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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를 꿈꾸다.






고민을 했다.


친구가 겨울방학을 맞으면 어디론가 떠나고 싶었고 의미있고 값진 여행을 하고 싶었다. 마치 치유불가능한 병을 앓는 여자처럼 떠나지 않으면 안된다는 어떤 강박관념을 가지고 사는것은 아닌지 스스로 뒤돌아 보지만 답변은 역시 떠나는것만이 최선이라는것.

다양한 삶과 다양한 문화를 접하고 사는것이 가장 지금 내가 처한 상황에서는 값진일이라는것을 깨닫는데는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가 않다.

꼭 무엇을 얻어오겠다는 확실한 목표가 있어서가 아니다. 주어진 시간이 많지 않을것 같다는 이상한 예감이 들어서도 아니다. 때를 놓치고 싶지 않아서다. 휙휙 잘 걷고 잘 먹고 잘 싸돌아 다닐 열정과 에너지가 있을때 조금 더 다양한 세상을 가슴에 담아보고 싶은 생각에서다.

여행의 종류도 다양하니 이다음 여건이 호전되면 더 훨씬 부르조아틱한 여행도 할 수 있을것이라는 생각을 가진다는 것 조차도 내겐 엄청난 사치다. 그런일은 로또에 일등으로 당첨이 되어 돈벼락을 맞는 일이 생기기 이전엔 상상도 할수없는 일..

죽을듯 고생을 할지라도 지금 건강할 때 배낭여행을 갈거다. 남미든 유럽이든 닥치는대로 굶주린 사자처럼 정신없이 떠돌아다니고 싶다. 빛깔있는 욕망을 잠 재울수가 없다.

맨처음 남아프리카와 이집트를 한달 계획했다가 수포로 돌릴수 밖에 없었다. 여자둘이서 배낭을 메고 남아프리카  수도 요하네스버그에 내리는 순간부터 봇짐과 목숨을 반이상 흑인들에게 내 놓은거나 마찬가지라는 엄포성 발언때문. 치안의 문제는 노력하고 조심한다고 해결 될 문제가 아니니 고민하지 않을수가 없었다.

과연 안전의 문제를 도외시하면서 강행할 수 있을지  도저히 자신이 서지 않았다.

no를 거꾸로 쓰면 전진을 의미하는 on이 된다

 

모든 문제에는 반드시 문제를 푸는 열쇠가 있다 끊임없이 생각하고 찾아내어라. 노먼빈센트필의 말대로 no를 거듭거듭 써가다보니 풀수있는 해결의 실마리를 찾았다.

원시의 아프리카 7개국을 다 돌면서 안전하게 여행할수있는 방법. 역시 여행을 많이 한 친구가 여기저기를 수소문해서 알아왔다. 10~20여명이 함께 떠나는 배낭여행을 겸한 호텔팩.

일단 일정을 직접 짜지 않아도 된다는것에서 머리가 가벼워졌다. 단체로 움직이면 아무래도 강도들의 접근도 용이하지 않고 영어도 좀체로 통하지 않는곳이라서 가이드 한사람이 함께 상주한다니 그것또한 금상첨화다.

인류의 기원, 끝없이 펼쳐진 야생의 대 서사시 사바나에 펼쳐진 푸른 초원에서부터 킬리만자로를 넘어 아프카 최남단 희망봉까지 이르는 대 장정! 아프리카 오버랜드 여행의 결정판이라고 하는 아프리카 7개국 핵심 일주 30일.

그야말로  가슴이 두근거려 애인 만나러 가는 심정과 똑 같다. 하지만 아직도 처리해야 할 숙제들이 많이 있다. 그 숙제는 차근차근 아프리카를 공부하면서 생각해 보기로 한다.

일단..떠나는것으로 결론은 내려졌고 이제 서서히 준비하는 과정과 풀어야 할 숙제만 남은 상태다.
마음은 이미 푸른 초원을 달리고 있다.

케냐
탄자니아
잠비아
짐바브웨
보츠와나
나미비아
남아공

시간을 낼 때는  가장 순도 높은 시간을 자신에게 줄 수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자신이야말로 가장 소중한 존재이기 때문에 먼저 자신에게 가장 좋은 시간을 투자할  수 있어야 한다.

 

자신의 라이프 사이클에 가장 잘 맞는 시간대에  자신을 훈련하라. “춤쟁이는 매일 춤 춰야하고, 환쟁이는 매일 그려야 하고, 글쟁이는 매일 써야 한다. 검객이 매일 수련하지 않으면 목숨이 위태롭듯 매일 수련해야 한다.”

나는 그 중 어디에 해당하는가?

 

글쓴이 송선순 http://www.parangs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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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기비치에서의 이틀





글쓴이 송선순     http://www.parangse.kr/

잔지바르의 첫 밤.저녁내내 폭우가 쏟아졌다.
양철로 지붕을 만든 탓인지 맨 꼭대기기층인 우리 침실은
가슴으로 우박이 떨어지는 듯 했다.
습한 기온과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몹시 힘든 밤을 보내다
호텔서 제공하는 아침식사를 마치고 바닷가로 이동했다.

이 아프리카의 아침 식사는 아주 간단하다.
빵 두 쪽에 주스한잔 그리고 계란하나에 파인에플 한 조각이면
끝이니 저절로 다이어트 될 판이다.

스톤타운옆을 지나오다 과일시장에 나오는
두리안의 고소한 냄새의 유혹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토마토와 오이등 우리나라 과일들과 비슷하지만
열대과일들이 산처럼 쌓여진 시장에서 이것저것 고르는 재미가 쏠쏠했다.

가장 잘 익은 두리안을 사서 나눠먹을 생각을 하니
미리부터 입안에 침이 고였다.

잔지바르의 해변은 동, 서, 남, 북으로 나뉘는데 대표적인 비치는
북부에 있는  능기(Nungwi Beach)로 유럽인들의 한가로운
해변휴양지 같은 느낌을 주며  
동부에 있는 파제(Paje Beach)비치는 한적하고 일출을 볼 수 있어 좋다

우리 일행은 두 대의 봉고차에 나눠 타고 한 시간여 달려 썬셋 크루즈로 유명한
능기비치의 사피나 호텔에 숙소를 잡았다. 이곳에서 이틀을 보내게 될 예정이다.
전통적인 가옥으로 만든 단층짜리 숙소가 열대나무들과 어우러져
휴양지다운 맛을 풍기며 몹시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잔지바르보다는 목욕물도 잘 나오고 시설이 좋아 들뜬 것도 잠시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밤 일곱 시까지는 기다려야만
자가 발전기를 돌려 전원을 켤 수 있다는 말에
모두들 그 시간이 오기만을 기다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짐을 숙소에 던져 놓고 우르르 달려간 능기비치는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답고 고운 밀가루처럼 하얀 모래사장이 이어져 있었다.





먼저 도착한 유럽인들이 진을 치고 있는 해변 곳곳에는
현지인들이 만든 목걸이와 그림들을 전시해서 팔고
가끔 마사이족 복장으로 춤을 추는 공연도 벌어지고 있었다.

물속으로 깊이 들어간 일행이 성게에 찔려 피가 나자 현지인의 급 처방은
휘발유를 상처부위에 먼저 뿌린 다음 파파야 즙을 짜서 그곳에
발라 주었고 거짓말처럼 씻은 듯이 통증이 사라지는 효과를 보게 되었다.

일몰이 유명한 만큼 오후 네 시에 출발한다는 썬셋크루즈를 기다리다
갑자기 엄청 심한 바람과 함께 쏟아 붓는 스콜성 비로
모든 일정은 취소 될 수밖에 없었다.

아프리카에서 내리는 비는 언제나 강하게 그러나 매번 짧게 내린다.
비가 그 친후의 바다는 더욱 더 고요하게 밤을 맞고 있었다.

해변에 지어진 고급스런 호텔들이 즐비하지만
우리처럼 평범한 배낭 여행객들이 머물기엔 너무나 고액이다.
하룻밤 2천이나 3천 실링정도 하고
우리들이 머문 사피나 호텔은 방 한 칸에 우리 돈 7만 원 정도 하는 값이었다.

밤 일곱 시에 전기가 들어와 열두시면 호텔 전체가 전원이 꺼지기 때문에
새벽에 일어나 책을 보거나 하는 일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아무래도 전력난이 심각해 자체 발전기를 가동시키고
또한 전력낭비를 막기 위해 최선의 방책이라 해도  몹시 불편한 것은 사실이었다.

21세기를 살면서  손전등에 의지해야 한다는 사실이 서글펐으나
우리 숙소 옆의 고급 호텔은 밤 내내 휘황한 불빛이 비치고 있었다.
노트북 충전을 위해 호텔입구의 경비원에게 여러 번 헬프미 플리이즈를
했지만 번번이 거절당해 더욱 더 애타게 만들었던 곳이다.

이곳 잔지바르는 인도의 영향을 받아 호텔마다 인도식 헤나를 많이 권하고
마사지도 권하지만 질적으로 너무나 형편없다는 사실은 받아본 사람들이 모두 다 고개를 저었다.

밤이면 현지인이 운영하는 술집에 가서 보면 젊은이들은 주로
당구를 즐기고 작은 티브이 앞에 모여 축구경기를 보면서 열광하는 모습이
대단한 축구광들인 듯하다.

능기비치 옆 현지인 마을은 수영복을 입은 사람은 출입금지라는 표시가 있어
상당히 보수적인 부분도 있고 사진을 찍기 위해 카메라를 대면
여전히 심한 거부반응을 보낸다.

능기비치에서 만난 유럽 사람들은 에메랄드빛 바다에 떠 있는
다우’(dhow·바람의 힘으로만 움직이는 배)와 해풍에 몸을 맡기며
인생의 여유를 즐기는 사람들이었다.

아무리 전기불이 들어오지 않아 불편하다 해도
22세기에 다시 찾고 싶을 만큼
평화롭고 하얀 밀가루처럼 고운 모래의 감촉을 잊을 수가 없는  낭만적인 곳이다.









8일째 인도양의 흑진주 잔지바르를 향하다.





글쓴이 송선순      http://www.parangse.kr/

집 떠나온지 벌써 일주일이 지났다.

고온 다습한 다르에스살람. 다르에스 살람은 탄자니아의 수도로
까마귀 떼들이 떼 지어 노래하는 통에 새벽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해변, 인도양에 근접해 있음을 알리는 첫 신호였다.

아프리카에 도착하는 순간부터 여직 해발 2천고지 이상의
고지대에 머물다 처음으로 평지에 머문 탓인지 몹시 덥고 습한 기온이다

잔지바르로 떠나기 전 아침 일찍 다르에스살람의 시내를 돌아보기로 하고 길을 나섰다.
페리 선착장을 거쳐 피쉬마켓까지 가는 길은
도심의 번화가답게, 탄자니아의 수도답게 잘 정돈된 길과 정장을 입은 신사숙녀들이 많이 오갔다.

처음으로 본 인도양은 생각보다 맑았다.
해변 가까운 곳에서도 비취빛이 보이는 것이 아직도 오염이 되지 않은
청정해변임을 나타내는듯하여 경이로웠다. 해변엔 많은 사람들이 인도양의 바닷바람에
휴식을 취하고 있었고 가판에서 신문을 사서 읽는 사람들이 많았다
탄자니아는 아프리카의 다른 나라와는 달리 스와힐리어를 공용어로 사용한 탓에
신문을 많이 읽는다던 그 말을 실감하게 했다.

피시마켓은 바닷가에서 막 잡은 생선들을 잡아 올리는 바닷가 현장에 있었고
많은 사람들이 싼 경매를 하기 위해 한꺼번에 몰려들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생동감이 넘치는 그 자리엔 음식을 만드는 여자들은
하나같이 머리에 하얀 모자를 쓰고 있어 위생적인 모습을 보였지만
선뜻 음식을 사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음주주'라고 부르는 바나나 숯불구이나 튀김등도 우갈리와 함께 요리하고 있었다.

산통은 그때 터졌다. 거리에서 팔고 있는 거대한 문어를 삶아 슬라이스 된 조각 문어를
사기위해 우리일행은 그 문어 맛에 집중하고 있었고 그 틈을 타 쥐도 새도 모르게
어떤 언니의 카메라를 강탈당해 굉장히 우울하게 만들었다.

호텔로 다시 걸어가겠다는 생각을 접고 택시를 잡아타고 돌아와 짐을 꾸려
잔지바르행 시버스(페리호)를 타기 위해 항구로 출발했다.

페리호를 기다리며 줄을 선 긴 행렬에는 다양한 국적을 가진 사람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서양의 노란머리부터 인도인들, 이슬람들, 흑인 백인 황인종 할 것 없이
인종 백화점이라고 하면 맞을까?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모여  휴양 도시인 잔지바르행을 기다렸다.
우리는 그곳에서 4박5일을 머물 예정이다. 배 삯은 미국달러로 25달러였다.


약 세 시간을 달렸을까? 드디어 도착한 잔지바르는
강렬한 태양에 온 몸이 타들어 갈 듯 한 뜨거운 날씨에 포터들이
서로 짐을 들어주겠다고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고
인도양의 바다에는 예전 페르시아 상인들이 탔다던 다우선이 지나가고 있었다.

에메랄드빛 바다 속의 치어들이 페리호 근처로 달려드는 모습이 환하게 보일만큼 투명하게 맑았다.



검은 해안, 잔지바르

잔지바르는 인도양의 흑진주로 불리는 아름다운 산호섬이다.  향신료의 고장인 이곳은
1천년 이상 아프리카인과 아랍인,인도인들이 함께 살아온, 다문화가 공존하는 섬이다.

잔지바르(Zanzibar)라는 이름은
페르시아어로 잔지(Zanzi:흑인)와 바르(Bar:사주해안)의 복합어로 '검은 해안'을 의미한다.
이 이름이 붙여진 것은 계절풍을 따라 교역을 하러 온 페르시아 상인들에 의해서이다.
그들은 다우라 불리는 범선을 타고 12월쯤 잔지바르로 왔다가 6월쯤 역풍을 이용해 돌아가곤 했다.
이 섬에 처음 도착한 그들은  백옥같이 하얀 백사장에 흑인들이 살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잔지바르’란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선착장에는 출입국 관리소가 있어 많은 사람들이 붐볐다.
잔지바르에 가려면 탄자니아의 비자가 있어도 다시 입국심사를 받아야 한다.
여권까지 준비하여. 국경에서 심사받듯 다시 한 번 입국수속이 필요한 까닭은
잔지바르가 오랫동안 탄자니아의 섬이 아닌 독립국으로 지냈던 역사 때문이다.
비록 1964년 본토의 탕가니카와 잔지바르가 합쳐서
탄자니아 되었지만 오늘 날까지 잔지바르의 독립 요구는 계속 되고 있다한다.

한참을 출입국 심사를 받느라 지체하고 있는 동안
뜨거운 열기에 온 몸에서는 비가 쏟아지듯 땀이 흘러 내렸다.
그 많은 사람들이 통행하는 페리호의 선착장 입구가 좁아서
사람과 자동차, 리어카들이 섞여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우리 일행들은 개조된 리어카 두 대를 불러 짐을 싣고 숙소로 긴 행렬을 시작.
드디어 스톤타운의 카리브 인이라는 예약된 숙소를 찾기 시작했다.

스톤타운은 아랍인들의 석조 가옥 촌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문과 발코니가 있는
고층의 집들이 빽빽하게 미로를 이루고 있어 자칫하면 길을 잃기 쉬운 곳이라고 한다.  

잔지바르의 특성은 각 집안의 대문이 부의 상징이라더니 걸어 보면서 보니
문마다 화려한 조각을 하거나 스파이크를 박아 장식했고
조각 또한 다양했다.
꽃이나 나뭇잎을 조각한 것은 부에 대한 소망을, 물고기는 다산을  나타낸 것이라고 했다.
또한 문의 크기와 사용하는 나무 재질로 사회적, 경제적 지위를 나타내고
문에 붙어 있는 놋쇠로 된 스파이크는 인도 건축양식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인도에서는 코끼리가 집에 와서 부딪히는 경우가 있어 그것을 방지하기 위해
문에 놋쇠로 뾰족하게 생긴 스파이크를 박아 비록 잔지바르에 코끼리는 없지만 그 영향을 받아 만들어진 것이다.

잔지바르에 사는 사람의 대부분은 이슬람교도로 거리의 공원에도 모스크 가 있었다.  
공원에서 한가로이 휴식을 취하는 사람들이 자연의 일부처럼 보였고
이처럼 평화로운 곳이 잔혹하기 그지없는 노예시장의 거점이었다니
씁쓸한 역사의 흔적들을 어떻게 지울 수가 있을까?

인도양의 바람은 아픈 역사를  상쇄시키기라도 하듯 상큼하게 불어댔다.

카리브 인으로 숙소를 정했으나 불행하게도 전기불이 들어오지 않았다.
오후 일곱 시를 넘어야 자체 발전기를 가동하여 불을 켤 수가 있다는 통보다.

어두컴컴한 노예감옥을 연상하게 하는 그 숙소는
관광지의 특수를 노리는 바가지 값인지 일인당 2만원.
다닥다닥 번호가 붙은 방 한 칸에 4만 원 정도를 주고 자야하다니
우리나라의 새로 지어진 고급 모텔들의 가격들과 맞먹는 고가였지만
가격대비 시설은 천양지차였다.

천장에 달린 커다란 선풍기와 누렇게 퇴색된 모기장은 그 자체의
냄세 만으로도 역겨워 여행이란 누군가가 머물다 간 낡은 벽지 앞에서
옷을 벗는다던 표현이 절로 생각나게 만들었다. 나도 한때
그 낡은 모기장을 쓰다 떠나는 여행객의 한 사람일뿐이다.

배낭여행이란 조건을 탓 할 여유가 주어지지 않는 것이다.
주어진 여건에 최선을 다해 적응하는 것만이 최후까지 가장 잘
즐길 수 있는 방법임을 이미 터득한지 오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그 방에 머물 이유가 없는 우리들은 그대로
밖으로 뛰쳐나와 해변을 걸었다.

한없이 드넓은 바다는 세상의 모든 시름을 다 잊게 해 주었다.
고운 모래사장을 걷다보니 여행의 피로, 수개월째 나를 붙잡고 있는 생각의 울타리조차도
어쩔 수 없는 운명적인 일로 받아들여졌다.

기분 좋은 바람이 불고 있는 해변에는 다국적 사람들이 모여 석양을 즐기고 있었다.
각자 자기의 분수에 맞는 장소에서.

우리 일행은 모래사장을 걷다 전망 좋은 곳을 선택해 자리를 잡았다.
분위기가 부르조아틱 한 만큼 가격이 만만치 않았지만 모처럼 서울에서  삼겹살 먹는 값을
지불 할 생각으로 스파게티와 킬리만자로 맥주를 시켜 잔지바르의 첫 밤을 맞았다.

모래사장에서 뛰놀고 있는 수많은 아프리카인들의 활달한 모습을 볼 때마다
아직도 이질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내가
오랫동안  잘못된 편견에 길들여져 있음을 다시 한 번 깨달았던 순간이다.

잔지바르에 대한 팁

스톤타운의 복잡한 골목 못지않게 잔지바르의 역사는 복잡하고
그 사연도 절절하다.
1499년 바스코 다 가마의 발길이 닿은 후 포르투갈의 지배를 받았고,
1832년부터 150년 동안은 아랍 해상왕국 오만의 술탄이 통치했다.
술탄의 궁전이었던 경탄의 집을 비롯한 이슬람 유적지는 대부분  이 시대의 것이다.

아랍의 술탄은 이 곳 잔지바르 노예시장으로 동아프리카에서
생포한 아프리카인들을 데려와서 유럽 상인들에게 팔았다.
잔지바르는 향료와 노예를 노린 유럽 상인들의
아프리카 전초기지가 되었고, 술탄은 막대한 부를 축적하였다.


잔지바르의 볼거리

영국대성당
입장료-3500실링

영국 대성당은 1873년 폐쇄된 과거 노예시장 자리 위에 세워졌다.  
성당의 방향은 죽은 노예들이 실려 나갔던 방향대로 지은 것이다.

노예를 감금하던 대성당의 지하를 직접 들어가 보니 두 칸의 쪽방이 보존되어 있었다.
이 어둡고 좁은 방에 노예들을 쇠사슬로 묶은 채 감금해 두었다고 한다.
아직도  쇠사슬이 있었으며 천장이 낮아 일어서지도 못하는 곳에
수십 명의 노예가 쇠사슬에 매달려
팔리기를 기다리는 상품으로 있었다니 오싹하기 그지없었다.

오래전에 지어 방치한 탓인지 몹시 낡은 그 성당은
기독교식 성당과 고딕 건축, 아랍풍이 조화되어 잔지바르 특유의 조각이 있고
탐험가 리빙스턴은 노예무역을 유럽에 알려 이를 금지시키는데 노력을 했다.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후 농사일과 사금 채취 등 많은 노동력이 필요했던
유럽인들은 튼튼한 신체의 노예들이 필요했다. 그러나 원주민인 인디오들은 유럽인들이 갖고
온 질병이나 열악한 대우로 숨졌고, 장시간의 힘든 노동에는 적합하지 못했다.
결국 악조건을 버텨내고 긴 항해에서 살아남은 튼튼한 신체조건의 흑인들이 가장 인기가 좋았다.

그 흑인 노예들은 주로 부족간의 전쟁에서 진 사람들을 흑인들이 직접 잡아
백인들에게 팔아 넘겼다는 소리를 들으니 더욱 더 비감이 들었다.

"커피와 설탕이 유럽인의 행복을 위해 꼭 필요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이 두 식물이 두 대륙을 불행에 빠뜨렸음은 확실하다. 그들은 이것을 심을 땅을 얻기 위해
아메리카를 공략했고, 이것을 키울 사람을 얻기 위해 아프리카를 약탈했다."
어디선가 읽은 한 대목의 글이다.

향신료 투어
투어비-5천 실링

잔지바르는 각종 향신료가 유명하다.
아프리카의 순수한 블랙과 이슬람이 만나 뿜어 내는 조화로운 향기라고 한다.
농장을 직접 방문하면 현지인이 직접 설명을 해 주는데
천연색조화장품에 들어가는 식물부터 커피향이 나는 나무
바닐라 향을 만드는 나무
우리나라 생강과 똑 같은 향을 내는 식물
쵸코를 만드는 향신료의 재료가 되는 열매 등 다양하고 신기한 나무와
열매를 직접 보고 냄새를 맡게 해 준다.
어느 열매를 문질러 직접 입술에 바르자마자
금방 진한 오렌지색 립스틱이 되어 신기하기 그지없는 순간이었다.
투어에 참여한 여행자들을 위해 현지인들이 직접 야자수로 만든 모자와 가방을
선물하기도 하고 각종 과일들을 깎아 대접한다.
아프리카의 열대 과일나무들도 함께 구경할 수 있는 좋은 기회다.

포장마차촌
포로하니 공원에 열린 장터에는 구운 문어, 오징어, 소고기나 간 꼬치,
염소고기 등 음식과 수산물을 팔고 있다. 불에 직접 구어 주는 오징어와 삶은 문어는
일반 육지의 것과는 다른 싱싱한 맛으로 인기를 끌고 있다.
저녁 6시가 넘으면 수많은 사람들이 몰린다.

*머큐리의 고향 잔지바르

또한 이곳 잔지바르는
'그룹 퀸, 프레디 머큐리의 고향, 잔지바르'에서는 프레디 머큐리의 고향이다.

퀸의 리드 보컬 프레디 머큐리(Freddie Mercury)는 에이즈로 사망했다.
아프리카 잔지바르(현 탄자니아) 태생인 머큐리, 4옥타브를 넘나드는 목소리로
온 세상을 사로잡았던 그도 에이즈를 피해가지 못했다.

양성애자였던 머큐리는 에이즈에 감염 사실을 부인하며 말년에 은둔생활을 했다.
결국 1991년 11월 24일 에이즈 감염을 공개한 직후 세상을 떴다.

타망고의 이야기  

뮤지컬로도 공연되는 프로스페리 메리제가 쓴 <타망고>는 흑인매매가 성행하던 시대에 흔히 일어났던 노예들의 반란에 대한 이야기다.

프랑스 국적의 희망호는 르두 선장이 이끄는 튼튼한 노예선이었다. 르두 선장이 아프리카의 노예 해안에 왔을 때 이름난 전사이자 노예상인인 타망고를 만났다. 타망고는 30명 가량의 노예를 팔아넘겼다.

거래의 성사를 축하하는 파티에서 타망고는 술에 취한 나머지 그의 아내 중에 가장 아끼던 에이세를 르두 선장에게 팔아넘겨 버렸다. 다음날 술이 깬 타망고가 이 사실을 알았을 때 노예선은 이미 출항하고 난 후였다.

그는 서둘러 작은 배로 쫓아가 선장을 설득했다. 그러나 선장의 눈에 힘세고 건장한 타망고는 비싼 값을 받을 수 있는 노예일 뿐이었다. 선장은 타망고를 다른 노예들과 함께 배 밑바닥에 실었다.

다음날 아침, 타망고는 갑판위에 에이세를 발견한다. 가슴이 찢어질 듯 아프지만 그녀를 구해줄 수 없었다. 타망고는 반란을 결심했다. 에이세는 그의 부탁에 따라 쇠사슬을 자를 수 있는 도구를 빵 속에 숨겨 건넸다. 타망고는 자신과 동료들의 몸을 묶고 있는 쇠사슬을 조금씩 자르며 계획을 세웠다.

어느 날 모든 쇠사슬이 끊기고 타망고의 외침에 따라 무리를 이룬 흑인들이 갑판 위로 쏟아져 나왔다. 긴 시간 전투가 이어지고 마침내 타망고는 승리의 외침을 했다. 르두 선장을 비롯한 백인들은 남김없이 바다에 던져졌다.

그러나 타망고는 배를 다루는 법을 몰랐다. 실수로 돛대가 부러지고, 구명정에 옮겨 탄 사람들은 배가 뒤집혀 죽음을 맞이했다. 남은 이들은 심한 바다에 흔들리며, 때로는 타는 듯한 햇빛을 받으며 먹을 것을 위해 서로 싸웠다. 과자 한 조각에 싸움이 일어났고, 그 때마다 약자는 죽는 것이다.

얼마의 시일이 지났을까 인근을 지나던 영국 선박이 정처 없이 떠도는 선박을 발견했다. 그곳에는 죽은 흑인 여자와 겨우 사람이란 것을 분간할 수 있을 정도로 앙상한 흑인 남자가 있었다. 부서진 돛대의 발치에 앉아있는 그는 말하지도 움직이지도 못한다. 그가 바로 타망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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