객들이 이용하기엔 너무 부르조아틱하다.

우루루시내 중앙마켓을 구경하기 위해 짐을 놓자마자 걷기 시작했다. 거리엔 도외지풍의 세련되고 아름다운 여성들의 의상부터 헤어스타일까지 모두가 여직 보아온 아프리카식이 아니었다.

큰 거리의 울창한 나무들부터 쉴사이 없이 오가는 자동차의 행렬속에서는 더이상 박달나무를 들고 다니는 마사이족 같은 부족을 연상할 수가 없었다.

우리일행은 일단 보면 실망할 것이라는 박물관을 제쳐두고 중앙마켓까지 씩씩하게 행진을 했다.

엘지라는 우리나라 상표가걸린것만 보아도 기분 좋았고 특히 재잠비아 한인회 사무소라는 글자를 보았을때는  아무볼일도 없으면서 반가운 마음 하나도 불쑥 문을 열고 들어갔다.

조국을 떠나 머나먼 타지에서 한국인들이 정착하여 뿌리내리고 산다는것을 생각하면 가슴이 뜨거워진다

얼마나걸었을까?

중앙 마켓 가까이 다가가자 수많은 남자들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우리를 주시하기 시작했고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말대로 거의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며 기어코 센트럴마켓을 찾기는 했으나..

마켓 사이사이엔 각자 개성있는 음악들을 대단히 커다란 볼륨으로 틀어 놓아 온통 마켓은 소음덩어리였다. 협소한 상점들 가운데를 통과하는데 식은땀이 흐를만큼 긴장시키는 눈빛들 휘파람소리들...

겨우 끝까지 가서보니 거리엔 잡다한 야채와 과일들을 파는 사람들과 당구를 치는 젊은이들이 일시에 우리들에게 시선을 집중하고 금방 우리들을 둥그렇게 둘러싸 두려움에 떨며 되돌아 와야 했다.

눈빛이 몹시 거칠었다.

서둘러 아무것도 사지 못하고  이마트같은 큰 쇼핑몰에 갔다. 그동안 지나왔던 탄자니아에서는 상상도  할 수없는 풍경이었다. 흑인들이 카터를 끌고 유유히 쇼핑하는 모습은 조금전 거리에서 만난 부랑자같은 사람들과는 확연히 틀렸다. 세련된 여성들이 많았다. 

진열대에는 엄청나게 많은 물건이 쌓여있 었다. 우리는 쌀중에서 가장 비싼 일본의 스시쌀을 샀다.
일킬로에 우리돈 1만5천원정도. 그곳에서는 물건을 사면 반드시 영수증을 들고 나와야 
입구에서 지키는 경찰이 물품과 영수증을 대조하고서 밖으로 내 보내준다.

나는 그곳에서 어린아이 사진을 찍는다고 친구한테 된통 한방을 맞았다. 무지막지하게 성질을 내고 있었다. 아프리카 사람들은 아무나 카메라를 들이대면  화를 당한다는거다. 나는 그 아기의 엄마에게 이미 허락을 얻어낸 상태였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모르는 친구가  기기막혀서 말이 안나와 눈을 꼭 감고 입을 다물었다.
 

다른 일행들이 있어서 차마  내 성질을 다 피울수가 없었지만 갈수록 예민한 친구에 대해 언젠가
일침을 놓겠다는 생각을 했다.

숙소로 돌아오자 좋지않은 소식이 기다리고 있었다. 일행중 젊은이들중 하나가 교통사고가 나서 병원에 입원했다는 소식이다

가해자는 현지 병원의 닥터로 사고가 나자마자 일행들은 그자리에서 자동차넘버 사진을 찍고 운전자 사진을 찍어 꼼짝도 못하게 한 다음 경찰을 불러온 다음 병원으로 옮겨졌다한다.

그야말로 똑똑한 한국인이다.

 

외국에서 특히 후진국에서 사고가 나면 무조건 제나라 편을 들어 치료비도 받기가 힘들다는것이 일행들의 반응이다.

병문안을 다녀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어마어마하게 큰 병원, 병원안의 응급실만 찾는데 거의 이십여분 이상을 걸어야 할 정도라 하니 나의 상상력으로는 잘 그림이 안그려졌다. 이 후진 아프리카에도 그렇게 의료시설을  잘 해놓았다는것이 믿어지지가 않았다.

불행중 다행으로 그녀는 바로 퇴원을 했고 우리들은 열명이서 한 방을 쓰는 도미토리에서 잠시잠깐 눈을 붙였다.

삶은 선택의 연속이다. 인간은 자신의 의지에 따라 선택을 하게되고  그 선택에 대한 책임을 지게 된다. 엘리자베스 퀴블로 로스 박사는 그의 자서전 '생의 수레바퀴'에서  “신이 우리에게 준 가장 큰 선물은 자유의지“라고 말한다. 

 

그 자유의지에 따라 인간들은 자기의 삶을 만들어 간다. 

 

http://www.parangse.kr/   송선순






아프리카 여행 - 루사카서 리빙스턴으로

감기 기운으로 일찍 잠자리에 든 탓인지 새벽 네시에 눈을 떴다
 

잠비아는 그동안 머물던 탄자니아보다 한시간 더 늦어 우리나라보다 일곱시간이 늦는 편이다.

잠비아의 수도이며 남쪽 지방의 역사적인 식민도시 루사카에서 첫 밤을 보냈다.도미토리 차차차는 깔끔하고 뜨거운 물이 콸콜 잘 쏟아져 만족스러웠다.

 

설사 8인실이라 해도 불과 물이 풍부하면 이젠 그야말로 퍼펙트한 만족이라는것을 깨닫게 되었다
잔지바르와 능기비치의 전력난으로 시간제로 불이 켜졌던때를 생각하면 황송하기 그지없다.

 

물도 졸졸 나오다 말고 머리감으려면 비누칠해 놓고서 한삼분 이상  기다리다가 또다시 조금 나오면 마무리하기까지 열번은 기다려야 할 상황이었으니..어찌 감지덕지 하지 않을까..

루사카는 1930년대 까지만 해도 그저 농사나 짓는 촌락이었다.  1931년 리빙스톤에서 이 곳으로 수도를 옮긴 후 북 로디지아의 수도가 되었으며,  1964년 독립을 하면서 잠비아의 수도가 되었다 잠비아는 세계적인 구리의 생산국이다.

영국의 지배를 받아 현지인들은 채굴 노동자로 일했을 뿐이다.  게다가 독립 후 독재정치와 부정부패로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중 하나가 되었다

 

잠비아는 주민의 80%가 하루 1달러 미만으로 살아가는 세계에서 가난한 나라 중 한 나라다. 

수도인 루사카는 잠비아 최대의 도시이지만 역사가 오래되지 않고 볼 거리도 그다지 많지 않다.  그러나 많은 여행자들이 이 곳에 들르는 이유는 빅토리아 폭포가 있는  국경도시 리빙스톤으로 가기 위해서 중간 기착점이기 때문이다. 

루사카도 케냐의 나이로비처럼 고도 1300m에 자리 잡은 고원도시이기 때문에 선선하다.  도시 이름은 마을의 추장이었던 루사카에 유래되었고 시내 동쪽으로 자리잡은 신시가지는 미국에 온 듯한 느낌이 들 정도다.

별이 총총이 뜬 루사카의 새벽은 고요하고 맑은 바람이 기분좋게 했다.  공동으로 사용하는 화장실과 샤워실 키친등은 저녁내내 환하게 불을  켜 놓는지 전혀 무섭지 않았다.

 

이쪽 사람들도 흑인들을 두려워하는지 철처히 입구를 지키고 하루종일 문을 봉쇄해 놓고 있었다.

점심 도시락 쌀주먹밥 재료를 준비해 놓고 컴에 자료를 흟어보니 여행 칠일째 팔일째 썼던 모시서 다르에스살람으로 가는 길과 다르에스살람에서 잔지바르에서 보낸 첫밤의 여행기가 빠져 있음을 그때서야 깨닫게 되었다.

작업하다 불이 나가 완전히 확인을 다시 하지 못하고 유에스비를  김양재씨편에 보낸것이 문제였다.

큰일이었다. 능기비치것만 기사를 보내고 그 이전것이 없으니 어떻게 할 도리가 없어 편집장께 문자를 여러번 보내 다음달에 기사를 올리는것으로 마무리했다.

 

마음이 불편했다. 그냥 전기불탓만 할것이 아니고 조금 더 완벽하게 꾸렸어야 했는데...

동이트자 한사람 두사람 주방으로 몰려 들었다. 루사카로 7시간동안 버스를 타야 한다니 주먹밥을 만들고 일행들이 가져온 라면으로  현지에서 사온 라이스를 넣어 짬밥을 만들어 드렸더니 굉장히 만족한 아침이었다는 칭찬을 들었다.

상당히 세련된 도외지 풍의 루사카를 돌아보고  역사적인 콜로니얼 도시, 로디지아(잠비아의 옛 이름)의 수도였던 리빙스톤으로 다시 떠날 준비를 했다. 끊임없이 떠나는 것에 길들여진 우리들의 가슴속에는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동경으로 가득했다.

아프리카 곳곳을 달리다 보면 이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자주 느낀다. 그만큼 광활하고 드넓다. 
순도 높은 청량감이 어떤 것인지를 확실히 깨닫게 하는 하늘을 보며 아프리카의 하늘을 꼭 한국으로 가지고 가고 싶을 만큼 유혹하고 있었다.

루사카인터시티 버스터미널은 인산인해 그야말로 국제적인 버스행렬탓인지  다양한 사람들이 즐비했고 대도시답게 여성들의 헤어스타일이 멋졌다.

단순히 머리를 땋는 사람만 있는것이 아니라 파마머리와 생머리 멋장이들이 많았다.

아홉시반 리빙스톤행 국제버스에 짐을 싣고 버스에 올라탔으나 언제 왔는지 미리 타고 있던 수많은 현지인들이 좋은 자리를 다 차지하여 우리는 맨 뒷쪽 자리에 줄줄이 앉에 되었다.

7만콰차 우리나라 돈으로 2만원정도 되는 돈이다 .버스는 생각보다 편안했으나 타자마자 어느 선교사인지 목사인지 한동안 영어로 설교를 하고 기도를 하고 아멘할렐루야를 외치며 내려갔다.

의자가 안락해서 독서를 해 보려고 책을 폈으나 뜻하지 않은 복병으로 일곱시간 내내 골머리를 앓아야했다. 머리위에 달린 브라운관에서 시스터엑트에 나오는 합창단들이 춤과 노래를 하는데 주로 성경을 리메이크한곧들이었는데 어찌나 큰 볼륨으로 우리 귀를 괴롭히는지 환장하게 만들었다.

볼륨을 낮춰 달라는 요청을 해도 들은척도 안하고 창가엔 커튼도 없이 강렬한 아프리카 태양과 찢어질듯 귀를 괴롭히는 노래소리를 들으며 일곱시간을 달렸으니 상상해 보라.

비행기 안에서 준 귀마개와 휴지를 틀어막아도 그 소음으로 부터 완전히 해방될 수가 없었던 순간이다.

중간 휴게실에서 또한 잊지못할 해프닝이 있었다. 화장실을 가려면 1000콰차(우리돈 300원) 정도를 내야 한다해서  마침 친구에게 1000콰차를 달라해서 주고 들어가 볼일을 보고 나오니 내 손에 두툼한 지폐를 열장정도 쥐어주는것이었다.

의아해서 그 잔돈을 받아들고 친구에게 내미니 친구가 깔깔거리며 자기는 천콰차라고 생각하고 주었는데 아무래도 만콰차짜리를 준 모양이라며 낄낄거렸다.

그렇다면 화장실 한번 사용하는데 5천콰차를 낸것이다. 우리나라 돈 1500원. 어쩐지 화장실이 깔끔하더라 했더니 완전 바가지를 쓰고 말았다.

겨우겨우  일곱시간을 견디다 리빙스톤에 도착했다.

현지시간 오후 5시를 넘기고 있었다. 오자마자 들르려고 마음먹었던  리빙스턴 박물관은 이미 클로즈. 할수없이 다음날 아침 8시에 오픈한다고 하니 갈 수 밖에 없었다.

우리 리빙스톤의 숙소


졸리보이스
 

Jollysboys-졸리스는 프랑스어로 즐겁다는 뜻

기나긴 버스 여행의 피로를 한 방에 날릴 수 있는 평화로운 정취가 한눈에 들어왔다. 유유히 수영하고 있는 젊은 외국인들과 인도풍으로 꾸며놓은 리셉션장 너무나 마음이 놓였다.

 

우리일행 31명이 들어갈 방을 배정했다 우리여자들은 무려 16명이 쓰는 도미토리가 배정되었지만 그래도 행복했다.

서둘러 기차안에서 부터 입었던 옷을 빨아 널어놓고 수영장앞에서 글을 쓰는 나는 모처럼 여유롭고 행복한 웃음을  웃을 수 있었다.

여행이란 이런것이 아닐까.. 목이 아파서 맥주는 못마시지만 그래도 이아름다운 정원의 숙소에서
좋은 분들과 어울려 함께 식사를 할 수 있다는것 옆에 초은이 언니가 저녁을 준비하고 유선생은 열심히 서빙을 하고 있다.

아프리카에서 머물렀던 백펙커스중 가장 낭만적인 숙소였다. 졸리보이엔 수없이 많은 망고나무가 있었는데 한바퀴 그 나무밑을 돌고나면 한소쿠리씩 망고를 주어올 수 있어 질리도록 망고로 실컷 배를 채웠다.

*
리빙스턴여행까지 뒤돌아 보면 이번 아프리카 여행의 장점과 단점을 적어보자.

 

여행사-인도로 가는길

한달 아프리카 여행치고는 경비가 싸다는것,600만원. 싼 이유를 절실히 깨달았다.

다에르 살람서 기차를 타고 카피리 음포시역에 내리기까지 총 43시간. 그곳에서 다시 루카스까지 세시간 이상을 버스로 달렸고 다음날 루카스서 리빙스톤까지 일곱시간 이상을 달렸다.

그렇다면 빅토리아 폭포를 보기 위해 우리가 거리에서 보낸 시간을 총 합산해 보면 5박6일정도가 된다


다르에스 살람서 바로 리빙스톤까지 오는 버스나 비행기는 없었는가?

다르에스 살람서 카피리음포시까지 기차로는 43시간이지만 버스로는 24시간이면 되었다는데 버스를 선택했다면 시간 절약을 할 수 있었지 않았을까?

 

몹시 지루하고 불편한 미니봉고를 오래 타는것은 그야말로 지옥이다.

 

http://www.parangse.kr/ 송선순






아프리카 여행 - 응고롱고로 분화구에 가다.





사파리 마지막 밤 


해발 2천2백고지의 심바 캠프장은 무진장 추웠다
 

대부분 저녁 내내 추위에 떨다 일어나 꼭두새벽부터 뜨거운 차에 몸을 녹였다.

수백 년 된 무화과나무를 중심으로 쳐진 텐트들은 동이 트자 하나씩 윤곽을 나타냈다. 무화과나무는 아프리카 인들이 대단히 신성시 하는 나무라고 했다.

아침 아홉시에 문을 여는 응고롱고로 분화구 안으로 들어가는 날이라서 분주했다.  심바 캠프장에는 세계 각지에서 온 사파리 차량들이 벌떼처럼 모여 천장의 뚜껑을 열고 사파리를 떠날 짐을 꾸리고 있었다.

응고롱고로는 현지의 말로 '거대한 구멍'을 의미한다.
 

수백만 년 전 이곳의 화산이 폭발할 때 용암은 흘러내리고, 화산재는 세렝게티를 덮었다. 용암이 빠져나간 산의 윗부분은 그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내려앉고 말았다. 내려앉은 타원형의 분화구는 동서 19㎞, 남북 16㎞나 된다. 분화구 속을 사파리 하는 데도 3~4시간 걸린다. 참으로 넓다. 분화구의 바닥은 해발 1700m이고, 분화구를 감싸고 있는 화구의 높이는 2200~2300m나 된다.

응고롱고로 분화구는 동서로 19km, 남북으로 16㎞인 거대한 구역에 자리 잡은 동물의 요람으로 떠나기 전부터 설레기 시작했다.

입구에는 벌써부터 마사이족들이 직접 만든 목걸이를 팔기위해 벌떼처럼 몰려들었고 아침안개가 걷히지 않은 분화구를 내려다보며 서서히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산비탈을 따라 600m 깊이의 분화구로 들어가는 길은 급경사라 스릴이 있다. 동물들은 인근 세링게티 초원에서 병풍같이 둘러쳐진 능을 수시로 넘나든다고 했다.

분화구에 내려가니 그곳은 천국이었다. 그곳은 아프리카라고 하기엔 적절하지 않는 곳이었다.

특별한 신의 은총을 받은 자 만이 살 수 있을 것 같은 별천지. 끝없는 초록의 평원에 유유히 풀을 뜯고 있는 동물들의 모습은 적자생존이라는 엄청난 단어조차도 그곳에서는 잊어버려도 되는 낙원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맑은 하늘에 동동 떠 있는 구름. 초록의 향연, 각양각색의 동물들이 한가로이 노니는 그 곳은 하얀 먼지를 일으키며 달려오는 랜드로바의  시동소리 조차도 음악으로 들리는지 자동차가 옆에 와도 어느 동물하나 움직이며 도망가지 않고  여유 있게 풀을 뜯고 있었다.

왜 사파리가 아프리카 여행의 진수인지를 깨닫게 하는 순간이었다.

이렇게 응고롱고로의 동물들처럼 자신을 자유롭게 놓아주어야한다. 놓아줌은 자신과 마음속에 자라고 있는 대상에  대한 사랑을 의미한다.  놓아준다는 것은 기다리는 은총이 올 수 있도록 자신과 인생에  자유를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종일 세링게티 공원을 덜덜거리는 차를 타고 헤매며'빅5'를 보기위해 바삐 움직였으나 그곳에서는 다들 여유롭게 날 보아 달라는 듯  사자, 코끼리, 코뿔소, 버펄로 등이 유유자적 머물고 있었다.(빅5- 표범  사자, 코끼리, 코뿔소, 버펄로로  크기도 하고 사냥이 어렵고 값나가는 동물이라 붙여진 별명)  

아프리카 여행의 진수를 다 맛본 것과 같다고 말하던 일행 한분은 남은 기간은 그야말로 덤이라고 덧붙였다. 그만큼 응고롱고로가 주는 의미는 컸다.

그런데 홍학은 어디 있는 것일까?
 

영화 '아웃 어브 아프리카'에서 카렌과 데니스가 경비행기를 타고  하늘을 오를 때 그 뒤를 따르던 수많은 홍학들이 저기 저 먼 먼 호수에서 물을 먹고 있었다. 우리들을 위해 한번쯤 날라주면 더욱 더 판타스틱 했을 터인데 그들은 호수위에서 유유히 자신의 삶을 관조하며 즐기고 있었다.

내가 카렌이 아니듯 그들 또한 영화 속의 홍학이 아니려니....

글쓴이 송선순         http://www.parangs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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